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컷 여행할 거예요. 그때가 오면
야간 버스를 타고 싶어요. 20시간 이상 걸리는 장거리 버스에서 졸다, 깨다 하고 싶어요. 까만 하늘에 촘촘히 박힌 별들을 보면서, 음악을 듣고 싶어요. 아직 한참 남았으니, 되려 마음이 편해요. 언제쯤 도착할까? 헛된 기대를 접고, 음악과 풍경에 집중할 수 있으니까요. 에어컨 바람이 너무 세서 오들오들 떨다가 침낭을 꺼내고 싶어요. 나나 되니까 이런 것도 미리미리 준비하는 거예요. 그 안에 애벌레처럼 폭 파묻혀서, 나밖에 느낄 수 없는 포근함에 감사하고 싶어요.
비행기를 타고 싶어요. 활주로에서 천천히 구르다가 속도를 높이고, 공중으로 솟구칠 때의 긴박감을 느끼고 싶어요. 흔들리는 비행기 안에서, 죽는 거 아냐? 늘 반복되는 똑같은 공포를 느끼고 싶어요. 재미도 없는 기내지를 뒤적이다가, 멋진 사진에 감탄하고 싶어요. 의자를 젖히고, 그나마 가장 쾌적한 자세로 한숨 돌리고 싶어요. 얇디얇은 기내 담요를 돌돌 말고, 와인 한 잔 홀짝이고 싶어요. 의외로 와인이 맛있어서, 잠깐 놀라고, 내내 흐뭇해지고 싶어요.
타이베이에서 비를 흠뻑 맞고 카페로 피신하고 싶어요. 우비와 오토바이로 가득한 도로를 보면서, 뜨거운 카푸치노를 마시고 싶어요. 신호를 기다리는 오토바이 헤드라이트들이 뿌옇게 번지는 풍경을 관찰하고 싶어요. 마침 카페에서 나오는 노래가 너무 좋은데, 제목을 몰라 발을 동동 구르고 싶어요. 내 몸에서 나는 비 냄새를 맡으며, 비의 냉기로 떨고 싶어요. 브라우니를 시키고, 절반만 먹고 싶어요. 치즈 케이크를 하나 더 시킬까? 단단한 게 아니면 싫은데. 뭔가 쓸데없는 걸로, 오래 고민하고 싶어요.
런던의 공원에서 '달과 6펜스'를 읽고 싶어요. 읽다가 너무 아까워서, 책을 덮고 싶어요. 잠시 졸다가 일어나면, 으슬으슬 바람이 불면 좋겠어요. 마침 겉옷을 깜빡해서, 덜덜 떨면서 런던의 어딘가를 걷고 싶어요. 떠들썩한 펍에 들어가서, 나만 빼고 모두가 대화를 하는, 깨끗한 외로움을 기네스에 섞어서 마시고 싶어요. 누군가가 말을 걸면, 천천히 말해주면 고맙겠다. 영국 영어는 어려워. 솔직하고 천진하게, 말을 건 사람 기분을 잡치게 하고 싶어요.
프랑스 프로방스에서 길을 묻고 싶어요. 영어로 묻고, 프랑스어로 답을 듣고 싶어요. 못 알아 들었지만, 메르씨, 메르씨. 고마우니까 고맙다고 인사하고 싶어요. 가려던 곳은 여전히 모르고, 붐비는 빵집으로 충동적으로 들어가고 싶어요. 빵 냄새에 홀려서 들어왔더니, 마침 뜨거운 빵이 나를 기다리고 있어요. 이렇게 맛있는 빵이 세상에 또 있을까? 프랑스 사람은 좀 더 거만해도 되겠어. 모든 건방진 프랑스인을 대신해서, 빵이 내게 정중하게 사과하는 시간을 그렇게 갖고 싶어요.
스페인 발렌시아에 사는 하비에게 놀러 가고 싶어요. 있는 친구 없는 친구 다 불러 모아서 자기네들끼리만 떠드는 꼴을 보고 싶어요. 나를 핑계로 모아 놓고는 온통 스페인어로 묻고, 스페인어로 답하는 제멋대로인 스페인 놈들에 휩싸이고 싶어요. 머리가 다 지끈지끈해요. 스페인 놈들은 너무 무례하고, 시끄러워. 참다 참다 짜증을 내면, 웃겨 죽겠다며 모두 배를 잡고 웃는 꼴을 보고 싶어요. 피곤하다는 나를 억지로 클럽으로 데려갔으면 좋겠어요. 나를 신기한 원숭이처럼 힐끗대도 상관없어요. 아침까지 춤추고, 삼일은 끙끙 앓았으면 좋겠어요. 하비가 뜨거운 우유를 들고 오면, 한국 사람은 아플 때 죽을 먹어야 해. 맡겨놓은 사람처럼 버럭 쨔증도 좀 내봤으면 좋겠어요.
런던에서 저를 해고한 식당을 찾아가고 싶어요. 그래요. 제가 화장실 청소를 정말 못하긴 했어요. 주인이 오래 참은 거죠. 달걀도 훔치다가 들켰는데, 그날로 자르지 않아서 사실은 감사해요. 그래도 복수는 해야죠. 해크니에 사는 윌리엄이랑 계획은 다 짜 놨어요. 윌리엄 턱시도를 입어요. 나비넥타이도 매고요. 윌리엄과 저는 식당으로 가서 풀코스로 음식을 주문해요. 주인이 저를 알아보지 못할 확률이 높으니까, 20년 전 여기에서 화장실 청소를 했단다. 친절하게 설명부터 해야죠. 깜짝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뜰 테죠. 팁을 두둑하게 얹어서 계산을 하고 나와야죠. 윌리엄과 근처 펍에서 늦게까지 맥주를 마시며 낄낄대고 싶어요.
눈이 와도 좋아요. 비가 와도 좋아요. 추워도 좋고, 더워도 좋아요. 괜히 왔다. 후회를 해도 좋고, 며칠간 끙끙 배탈이 나도 좋아요. 누군가에게 상처를 받아도 좋아요. 인종 차별주의자를 만나도, 그를 저주하지 않을 자신 있어요. 떠날 수 있으니, 이런 일도 겪는 거죠. 떠나지 못하는 괴로움을 아니까, 떠나서 마주하는 모든 후회를 사랑할 수 있어요. 정신없이 다닐 거예요. 그때가 오면요. 여행이라는 게 기적임을 알았으니, 매일매일 감사하고, 자축할 거예요. 죽지 않은 삶은 이렇게 보상받는 거구나. 무수한 사고와 죽음 사이에서 생존해 있음에 감사하고, 감사할 거예요.
PS 매일 글을 씁니다. 작은 기척이 글이 되고, 작은 흔들림이 글이 돼요. 전기 자극 같은 거죠. 어쨌든 완벽한 멈춤 속에서는 글이 나오지 않아요. 살아 있으니, 글도 나와요. 진동이 없다면, 글은 수면 밖으로 나올 일이 없죠. 세상 모든 흔들림을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