일단 머리카락은 은회색으로 탈색을 하겠습니다
형이 부모님 모시고 아르헨티나에 오래요. 당장은 말고요. 코로나 시국이 순조롭게 풀리면, 올해 말엔 남미로 날아갈지도 몰라요. 부모님은 형이 책임진다니, 에헤라 디야. 저는 이 기회에 남미를 한 번 돌아볼까 봐요. 혼자서 돌아다닐 수 있을까요? 눈 뜨고, 코 베어가는 남미에서 그래도 될까요? 늘 그렇게 다녔으면서도, 과거의 제가 왜 이리 낯설까요? 쉰 살의 배낭 여행자는 어떤 여행을 하게 될까요?
1. 싸구려 숙소는 가라. 부티크 호텔이 내 집(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숙소는 도미토리만 고집하지 않을 거예요. 외로울 땐 도미토리, 주머니가 좀 두둑하면 에어비엔비나 부티크 호텔에서 묵고 싶어요. 예전엔 잠만 잘 수 있으면 됐어요. 이제는 어떤 아침을 맞이할 것인가? 환하고, 조망권이 보장된 방이어야 해요. 펼쳐진 풍경을 보면서, 따뜻한 박하차 한 잔 마셔야죠. 배 불렀냐고요? 배는 여전히 고픈데, 밥보다 방이에요. 이런 날이 올 줄 누가 알았겠어요? 혼자사 노트북 뚝딱이다가, 어스름 해 질 녘 슬리퍼 질질 끌고 골목과 시장을 도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여행을 하고 싶어요. 누군가가 말을 걸어주면 고맙지만, 제가 먼저 말을 걸진 않을 거예요. 나이 먹을수록, 느는 건 유치함 뿐이더라고요. 그러니까 꼭, 제발, 어떻게든 누군가가 말을 걸어줬으면 좋겠습니다.
2. 투어에 돈을 아끼지 않을 거예요
투어는 대체로 비싸요. 그래도 그걸 해야, 차 없이도 깊숙이 들어가 볼 수 있어요. 자연이든, 현지인이든요. 낯선 사람들과 어울리기도 좋고요. 돈도 돈이지만, 사실 좀 귀찮아요. 제가 인간 코알라거든요. 어떤 장소가 마음에 들면, 뭘 더 보고 싶다는 생각도 안 들어요. 가던 곳 가고, 먹던 거 먹어도 충분하거든요. 그래서요. 일부러라도 저를 움직이게 해야 해요. 급격히 떨어진 운동 에너지를 그렇게라도 자극해야 해요. 돈을 써야만, 본전 생각에 움직일 테니까요. 이렇게라도 안 와 봤으면 어쩔 뻔했어. 가슴 쓸어내리는 순간들이 많았으면 좋겠어요. 더 보고 싶고, 더 도전하고 싶은 사람으로 늙으려면 투어에 돈을 아끼지 말아야 합니다.
3. 말리지 마세요. 클럽 죽돌이 갑니다.
돌을 던지세요. 침은 뱉지 마시고요. 이 나이에 클럽 죽돌이 꼭 해보고 싶습니다. 남미면 상관없어요. 제가 몇 살인지도 모를 텐데요, 뭐. 아니, 몇 살인지 관심도 없을 테니까요. 그냥 그렇게 있게만 해주세요. 맥주 한 병들고, 흠칫 두둠칫 어깨만 들썩이면 돼요. 예전처럼 여자들이 저를 번쩍 안아서, 자기네 동그라미 안에서 추게 하는 거. 그런 것까지는 안 바라요. 거북이, 싸이 CD 들고 가서 DJ에게 틀어달라던 추태도 이젠 자중할게요. 라면도 끓일 것 같은 뜨거운 살사의 밤에 머물게만 해주세요. 쫓아내지만 말아 주세요. 그래도 알아서 나갈 거예요. 눈이 감기고, 하품이 멈추지를 않아서 거북목 자세로 귀가할 거예요. 강도들이 저를 덮칠 수도 있으니 주머니 한쪽에 십 달러는 상비하고 있어야죠. 빛의 속도로 드리려고요. 약소하지만 살려만 주세요. 바닥에 납작 엎드려서 발발발 떨려고요. 위협을 주지 않는 자세는 어떤 자세인가? 연습 좀 미리 하려고요. 강도님들 심기 안 불편하시게요.
4. 트레킹에 욕심을 좀 내보려고요
걷는 재미에 눈을 떴어요. 예전엔 억지로 걸었다면, 이젠 돈 쓰면서 걸을 의향 있어요. 트레킹화도 좀 좋은 걸로 사려고요. 예를 들면 코오롱이나 K2 걸로요. 마추픽추를 트레킹으로 한 번 가보렵니다. 이미 봤던 마추픽추를 걸어서 보면 진짜 감동이 두 배인지 확인 좀 해봐야겠어요. 아직 혼자 텐트에서 잘 용기까지는 없지만, 이 기회에 한 번 눈 좀 떠보게요. 이 재미에 텐트에서 자는구나. 물아일체, 텐트일체가 되어 혼자 숲에서 눈을 떠 보겠습니다. 자연은 해치지 않는다. 오히려 품어주는 곳이다. 그걸 실감하고 싶어요. '나는 자연인이다'에도 한 번 나와야죠. 저는 태국 시골에 숨을 예정이니, 제작비가 좀 많이 들기는 하겠지만요.
5. 그때 그곳이 그곳에 있을까? 손수건 필수
가봤던 곳을 다시 가면 어떤 기분일까요? 많이 변했겠죠? 친구들은 많이 늙었을 테고요. 얼싸안고 울까요? 뭔가 서먹할까요? 기억 속 그곳들을 다시 가봐야겠어요. 멕시코의 과나후아토를, 파나마시티를, 과테말라 쉘라를, 에콰도르 키토를 다시 가봐야겠어요. 그리고 펑펑 울어야겠어요. 그냥 그러고 싶어요. 아직도 여기에 있구나. 옛 모습 그대로면 반가워서, 변했으면 속상해서, 보고는 싶은데 마을 이름조차 기억이 안 나면 서러워서 울어야죠. 눈물 바람인 여행이 될 거예요. 드라마만 봐도 소리까지 내면서 우는 게 특기예요. 버스 창에 볼을 비비면서, 뜨겁게 뜨겁게 울어 보렵니다. 그때 들었던 노래들을 들어가면서요.
6. 술도, 담배도, 고기도 없는 여행
그러고 보니 그때는 담배도 열심히 피웠네요. 늘 허기가 졌어요. 배는 금방 꺼지고, 돈은 없고. 멀쩡한 레스토랑은 꿈도 못 꾸죠. 배를 채울 수 있는 한 끼 양이 중요했어요. 이제 저는 양껏 먹지도 못해요. 술도 마시면, 일주일은 헤롱대죠. 담배는 십 년 전에 끊었고요. 그때는 돈만 많으면 먹고 싶은 거 다 먹겠지? 부자를 꿈꿨어요. 이제는 부자여도, 먹고 싶은 걸 먹을 수 없다는 걸 알아요. 이제는 부를 욕망하지 않아요. 한 살이라도 젊을 때 더 보자. 사라져 가는 시간의 가치를 아는 사람이 됐어요. 지금 채식 중인데, 남미에 가서도 고기는 예전처럼 먹지 못할 거예요. 고기가 한없이 들어가는 위장은 이제 없거든요. 고기도, 술도, 담배도 없이 남미에서 살사를 출 거예요. 아, 살사춤은 가서 배우려고요.
7. 무조건 혼자, 간헐적 동행은 환영
혼자 다녀야죠. 같이 내내 다니는 여행은 이제는 못 해요. 먹고 싶을 때 먹고, 굶고 싶을 때 굶으려고요. 자고 싶을 때 자고, 안 자고 싶을 땐 불도 좀 켜놓고요. 어딘가에서 더 머물고 싶을 수도 있고, 아니다 싶으면 재빨리 도망칠 수도 있어야죠. 같이 다니면 그렇게 든든하고 좋았는데, 이제는 혼자가 좋아요. 외로움도 괜찮아요.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감정이, 부대끼면서 싫증 내는 것보다는 나으니까요. 나이 먹어서, 더 불쌍해 보인다고요? 그렇게 관심 가져줘서 감사해요. 그렇게라도 시선 좀 받으면 저야 좋죠. 나이를 먹어도 관종 기질은 안 사라졌거든요. 이러니 저러니 해도 저의 예상은 다 틀릴 거예요. 여행은 그래서 위대해요. 지금 저의 깜냥으로는 아무것도 맞힐 수 없어요. 과연 이 여행은 시작될 수 있을까? 근본적인 의심을 떨치지 못한 채 비행기를 타요. 괜한 짓을 저질렀나? 돌이킬 수 없을 때 두려움이 밀려들어요. 이미 엎어진 물. 이미 엎어졌으니, 어쩔 수 없이 마음을 다 잡아요. 비행기가 솟구치고, 저는 손잡이를 꽉 잡아요. 이 비행기에서 죽지만 않으면, 신세계가 나를 기다린다. 늘 하던 기도를 하기 위해 눈을 감을 테죠. 모든 여행은 그렇게 시작했어요.
PS 매일 글을 씁니다. 우리에겐 시간이 많기도 하고, 적기도 해요. 오늘 하루는 짧았나요? 길었나요? 글을 쓸 때 시간이 길어져요. 이게 상대성 이론인가요? 그 길어진 시간 속에서 어푸어푸 발버둥을 치면 글이 끝나 있어요. 도끼 자루가 썩어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