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탐 없이 식을 탐하다.
-사페라비 와인입니다. 사페라비는 조지아를 대표하는 포도 품종입니다. 65라리(2만 8천 원)니까요. 부담 없는 가격으로 최고의 와인을 드시는 겁니다. 조지아 와인의 역사가 인류 와인의 역사이기도 하죠. 조지아에서 8천 년 전의 Kveri가 발견됐죠. Kveri는 점토로 만든 항아리입니다. 태초의 와인은 점토 항아리에서 발효시켰습니다.
디캔팅이 시작된다. 와인을 디캔터에 따른다. 산소와 접촉하면 좀 더 쉬운 맛이 된다. 일본 만화 신의 물방울에서 봤다. 만화책 덕분에 디캔팅(Decanting)을 아는 사람이 됐다. 오페라 극장 풍 식당 2층에서 검은 넥타이 사내가 투명한 표주박 모양의 디캔터에 와인을 따른다. 나의 표정은 여유롭고, 누구보다 당당하다. 쩔쩔매며 겁내던 10분 전의 나를 모른다. 상대방에게 몇 점이나 받을까? 실망을 주는 건 아닐까? 글로만 알려질 경우, 나는 상상의 존재가 된다. 눈 앞에서 코털이라도 삐져나와 봐. 코털 남자가 심오한 척 나불대도, 코털일 뿐이다. 마주하면, 그런 걱정이 눈 녹듯이 사라진다. 공포는 취미로 모두가 키우는 자학이다. 실체의 힘 앞에서 무기력하게 무너진다. 여행으로 산 사람들은 세상 여기저기의 얼굴을 조금씩 묻히고 산다. 덜 팍팍하고, 더 따뜻하다. 사페라비 와인은 신맛이 강한데, 두텁게 쌓인 부드러움이 곧바로 신맛을 덮는다. 스테이크나 갈비와 함께 마시면 더 굉장해질 것이다.
-남자 친구도 여행 가이드 일을 해요. 이탈리아 로마에서요. 한 까칠하는 성격이거든요. 일기장에나 써야 할 글이 책으로 나온다고요. 여행업에 종사하지만, 여행기를 싫어해요. 딱 두 권을 제게 추천했어요. 작가님의 <1만 시간 동안의 남미>랑 <나는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사와키 고타로)>였어요. 작가님 책을 읽고요. 바로 남미로 떠났어요. 남미 여행 가이드가 거의 없을 때였어요. 회사에서 남미를 다녀온 사람이 저 하나였죠. 남미 여행 붐이 막 일기 시작했어요. 그 전에도 가이드 일을 하기는 했어요. 인도를 주로 갔어요. 기라성 같은 선배들이 많아서요. 기를 펼 수가 없었죠. 남미는요. 제가 이 바닥에서 좀 인정받아요. 남미 여행하면 업계에서는 저를 먼저 떠올릴 만큼요. 작가님 덕에 제 삶이 달라졌어요. 그러니까요. 오늘 마음껏 드셔야 해요.
애피타이저로 나온 모둠 요리는 호박과 가지를 얇게 저며서 돌돌 만 요리가 특히 맛있었다. 조지아 요리는 호두를 많이 쓴다. 우리가 참기름으로 고소해지듯, 조지아는 호두로 고소해진다. 호두의 향이 은은하다. 재료를 으깨서 뭉친 것들도 맛있었지만, 정체를 잘 모르겠다. 궁전 같은 식당엔 한국 단체 여행객들이 절반 이상이다. 신기했다. 내가 고른 식당이다. 한국인들에게 자주 언급되는 식당은 일부러 피했다. 구글 지도에 한국인이 남긴 후기는 하나도 없었다. 꽤나 비싼 여행상품인 듯했다. 손님들도 여유롭고 조용하다.
-저렇게 숫자가 많은데 한국말이 안 들리기 쉽지 않아요. 굉장히 정중한 손님들이세요. 우리 팀도 굉장히 젠틀해요. 자유시간 되니까 알아서들 뿔뿔이 흩어지시더라고요. 자유시간에도 저만 따라오는 손님들 있어요. 그런 때가 힘들어요. 네, 지금은 자유 시간입니다. 오늘도 피곤한 하루였죠.
요즘엔 코카서스 3국을 자주 온다. 조지아, 아제르바이잔, 아르메니아. 트빌리시에서 이틀, 그리고 손님들과 함께 아르메니아로 떠난다.
-9월에 남자 친구가 있는 로마로 가요. 3년 정도 열심히 모아서요. 한국에서 양 떼 목장 펜션을 하고 싶어요.
보연 씨는 게살 수프를, 나는 조지아식 치킨 수프를 시켰다. 스카치 캔디의 뭉툭하고, 은은한 향이 수프에서 느껴진다. 아마도 버터 향일 것이다.
메인 요리는 하르쵸(Kharcho)와 시크메룰리(Shkmeruli). 하르쵸는 노란 살구, 호두가 들어간 되직한 수프다. 어떻게 보면 커리다. 인도네시아나 태국의 맛있는 커리처럼 익숙하고, 깊은 맛이다. 굉장히 맛있다. 시크메룰리는 닭을 구워서, 우유를 붓고 끓인다. 좀 맛없는 삼계탕에 후라이드 치킨이 잠겨 있다. 치킨도 나도 도대체 왜 이렇게 됐는지 이유를 모르겠다. 유일하게 맛이 없었다.
-원래는 이렇게 묽지 않아요. 마늘도 훨씬 더 들어가고요. 다른 곳에서 꼭 한 번 더 드셔 보세요. 이게 맛있는 요리인데...
1층에서 공연이 시작됐다. 연주자 주위에서 조지아의 어른과 아이들이 춤을 춘다. 결혼식 피로연인 듯했다. 2층의 한국 손님 중 한 남자도 일어선다. 온몸을 꼰다. 전국 노래자랑 앞줄 춤신들과 비슷한 장르다. 그렇게 점잖으시더니 접신을 해버렸다. 몸은 오징어처럼 꼬였지만, 상관없이 행복 그 자체다. 한국 사람은 여행에 미쳐 있다. 여기가 어디라고 단체로 올까? 이름도 낯선 조지아, 별로 유명하지도 않은(한국 사람에게만) 식당에 한국 손님뿐이다. 이렇게 많은 한국 사람들이 적정하고 논다. 덜 억울하려면, 각자 힘닿는 대로 놀아야 한다. 다녀야 한다.
메뉴판을 달라고 했다. 디저트를 골라야 할 시간이다. 트레이에 열 개의 케이크가 실려서는 바퀴를 달고 우리에게 온다. 막 어지러우려고 한다. 아직도 내 머릿속에는 말괄량이 삐삐가 산다. 두 명의 친구 토미와 아니카는 삐삐와 함께 사탕 가게로 간다. 마음껏 고르렴. 집에 널린 금화 하나면 되니? 주근깨 가득 삐삐는 토미와 아니카의 요술봉이자 수호신이다. 자동차에 이상한 액체(기억이 거기까지다)를 넣고 붕붕 날아다니던 장면과 과자가게에서 마음껏 골라아 하는 장면이 지금도 남아있다. 열 개의 케이크가 트레이에 실려서 반짝거린다. 토니와 아니카만큼 좋다. 이 중 두 개를 골라야 한다. 열 개를 다 먹고 싶나? 아니다. 두 개 이상은 싫다. 충분히 배부르고, 충분히 누렸다. 더 누릴 수 있는 그 지점에서 자제가 생긴다. 부자들은 늘 이런 여유로 자제력을 키우는 걸까? 나를 괴롭히는 식탐이 사라진다. 초콜릿으로 꽉 찬 케이크와 티라미스를 응용한 케이크 두 개를 우린 조금씩 남겼다. 2차로 맥주를 마셔야 했는데, 폭우가 길바닥을 잠기게 할 정도로 쏟아졌다. 오늘은 여기까지. 폭우도 이유가 있을 것이다. 보연 씨는 내 유튜브가 너무 정적이라고 했다. 더빙 따로 하지 말고, 활기차고, 더 서툰 방송도 괜찮을 거라고 했다. 이 말을 들으려고, 이 자리에 와 있나 보다. 내가 행복해져야 해. 그게 먼저다. 제대로 하려는 욕심, 남보다 나으려는 욕심. 재미없고, 무겁다. 역류성 식도염인데 과식을 해버렸다. 확신한다. 오늘 밤은 무사하리란 걸. 폭식은 두려움이다. 풍요로움으로 채워진 오늘 은 식도염이 비집고 들어올 자리가 없다.
평생 남을 식사였다. 이번 여행은 반짝이는 열 개의 하루를 찾는 여행이다. 오늘은 안 넣겠다. 모자라서가 아니라, 욕심이 생겨서다. 나를 기다리는 것들이 있다. 분명히 더 있다. 그저 그럴 리 없다. 너무 좋은 밤이, 더 좋은 밤으로 나를 데려다줄 것이다.
Information
식당 이름은 Restaurant Qalaqi입니다. 제대로 된 식당에서 좋은 추억을 만들고 싶다면 강력 추천합니다.
둘이서 풀코스로 먹을 경우 10만 원 정도 나옵니다. 케이크와 곁들여 먹은 민트차도 훌륭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