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워 주세요. 늙은 여행자는 이제 그 낭만이 무섭습니다

이제 타인과의 교감이 불편합니다

by 박민우
킹카두명.jpg 카즈마네 집에 가면 한 달도 머물 수 있죠(15년 전 콜롬비아)


-괜히 호텔에 돈 쓰지 말고, 우리 집에서 자!


이런 말 들으면 그렇게 든든할 수가 없죠. 외국인 친구들이 그런 말을 해주면, 신기한 생각도 들어요. 뭘 믿고 재워준다는 거지? 믿는다는 게, 단순히 범죄자거나 도둑놈일 수도 있다는 걸 의미하는 건 아니에요. 불편한 사람일 수도 있잖아요. 만나서 즐거운 사람과 동거인으로서 합격은 전혀 다른 개념이거든요. 카우치 서핑 아시나요? 조건 없이 여행자를 재워주는 비영리 커뮤니티죠. 방 못 구했을 때, 카우치 서핑 덕을 톡톡히 봤죠. 카우치 서핑의 장점이 단순히 공짜 잠만은 아니에요. 현지인 삶을 깊숙이 들여다볼 수가 있어요. 가이드북이나 블로그에는 없는 현지인 시점의 세상을 들여다볼 수 있죠. 현지인들의 단골집, 현지인들이 생각하는 자기 나라, 자기 동네의 이야기, 정치, 자랑 등을 실감나게 접할 수 있어요. 진짜 여행이란 생각이 들죠. 그동안의 여행이 수박 겉핥기란 생각이 들 정도로요.


요즘 여행 유튜브 채널 '뜨랑낄로'를 자주 보는데요. 콜롬비아에서 미국으로 이동했나 보더라고요. 친구네 집에서 묵더라고요.

https://www.youtube.com/watch?v=1OehDN8Dliw

멋진 사람이 멋진 여행을 하는 것 같아서 샘도 나는데, 과연 나는 저 친구처럼 잘 지낼 수 있을까? 이젠 자신이 없는 거예요. 표면적으로는 누구보다 잘 지낼 거예요. 눈치를 열심히 보는 편이니까요. 이삼일 지나면, 그렇게나 피곤하더라고요. 눈치 보지 않는 나만의 시간이 필요하다. 탈출을 꿈꾸게 돼요. 그럼 이삼일만 묵으면 되겠네. 아, 그러네요? 이전엔 너무 오래 머물러서, 그 생각을 못 했네요.


전혀 불편하지 않은 예외적인 친구들이 있기는 해요. 스페인에 사는 동갑내기 하비, 오사카에 있는 카즈마는 가족 같아요. 자고 싶은 만큼 자다가 일어나도 딱히 눈치 볼 것 같지는 않아요. 내가 무슨 행동을 해도, 그러려니 할 것 같은 믿음이 있으니까요. 하지만 보통은 눈치를 봐야 해요. 그건 당연한 거예요. 혼자 사는 세상이 아니니까요. 집주인이 일어났는데, 계속 자고 있으면 안 돼요. 법으로 따로 정해 놓은 건 없지만, 상식이란 게 그래서 있는 거죠. 커피나 간식 같은 것도 가끔은 쏴 주는 게 좋아요. 가난한 여행자란 걸 누구보다 잘 이해하는 사람들이지만 그렇게 한 번씩 쏴야, 내 마음이 편해지는 법이거든요.


한국 요리를 해주면 참 좋아들 하더라고요. 우리에겐 별 거 아닌 음식도, 굉장히 특별하게 받아들여요. 가장 손쉬운 걸로는 만두 라면이나 떡볶이가 있겠네요. 요즘 한국 라면 없는 곳은 거의 없어요. 만두도요. 만두는 꼭 한국 만두일 필요는 없고요. 현지 만두 넣어도 훌륭해요. 파 듬뿍, 만두 몇 개 넣은 라면 끓여주면 대부분 감격하더라고요. 터진 만두가 라면 국물에 스며서, 이보다 맛있을 수 없는 라면이 되더라고요. 오사카에선 김치도 담가 봤어요. 터키에선 채식 수프를 만들었고요. 채식주의자 집에서 머물렀거든요. 감자, 양파 듬뿍 넣은 채소 수프로 칭찬 좀 받았죠. 이렇게나 잘 지냈어요. 호텔에서는 절대 느낄 수 없는 감동적인 경험들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젠 절대로 저렇게 지낼 수 없다고 선을 긋게 돼요. 불편함을 노력으로 극복하는 게 싫으니까요. 나만의 안락한 시간이 주는 유혹이 갈수록 커져가요. 왕성한 사교도 시기가 따로 있는 건가 봐요. 성적 호르몬이 단순히 섹스에만 활용된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그런 호르몬은 사교에도, 외부로 향하는 호기심에도 활용되죠. 딱히 궁금할 것도 없고, 어울림에 대한 환상도 없는 나이가 되니, 저렇게 외국 친구들과 어울리는 모습이 부럽지가 않은 거예요. 금방 들통날 거짓말을 이렇게 뻔뻔하게 하네요. 네, 부러워요. 부러워 미치겠어요. 그런데 불편함은 감수하기 싫어요.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고요? 피할 수 있으면요? 그럼 피해야 하는 걸까요? 저도 장기 여행을 조만간 할 것 같아요. 계획이 있는 건 아니고요. 그냥 느낌적 느낌이랄까요? 올해가 가기 전에 어딘가를 떠돌 것만 같아요. 그때는 일부러라도 저는 누군가에게 신세를 지려고요. 나이 탓하면서, 고립되지 않으려고요. 억지를 부려서라도, 불편함에 풍덩 빠져 보려고요. 할아버지가 되어서도 어울릴 수 있다는 걸 보여주려면, 나이 마흔아홉에는 스무 살처럼 놀아야죠. 저를 따라서 늙어갈, 젊은 친구들에게 재미나게 늙는 모습을 보여줘야 하지 않겠어요? 아하, 장기 여행이라! 어딘가로 떠날 생각을 하니, 심장이 또 꿀렁대기 시작하네요. 저는 어디로 떠날까요? 궁금하시죠? 저도 궁금하네요.


PS 매일 글을 씁니다. 어떤 글이 좋은 글일까요? 쉬운 글이 좋아요. 쉽고, 담백한 글을 쓰고 싶어요. 모든 의도를 숨겨 놓고, 짜릿해하는 글 말고요. 숨은 의도 따위는 없는, 평평하고, 다 까발려진 밋밋하고, 평평한 글을 쓰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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