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화 속 설레는 풍경들, 그윽한 시간
유럽은 런던에 어학연수 갔을 때 주변을 돌았던 게 전부예요. 저가 항공 이용해서 띄엄띄엄 간 거라서 몇 나라 안 돼요. 어릴 때 해외여행하면, 무조건 유럽을 떠올렸어요. 근사하잖아요. 고풍스러운 건물과 거리, 요정처럼 예쁜 사람들. 글자만 가득한 문고판 책을 참 맛있게 읽고, 햇빛만 보면 자리 깔고 눕는 사람들. 수염과 손발톱은 잘 안 깎으면서, 땀냄새엔 민감한 사람들. 내가 완벽한 이방인이어서 더 특별하고, 쓸쓸했던 곳. 산책의 재미가 기가 막힌 곳은 유럽이 아닐까 싶네요.
1. 사랑스러움 그 자체, 날씨 빼고, 음식 빼고 - 영국
영국은 저에겐 특별한 나라예요. 오래 머물러서일 수도 있지만, 오래 머물러서 더 싫어질 수도 있는 거 아닌가요? 전 영국이 좋아요. 특히 영국 사람요. 영국 친구들이랑 어울리면, 엔도르핀이 퐁퐁 솟아요. 세상 가장 재밌는 사람은 영국 사람 아닐까요? 말도 안 섞을 것처럼 차가워 보이는데, 말 트고 나면 그렇게 따뜻할 수가 없어요. 아일랜드 사람들은 또 달라요. 아일랜드 사람은 얼굴만 백인인 한국사람 같아요. 말술 마시고, 하고 싶은 말은 꼭 해야 직성이 풀리죠. 영국 친구들은 이상하게 뭉클하더라고요. 표현은 안 하는데, 넌 내 마음 알지? 이런 느낌? 옷 잘 입고, 은근히 챙기고, 가족까지 섹드립에 총동원하는 잡놈들이 오늘따라 그립네요.
2. 까칠한데 멋짐 - 프랑스
프랑스는 아름답고, 맛있는 나라죠. 빵 하나를 봐도, 영국이랑 참 달라요. 한 나라는 배만 채우면 돼. 한 나라는 이것도 음식이냐? 극단적으로 달라서 이웃 나라라는 게 믿기지가 않아요. 그래서 서로 물어뜯나 싶기도 하고요. 저는 프랑스 빵집이 그렇게 재밌어요. 빵 굽는 냄새가 아침 공기를 뚫고 내게 올 때, 아주 사소하게 기분이 좋아져요. 에비앙 생수가 삼다수보다 싼 것도 좋아요. 에비앙보다는 볼빅을 더 좋아하지만, 어쨌든 푼돈으로 에비앙 실컷 마시는 게 괜히 좋아요. 말투가 좀 퉁명스러운데, 저한테만 그런 게 아니니까요. 프랑스 친구들에게 일부러 막 대하는 편이에요. 일종의 복수죠. 너희들도 좀 서러워 봐라. 은근 뒤끝 없고, 잘 받아주더라고요. 결국 제가 제일 못된 놈이에요. 기회가 되면 프로방스 시골마을들을 돌고 싶어요. 시골 음식, 시골 인심, 시골 날씨에 푹 젖어보고 싶어요. 프랑스도 참 지역 나름인 게, 스트라스부르 사람들은 엄청 순둥이들이더라고요. 독일과 국경을 맞대고 있어서일까요? 독일 사람들이 평균적으로 순둥이들인가?
3. 물가에 오만정이 떨어짐 - 스위스
스트라스부르에 있을 때 기차 타고 한 시간 이십 분만 가면 스위스 바젤이 나와요. 거기만 찍고 왔어요. 진짜 스위스는 하나도 못 본 거죠. 스타벅스에 갔는데, 프랑스 스타벅스보다도 약 1.7배 더 비싸더군요. 프랑스가 물가가 싼 나라가 아니잖아요. 그래서 충격이 컸어요. 아니나 다를까 스위스 스타벅스가 세계에서 가장 비싸더군요. 스위스에서 뭐 하나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다시 프랑스 스트라스부르로 넘어왔네요. 스위스를 여행하려면 도대체 얼마나 부자여야 하는 거지? 이 생각을 하니까, 알프스가 참 멀리 느껴지더군요. 그래도 언젠가는 가야죠. 알프스는 한 번 제대로 보고 오려고요.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요. 스위스에서 보고, 오스트리아에서도 보고, 이탈리아에서도 봐야죠. 오, 그러고 보니까 에어 프랑스에 백만 원 가까운 돈이 있어요. 포르투갈을 가려고 했는데, 코로나가 터졌거든요. 이런저런 아름다운 설산들을 많이 본 저에게, 알프스는 어떤 식으로 놀라울까? 참 궁금하네요. 이 와중에 스위스 음식은 하나도 안 궁금하네요.
4. 비행기 경유지였던 게 전부,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공항버스를 타고 프랑스 스트라스부르로 왔어요. 마트 물가가 상당히 저렴하더군요. 여행 중 만난 독일 친구들이 하나같이 착했어요. 여행 중에 갑자기 못되지기도 쉽지 않지만요. 그래도 평균값이라는 게 있잖아요. 다들 예의가 바르더라고요. 경우 없는 독일 친구들을 못 만나 봤어요. 안 가 봤는데, 이미 참 좋은 나라예요. 뮌헨에 오래 머물고 싶어요. 아주 예쁜 도시일 것 같아요. 베를린도 유럽 친구들이 그렇게 칭찬하더라고요. 베를린에서 클럽 죽돌이도 되고 싶어요. 역류성 식도염 때문에 맥주나 와인을 못 마시는데, 독일에선 몸이 좀 더 멀쩡해졌으면 좋겠어요. 맥주 한 병도 못 마시고 오면 그게 무슨 독일 여행인가요? 채식주의자들이 그렇게나 많다니까, 맛있는 채식 소시지도 있겠죠? 맛있는 음식도 꽤나 많을 것 같다는 기대감이 좀 있습니다.
5. 악몽 같았던 투어, 이탈리아
이탈리아가 악몽이란 건 아니고요. 여행사가 악몽이었어요. 인생 최초이자, 마지막 여행사 여행이었죠. 요즘엔 그런 가이드 없을 거예요. 한국 가이드였는데, 우리가 이미 돈까지 지불한 식당을 안 갈 권리도 없다는 거예요. 믿기세요? 자유 시간이 너무 없어서, 그렇게라도 좀 다니고 싶다는데요. 베니스에선 한참 떨어진 곳에 숙소를 잡아 놔서, 오밤중에 따로 나와서 기차까지 타고 베니스의 밤거리를 걸었던 기억이 생생해요. 어떻게든 조금이라도 더 보겠다는 의지였죠. 그 아름다운 로마도 투어로 돌다 보니 감흥이 1도 없더군요. 조금은 고생스럽더라도 내 두발로 찾아내고, 감격하는 과정이 필요하다는 걸 알았어요. 피렌체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깜짝 놀랄 만큼 예뻤지만, 전 여전히 이탈리아가 고파요. 진짜 이탈리아는 여전히 못 봤다고 생각해요. 이탈리아 쪽 알프스인 돌로미티 쪽을 꼭 가보고 싶어요. 그렇게나 아름답다더라고요.
6. 인생 여행, 스페인
유럽에서 스페인은 더 후진 나라일 거라고 생각했어요. 우리 때는 유럽에서 스페인, 포르투갈을 가지 말라는 말이 많았어요. 위험하다고요. 가난하고, 치안 안 좋은 나라라는 게 이유였죠. 저도 동갑내기 스페인 친구 하비가 아니었으면, 안 갔을 거예요. 한국에 있을 때, 스페인 대사관에서 일했던 친구였어요. 오렌지로 유명한 발렌시아에 사는데, 하비네 집에 묵으면서 동네 맛집, 동네 친구들과 어울렸죠. 그러니 어찌 안 즐거울 수가 있겠어요? 스페인은 저에겐 유럽에서 가장 맛있는 나라, 가장 따뜻한 나라, 가장 시끄러운 나라(이탈리아 나폴리와 동급), 가장 독특한 나라(이슬람 문화가 곳곳에 섞여 있어요)였어요. 론다가 그렇게 또 아름답더군요. 바위산에 맥도널드가 있어요(지금도 있는지는 모름). 맥도널드에서 까마귀 끼룩끼룩 솟구쳐 올라오는 풍경을 보며 먹었던 맥머핀이 지금도 생각나요. 맥도널드에서 반지의 제왕을 실사로 보는 느낌이랄까요? 깔라마리 튀김, 그러니까 오징어 튀김에 맥주 한 잔이면 캬아아. 현지인과의 어울림, 날씨, 볼거리, 음식을 모두 고려한다면 유럽 여행의 끝판왕은 스페인이 아닐까 싶어요. 아직 못 가본 포르투갈에 그래서 기대가 큽니다. 비슷하면서, 또 다를 것 같아서요.
7. 겨울에도 그렇게 예쁘다니 - 체코 프라하
여행은 날씨라고 생각하는 사람이에요. 겨울에 프라하를 왜 갔냐고요? 싸니까요. 런던에서 십만 원도 안 하는 항공권으로 갈 수 있는 도시였으니까요. 을씨년스러운 날씨도 프라하의 아름다움을 가리지 못하더군요. 음식은 또 왜 그렇게 맛있나요? 사람들도 막 친절하지는 아닌데, 불쾌한 기억도 없어요. 한국말 몇 마디씩 하는 체코 사람이 꽤나 있던데요? 한국 사람이 오죽 많이 와야죠.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오렌지색, 노란색, 연두색 건물들이 신선하더군요. 따뜻한 봄의 체코는 얼마나 더 아름다울까? 그런 생각을 매일 했어요. 제가 좋아하는 작가 밀란 쿤데라도 저에게 영향을 미쳤어요. 그의 문체는 어찌 그리 담담하게 완벽할까요? 그런 작가가 태어난 나라니까, 문화적으로 대단한 나라임이 틀림 없어. 그런 선입견이 저에겐 있어요. 유럽은 다 비슷하겠지. 지금도 그런 생각이 없진 않은데, 프라하는 종합 선물 세트 같은 느낌이에요. 롯데 월드 매직아일랜드가 프라하를 베낀 건 아닐까 싶은, 그런 느낌요.
8. 홀딱 반했지 -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암스테르담을 자전거로 여기저기 돌았는데, 참 예쁘더군요. 런던보다 조금 키가 큰 듯한 집들이 오밀조밀한 주택가가 특히 마음에 들었어요. 사람들도 확실히 키가 크더군요. 마침 날씨도 좋아서, 암스테르담은 유럽에서도 제가 가장 좋아하는 도시 중 하나가 됐어요. 사람들에게서도 좋은 인상을 받았어요. 제가 자전거 운전 미숙으로 차랑 박을 뻔했어요. 차가 아슬아슬 피하더니,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웃더군요. 저는 어쩔 줄 몰라서 계속 쏘리만 하는데, 운전자는 오히려 재밌다는 표정이더라고요. 유럽의 미국 느낌? 유쾌하고, 말 잘 걸고, 잘 웃는 사람들요. 작은 나라여서 좀 폐쇄적이지 않을까 싶었는데 오히려 반대였어요. 우리는 개방해야 더 발전한다. 그걸 본능적으로 깨달은 사람들 같아 보였어요. 별의별 치즈를 다 먹어봤네요. 낙농 강국이니까요. 그런데 저는 오히려 종류별로 먹은 후무스가 더 기억에 남아요. 후무스는 중동 음식이죠. 병아리 콩으로 만든 스프레드로 생각하시면 돼요. 그만큼 그쪽에서 온 이민자들이 많다는 얘기죠. 후무스에 이런저런 맛을 가미해서 종류만 수십 가지더군요. 너무 맛있어서, 잔뜩 쟁여놓고 빵에 발라 먹었네요.
PS 매일 글을 씁니다. 삶은 고달픈가요? 달콤한가요? 둘 다죠. 그래서 신비롭고, 그래서 맛있습니다. 한 가지 맛만 있는 세상은, 또 다른 지옥이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