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라질 조지아, 협공하는 아르메니아

내 쌍욕을 듣고 싶어서 두 나라가 난리가 났습니다.

by 박민우
트빌리시 평화의 다리

-이틀만 묵을게요.


트빌리시에 이틀 더 머물고 아르메니아로 간다. 일단 숙소부터 옮긴다.


Brobro 호스텔. 1박에 8라리. 3,450원. 부킹닷컴(booking.com)에서 예약하면 4,179원이다. 직접 얼굴 보고 예약했더니 7백 원을 거슬러 줬다. 돈이 없어서, 돈을 아끼고 싶어서 몰려든 전 세계 거지들이 우글우글하는 곳이다. 3천 원 얼굴로 오랑우탄처럼 늘어져있다. 숙소 건너편에는 스트립 바로 보이는 거대한 유흥 주점이 있다. 간판에 Show girl이라고 쓰여 있다. 잠깐 빛이 새 나올 때 힐끔 봤는데 우주선처럼 보랏빛 조명이 번쩍번쩍했다. 2,331원 Colors 호스텔에 혹했지만, 참았다. 쉽지 않았다. 2천 원 얼굴들이 좀 더 나와 닮았을 것이다. 이틀이다. 아르메니아로 간다. 좋아도 이틀, 싫어도 이틀. 큰돈 쓸 필요 없다. 이중인격자 박민우. 내일은 안 온다. 오늘이 전부다. 그렇게 살기로 해놓고는... 싸구려 방을 고를 땐 얼마든지 뒤집는다. 싸다고 나쁜 건 아니지만, 비싸면 대부분 좋다. 자본주의는 치밀하다. 싸지만 좋은 곳도 있겠지. 나 역시 자본주의 잔머리로 맞선다. 다른 말로 가성비라고도 한다. 2층 침대의 1층이고, 창가다. 좁은 베란다로 연결된 방이다. 베란다에는 담배꽁초가 수북. 빨래가 안쓰럽게 널려 있는데 여자 팬티도 보인다. 남자들만 꽉 찬 방을 지나쳐서 자기 팬티를 거는 여자다. 조금 전 담배를 피운 금발 여자가 아닐까 싶다. 거실엔 사과 궤짝으로 만든 소파가 있다. 등을 기대면 힘없이 미끄려져서 목이 부러지는 소파다. 싸구려면 일단 달려드는 내가 정 떨어지지만, 탁월한 선택이다. 트빌리시가 더 지긋지긋해지면, 아르메니아는 더욱 쾌적해진다. Brobro 호스텔은 첫인상부터 지긋지긋하다. 트빌리시에 대한 증오의 기운이 차분해졌다. 우중충해진 날씨 덕에 더위가 한 풀 꺾였다. 더위, 허기, 병이 여행을 좌우한다. 소화력이 끝내주는 이십 대의 트빌리시는 나와 다를 것이다. 길 건널 때 특히 짜증 난다. 베트남보다 더 짜증 난다. 건너야 하는데 건널 수 없는 길이 수두룩하다. 지하로 뚫린 지하도를 찾아야 한다. 찾았는데, 건너편으로 못 간 적도 있다. 막혀 있었다. 딱 한 번뿐이었지만, 딱 한 번도 없어야 하는 일이다. 신호등이나 지하도는 있어야 할 곳에서 늘 한참 떨어져서는 '있다'. 나는 이미 트빌리시를 싫어하기로 했다. 그 지점에서 약간의 공간이 생긴다. 여유라고도 한다. '그럴 줄 알았다'는 면역 성분이 분출된다. 이틀 동안 실컷 싫어지렴.


요즘 내 머릿속은 온통 먹는 것뿐이다. 어떤 태도로 먹어야 할까? 천천히 먹어야 한다. 좋은 걸 먹어야 한다. 몸이 어느 정도 회복되면 재발하는 폭식, 일종의 정신병도 치유하고 싶다. 치유가 될까? 스벤. 독일에서 온 스벤은 내게 온 천사였다.


-맥주 한 잔 할래?


파브리카 호스텔에서 같은 방에 머물렀다. 나는 주로 노트북을 빤히 본다. 글을 쓰거나, 페이스북, 인스타그램을 한다. 심각한 표정으로 뭔가를 하는 사람에게 다가오는 건 쉽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벤은 내게 와주었다. 이런 순간이 너무 좋다. 스벤은 프랑크푸르트에서 1시간 거리 동화 같은 마을에서 산다. 한 달 이상의 휴가가 보장되는 직장에서 엔지니어로 일하고 있다. 아침 여섯 시 반까지 출근, 다섯 시에 퇴근. 금요일엔 세 시에 퇴근한다. 커피는 일곱 시, 열 시, 두 시. 꼭 석 잔을 마셔야 하고, 야근을 할 때 예외적으로 한 잔을 더 마신다. 아침 일곱 시에 사무실에서 커피 마실 사람? 묻고, 먹겠다는 사람을 체크하고, 일곱 시 칠 분에 커피 타임을 갖는다. 회의가 길어져서 시간이 어긋나면 다소 불편하다. 많이 불편하지는 않다. 일주일에 세 번은 채식을 한다. 월, 수, 금. 그냥 한다. 고기 먹는 날, 고기가 더 맛있어진다. 환경이나 동물을 생각해서는 하는 건 절대 아니다. '절대'란 말을 강조한다. 과식은 하지 않는다. 좋은 음식을 적게 먹는다. 역시 건강을 위해서는 아니고, 그냥 그렇게 한다.


- 너, 혹시 로봇이니? 최근에 보고 울었던 영화가 있어?


스벤이 당황한다. 내 질문이 무례하다. 궁금해서 참을 수가 있어야지.


-할머니나 할아버지가 죽는 영화를 못 보겠어. 그냥 남자, 그냥 여자, 그냥 아이가 죽으면 안 슬퍼. 할머니, 할아버지여야 해. 연기를 잘했을 때만.


파키스탄 훈자의 만년설을 볼 때와 지금을 비교한다. 뒤지지 않는 놀라움이다. 이런 귀한 외계인이 내게 맥주를 마시자고 하다니.


-그리고 개가 죽는 영화도 너무 슬퍼. 개를 안 좋아해. 그런데 개가 죽는 영화는 너무 슬퍼.


우주 저편에서 날아온 사내가 꼬박꼬박 말도 잘한다.


-최근에 할머니가 돌아가셨거든.


갑자기 실망스럽다. 계속 엉뚱하고, 말이 안 되기를 바랐다. 그래도 진귀한 대화였다. 다음날 스벤은 카즈베기(조지아의 스위스라고들 한다)로 떠났다. 가기 전에 나와 밥을 먹고 싶어 했다. 파브리카 호스텔의 19라리(8천 원) 뷔페를 함께 하기로 했다. 스벤이 백 라리 지폐를 꺼내자 직원이 당황한다. 19라리짜리를 먹겠다는데, 100라리가 큰돈이라고? 마침내게 20라리 지폐가 두 장 있었고, 스벤 밥값까지 냈다. 사주고 싶었다. 스벤은 지천으로 널린 음식들 중 한 접시만 먹고는 끝냈다. 득도의 끝은 로봇이다. 모든 행위가 신비롭다. 애슐리 뷔페 천만 명 고객을 전수 조사해도 단 한 명도 없을 한 접시 손님이다. 내 식탐이 순해진다. 너무나 백인이 새 모이처럼 먹는다. 혈색만 좋다. 비쩍 마르지도 않았다. 나 채식, 나 금식. 작심하지 않고, 그냥 한다. 다짐은 작을수록, 세진다. 그걸 모르는 바보들이 매일 작심하는데 모든 힘을 쓴다. 스벤은 성자다. 천사다. 내게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그깟 밥값 8천 원으로, 대단한 스승을 모셨다. 그래서


나는 Brobros 호스텔에서 이백 미터 떨어진 Tea room에 앉았다. Tea room이라고 쓰여있는데, 빵도 팔고, 케밥도 팔고, 밥도 판다. 아이스크림도 판다. 스벤은 월, 수, 금 채식을 한다. 수요일이니까 나도 채식. 스벤은 카즈베기에 있지만, Tea room에도 존재한다. 작은 콩을 졸여놓은 것뿐. 나머지는 다 고기다. 콩조림과 밥을 손가릭질 한다.


-고추 피클도 좀 주면 안 돼요?

-안 돼요. 그건 케밥에 넣는 거예요.


아이고 그러셔야죠. 밥에다 피클 한두 개 먹고 싶어 하는 손님, 이해 못 하셔야죠. 원칙, 존중해 드립니다. 이미 트빌리시가 싫으니까 피클을 불허하는 여자에게 적대감을 안 느끼겠다. 밥과 콩 조림.


-7.6라리요.


사진발로 그나마 양 많아 보이는 거임


이 충격을 여러분과 나누고자 한다. 사진을 미리 찍어 놓은 나를 칭찬한다. 우리나라 환율로 3,289원이다. 3,300원이라고 하겠다. 물가 저렴한 조지아의 3,300원 밥 꼬락서니다. 피클 몇 개를 단호하게 자르더니, 3,300원 밥이 이렇다. 내 마음은 신기하게도 평화로웠다. 그럴 줄 알았다. 가만, 국경선을 넘을 때까지 데이터가 좀 더 있어야 하지 않을까? 트빌리시에서 아르메니아 수도 예레반까지 다섯 시간 이상 걸린다. 휴대폰 데이터 1기가를 더 충전하기로 한다. 지루한 버스에서 페이스북도 하고, 유튜브도 보겠다. 트빌리시 어디에나 보이는 스크린 단말기 앞에 섰다. 공과금도 내고, 버스카드 충전하고, 데이터도 구입할 수 있는 기계다. 이런 첨단의 나라에서 그따위 3,300원 밥을 팔다니. 평정심을 잃지 않고 1기가 바이트 5라리를 구매한다. 가격을 확인하고 20라리 지폐를 넣는다.


-감사합니다. 잔돈은 우리가 꿀꺽했습니다. 데이터로 쓰세요. 아잉


이런 메시지가 떴다. 잔돈을 거슬러 주는 기능이 아예 없는 단말기다. 이 기계 새끼는 아르메니아로 떠날 나를 등쳐먹고는, 초기 화면으로 돌아갔다. 개 젓갈 같은 조지아야. 이 씨베리이아 옆 새끼야. 아껴두었던 쌍욕이 자동으로 터졌다. 쾌감으로 부르르 떨렸다. 쌍욕의 힘이다. 아르메니아로 떠나기에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다.


결국 나는 아르메니아를 가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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