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한 시간 만에 메시지가 왔다. 친절한 사람이다. 아이고 고맙다. 에어비엔비로 내가 첫 손님인가 봐. 흥분한 기색이 전해진다. 그 흥분을 좀 더 일찍 했어야지. 공항 픽업도 좋은데, 신속한 답이 먼저다. 후기도 없어 가뜩이나 불안한데, 뭘 믿고 당신 집에서 머물겠어요? 지하 와인 창고에서 살해당하는 상상을 했다고요. 이 상상을 하게 만든 건 당신이에요. 실은 제때 답이 올까 봐 조마조마했어요. 고마워요.
응?
15라리를 거슬러주지 않는 데이터 기계를 생각했다. 그래 봤자 6천 원이다. 날리면 된다. 머물면 한 달 내내 무제한으로 인터넷을 쓸 수 있다. 스마트폰 데이터 때문에 그냥 한 달을 있자고? 아니, 그냥 돈 때문이 아니고.
해석하라
기계가 내게 숙제를 내준 거잖아. 6천 원 때문이 아니라니까.
조지아야? 아르메니아야?
아침에 Hurma라는 식당을 갔다. 내가 첫 손님. 실내가 더웠다. 나만 덥나? 내 다음, 다음 손님이 잠시 앉았다 나간다. 내 다음 손님도 밥만 먹고 나간다.
-문을 좀 열어 놓을게요.
종업원은 흔쾌히 그러라고 한다. 이제야 좀 살 것 같다. 대신 빵빵 크랙션 소리가 거슬린다. 손님으로 꽉 찬다. 트빌리시에서 뜨는 브런치 식당이다. 내가 문을 열겠다고 할 때까지 군소리 없이 앉아있는 조지아 손님들이나, 시끄러우니 문을 닫고 에어컨을 켜자. 이 생각을 못 하는(혹은 안 하는) 식당 주인이나다. 나서는 것도 싫어하고, 자신의 불편, 타인의 불편에도 둔감하다. 속 터진다. 그러니까 즉시즉시 말하면 되겠네. 알아서 날 이해해 줘. 사랑해 줘. 이런 연애가 비극으로 치닫는다. 조지아를 나에게 맞추라고 발광하고 있다. 그건 불가능하다. 왜 주문을 안 받나요? 왜 거스름돈을 안 주나요? 그때그때 묻겠다. 따지는 투로 말고, 공손하게.
버스를 탄다.
내 옆자리가 비었다. 붐비는데 내 옆 딱 한 자리만 비어있으면 예민해진다. 여중생쯤 소녀 셋이 겹쳐서 앉는다. 내 몸에 닿는데도 기겁하지 않는다. 웃음 소리가 커진다.
숙소를 옮기고도 매일 파브리카 호텔로 출근 도장을 찍는다. 19라리(8천 원) 뷔페만 생각하면 웃음이 난다. 8라리 방에서 자면서 19라리 뷔페를 먹으려고 버스까지 탄다. 조지아의 체리맛을 알아버렸다. 뷔페식당엔 제철과일이 예쁘게 담겨있다. 조지아 체리를 수북 쌓아놓고 먹겠다. 침이 콸콸 고인다. 바게트에 꿀 듬뿍 찍어먹겠다. 내게 최고의 꿀은 방콕 로열 숍 꿀이었다. 왕실에서 직영하는 식료품 매장이다. 꽃향기가 작렬하는 그 꿀은 이젠 없다. 태국 항공에서 싹쓸이해 간다. 그 이상으로 맛있는 조지아 꿀이 조식 뷔페에 있다. 바게트에 버터를 바르고, 꿀을 듬뿍 짓이긴다. 맛과 순간의 가치에 정통한 박민우가 별 다섯 개 반을 주는 순간이다. 나를 기억하는 파브리카 스태프들이 눈인사를 한다. 자주 웃어준다. 처음부터 상냥하지 않을 뿐이다.
Brobro 호스텔에서 아침에 눈을 뜨면 창가로 새들이 난다. 적당하 거리를 두고 보기 좋게 곡선을 긋는다. 누운 채로 볼 수 있다.
Brobro 여사장은 조지아 특유의 무뚝뚝함이 있다. 눈치를 많이 보는 나조차, 마음 놓고 묻고, 부탁하게 된다. 과장해서 상냥하지 않고, 대신 뭐든 들어줄 준비는 되어 있습니다. 조지아식 친절이 아닐까 싶다. 변기 덮개나 문고리가 다 망가져 있다. 그런데도 경고나 안내 문구가 없다. 나라면 깨끗이 씁시다. 망가뜨리면 변상합니다. 덕지덕지 붙여놨을 것이다. 없다. 요르단 남자가 문고리를 고치고 있다. 사장 딸에게 스니커즈 두 개를 안긴다. 스태프인 줄 알았다. 곧 떠나는 손님이다. 손님이 주인을 더 걱정하는 숙소다. 3천5백 원 방이지만, 7천 원 정도 방이다. 절대로 끔찍하지 않다. 도미토리 짬밥 좀 되는 이들에겐 추천한다.
공원에서 수전증이 심각한 남자가 초콜릿 아이스크림, 바닐라 아이스크림을 양 손에 쥐고 빨리 걷는다. 초콜릿 아이스크림 쪽이 너무 심하게 흔들린다. 초콜릿 탑이 빠르게 무너지고 있다.
이란에서 온 모하메드와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온 모하메드, 두 모하메드가 카우치 서핑 모임에 가자고 했다. 공짜로 재워주는 사이트 카우치 서핑. 둘은 공짜로 잠자는 건 실패했다. 대신 카우치서핑을 들락이는 여행자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 모임에 나를 초대했다. 모임 장소는 우루과이 남자가 운영하는 바였다. 여행 중에 만난 에콰도르 여자 친구도 함께였다. 여자 친구는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박사 과정을 밟고 있다. 2년째 눌러살고 있는 샘은 호주 다윈에서 왔고, 폴란드에서 온 소피아, 네덜란드에서 온 꺽다리, 벨기에서 온 피어싱 아가씨, 러시아에서 온 더 꺽다리, 러시아에서 자랐지만 어쨌든 조지아인인 수염 청년, 그리고
시리아
시리아에서 온 친구도 그곳에 있었다. 전쟁의 화마를 피해 두바이로 피난 갔다. 5년간 살았다. 조지아에 사흘간 놀러 왔다. 아예 짐을 싸고 온다. 어느새 2년이 됐다. 나만 빼고 모두 조지아와 사랑에 빠졌다. 가장 완벽한 여행. 내겐 시리아였다. 천국 시리아는 지금 지옥이 됐다. 종교와 권력의 진흙탕 싸움. 지옥을 탈출한 시리아 남자가
-조지아는 시리아 같아. 고향을 갈 수 없으니까, 조지아에 온 거야. 시리아 날씨가 조지아 날씨야.
카드를 하고, 보드 게임을 한다. 내가 딱 싫어하는 분위기. 나는 왜 둘러앉아서 게임을 하면, 감옥처럼 느껴지는 걸까? 게임을 사양하고, 그들을 본다. 누군가가 살사 춤을 춘다. 그들도 나를 보면서 온기를 느낄까? 예전이라면 다양한 나라에서 온 이들을 보며 흥분부터 했을 것이다. 지금은 아늑하다. 밤새 어울리는 건 힘에 부친다. 딱 좋을 때 먼저 일어선다.
-스마트 폰을 보면서 걸으면 어쩌라는 거야?
내 뒤에서 나를 줄곧 따라온 모양이다. 빵빵, 크랙션을 울려도 될 텐데, 골목길 내내 슬금슬금 따라왔다. 대단히 미안하고, 약간 경이롭다. 어떤 경우에도 크랙션을 울려선 안돼. 택시 기사의 원칙이든, 배려든 경이롭다. 나는 내 뒷모습을 볼 수 없다. 스마트폰을 보며 수도 없이 진로를 방해했을 것이다. 반성할 기회가 이제야 왔다. 미안함이 오래간다.
밤 열 한시. 아이도, 여자도 주저 없이 밤길을 걷는다. 트빌리시에서 길 건너기는 거지 같지만, 이미 알고 있다. 알고 있으니, 용서가 된다. 어떻게든 건널 걸 알면서 왜 짜증이 날까? 나를 농락하는 감정에게 정색한다. 6월의 밤, 비누처럼 맨질맨질 바람이다. 대로변에서 쭉 걸어도 되지만, 골목 안으로 들어간다. 공원이 끝나는 길에 Brobro 호스텔이 있다. 나름 지름길이고, 수풀로 촘촘한 공원길이다. 숙소는 공원과 거의 붙어 있다시피. 좋은 숙소에 머물고 있다. 수전증 남자의 초콜릿을 아이스크림을 생각한다. 자꾸 생각난다. 흔들리지 않았다면 그 아이스크림은 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흔들렸으므로, 존재가 존재가 되었다. 꼭 지켜야 할 가치가 무엇인지가 분명해진다. 조지아를 만날 때가 됐다.
"작가님, 트빌리시에서 제가 거하게 한 번 쏘겠습니다. 토요일 저녁에 트빌리시에 도착하는데요. 작가님은 아르메니아로 가시나요?"
아르메니아에 에어비엔비를 죄책감 없이 취소할 수 있게 해 준 집주인님 감사합니다. 이번 여행 최고의 만찬이 기다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