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삶을 관통했던 재난들

재난은 과연 대비가 가능할까?

by 박민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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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통에 태어나지 않았다는 것만으로도 복 받은 삶이죠. 80년대 형, 누나들이 화염병 들고 시위할 때는, 저러지 좀 말았으면. 최루탄 가스가 매워서, 원망도 했어요. 철 없을 때니까, 나만 안 불편하면 됐던 거죠. 90년대 학번이라 학생 운동과 상관없이 살 수 있었어요. 세상일에 분노하는 친구들을 미안한 마음으로 바라보면서요. 풍요로운 시대였어요. 세기말이란 단어가 억지스러울 만큼요.


79년 석유 파동 기억하세요? 주유소마다 긴 줄이 떠올라요. 난방을 하려면, 곤로로 달걀 프라이라도 해 먹으려면 등유가 필요했어요. 석유 값이 미친 듯이 올랐거든요. 그마저도 구할 수가 없었죠. 이란이 석유 수출을 중단하면서 현물 시장에서 석유가 배럴당 40달러까지 치솟아요. 73년에 10달러 정도였던 게, 6년 사이에 4배나 폭등을 해버리니 서민들 삶이 얼마나 황폐해졌겠어요? 1980년 경제 성장률이 마이너스 1.7%인데요, 전년도 경제 성장률이 8.6%니까 거의 10% 수직 낙하한 셈이죠. 물가도 30%나 올랐어요. 80년도에 국민학교 1학년 꼬마였으니, 주유소의 긴 줄만 기억해요. 어른들의 삶은 생지옥이었겠죠.


1997년 IMF 때 저는 복학생이었어요. 나라가 부도가 난다는 게 뭔지도 잘 몰랐어요. 달러 환율이 900원에서 거의 2천 원까지 치솟아요. 돈의 가치가 휴지가 된 거죠. 물가는 폭등하고, 기업들은 줄줄이 도산해요. 해태, 기아, 대우도 그때 다 망하고 말았죠. 금 모으기 운동 기억하세요? 전 세계 금값이 흔들릴 정도의 어마어마한 금이 장롱에서 세상 밖으로 나와요. 저는 그때 학원 강사로 일하는 중이었는데, 졸지에 직장을 잃게 돼요. 아이들 학원 보낼 여유가 어디 있었겠어요? 취업이 갑자기 하늘의 별따기가 돼요. 매일 뉴스를 보기가 겁났죠. 미래가 보이질 않았어요. 이렇게 쫄딱 망한 나라에서 하루라도 빨리 탈출해야 한다. 그런 조급함만 가득했죠. 그래도 탈출할 방법을 모르니, 망한 나라에서 꾸역꾸역 살 수밖에요.


2001년 911 테러 때 정신적 충격은 평생 가장 컸을 거예요. 지구 멸망을 실시간으로 목격한 느낌이었죠.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요? 비행기가 거대한 빌딩을 뚫고 자폭을 하다뇨? 화마에 둘러싸인 빌딩에서 사람들이 뛰어내려요. 불에 타 죽을 것인가? 떨어져 죽을 것인가? 희망이 없기는 마찬가지인, 그 참혹한 순간에 누군가는 뛰어내리기를 택해요. 혹시라도, 혹시라도 나뭇가지에라도 걸리겠지. 재킷이 낙하산 역할을 해주겠지. 말도 안 되는 희망을 붙들고는 뛰어내려요. 단 몇 초라도 희망을 갖고 싶어서요. 모두 가족에게 전화하기 바빴어요. 무사한 한국에 있어도, 한국의 가족이 너무나 보고 싶은 순간이었죠. 미국은 철옹성, 절대적으로 안전한 나라. 그런 환상이 무너졌던 날이기도 했죠.


2004년 쓰나미, 2011년 동일본 대지진 때도 인간의 목숨은 파리 목숨이구나. 자연의 위력 앞에서 일방적으로 당할 수밖에 없음에 무기력해졌죠. 거대한 해일이 밀려와요. 그 속도는 언뜻 부드러워서, 어떤 사람들은 넋 놓고 바라만 봐요. 사진을 찍어요. 그렇게 정신줄 놓고 있다가, 결국 목숨을 잃어요. 그런 주검이 바다를 떠돌다가 밀물과 함께 떼로 밀려와요. 가난한 바다 사람들은 그런 시체의 옷과 귀금속을 훔치기 바빴대요. 후쿠시마에선 원자력 발전소가 웨하스처럼 무너져 버리더군요. 그 오염수를 먹으며 자란 해산물은 우리 몸에 얼마나 쌓여 있을까요? 무사한 삶은 당연한 게 아니라, 얼마나 대단한 특혜인가? 몸서리를 치며, 나를 피해 간 재앙에 몸서리를 쳐야 했죠.


지금은 코로나로 손발이 꽁꽁 묶인 채 살고 있어요. 앞에서 예를 들었던 공포에 비하면, 코로나는 조금은 덜 무섭기는 했네요. 대신 참 오래오래 인류를 괴롭히고 있죠. 에이즈 공포가 코로나보다 더 강렬했던 것 같아요. 에이즈는 말도 못 하게 무시무시한 병이었어요. 당시 뉴스 보도를 곧이곧대로 믿는다면요. 시간이 지나고, 치료약들이 나오면서 그때만큼의 공포는 아니게 됐어요. 앞으로도 몇 번의 끔찍한 일들은 우리의 간담을 서늘하게 할까요? 무슨 수로 조심하고, 대비하겠어요? 주어진 시간을 감사히 쓰는 수밖에요. 모두 벌벌 떨기만 하는 것 같지만, 이때가 기회다. 열심히 땅을 사고, 아파트를 산 사람들은 떼돈을 벌었죠. 그런 배포가 있으니 돈도 버는 거죠. 나만 무사할 것이다. 그런 긍정적 자세가 나쁜 걸까요? 걱정한다고 불행이 피해 가는 것도 아니잖아요. 나는 괜찮을 거야. 나는 무사할 거야. 무사할 때까지, 괜찮을 때까지는 긍정하며 살아요. 그건 어리석은 게 아니라, 삶의 밝은 의지니까요.


PS 매일 글을 씁니다. 가지지 못한 것들보다는, 가진 것들을 생각하며 살고 싶어요. 후회되는 것보다는, 일어날 기쁨을 생각하며 살고 싶어요. 내 수중의 돈으로 사 먹을 수 있는 가장 맛있는 걸 사 먹으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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