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빌리시의 황홀, 시이작

자존심 상하지만, 녹는 중. 트빌리시!

by 박민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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택시 기사가 내 빨간색 캐리어를 번쩍 든다. 냉장고에는 짜디짠 조지아 치즈가 2/3, 양배추 2/3쪽, 콜리 플라워 반쪽이 남아있다. 돈으로 치면 3.5라리(천오백 원) 어치다. 채소 수프를 끓이고 남은 재료다. 한 번 더 끓여먹고 가려고 했다. 위층 침대 모하메드에겐 약속까지 했다. 눈 뜨자마자 파브리카 호스텔로 가서 조식 뷔페를 먹었다. 12시가 다 되어도 모하메드는 잔다. 미안, 모하메드. 나만 빼고 다들 새벽에 잔다. 모두가 쌔근쌔근. 주방을 쓸 분위기가 아니기도 했다. 내가 열 살만 젊었어도 Brobro 호스텔을 떠나지 않았다. 3천 원 방으로 몰려드는 온갖 궁상들과 어울렸다. 함부로 다가오고 먹던 걸 나눈다. 남들 자든 말든 큰 소리로 떠든다. 이젠 독방도 가끔 써야 한다. 유명 작가니까, 너희들이 좀 안 궁금하기도 하다.


-민우, 팔레스타인 친구가 왔어. 그냥 잘 거야?


전날 밤 자려던 참이었다. 모하메드와 두 시간 이상 떠들고 침대에 누웠다. 자려는 내가 모하메드는 아쉽다. 그 전날엔 미국 친구를 데리고 왔다. 한국에서 영어 선생님을 했다는 뉴요커였다. 오리발 신발에 근육질 몸뚱이가 안 어울리는 친구였다. 밥 약속이 있어서 30분 정도만 떠들었다. 삼성동 고등학교에서 영어 선생님을 하고, 격투기 선수까지 했는데도 하나도 안 궁금했다. 밥 약속이 있어서 기뻤다. 이란에서 온 모하메드는 나와 어울리고 싶다. 내게 좋은 사람을 소개해주고 싶다. 이란 쉬라즈에서 왔다. 호주 쉬라즈 와인을 정말, 정말 좋아한다. 쉬라즈 포도는 이란에서 왔다. 원리주의, 반 서구 주의, 금욕, 금주를 강조하는 이란이지만 쉬라즈에선 집집마다 밀주를 담근다고 한다. 알고 보면 발랑 까진 사람들뿐이라고 한다. 모하메드는 쉬라즈에서 자신이 만든 진짜 쉬라즈 와인을 마셔봐야 한다고 했다. 나의 재방문이 몹시 간절하다. 팔레스타인 친구가 궁금하지만, 안 궁금하기도 하다. 그냥 잤다.


이란


최악의 여행지. 껄렁껄렁 고등학생이 넌, 왜 이렇게 못 생겼니? 버스에서 이랬다. 내가, 성인인 내가, 그 아이 멱살을 잡았다. 친절함으로 도배된 나라라며? 인생 여행지라며? 내겐 아니었다. 네 카메라 얼마니? 하루에도 열 번은 카메라 가격을 물었고, 비싼 카메라여서 좋겠다. 입맛을 다셨다. 거대한 재래시장은 변변한 군것질 거리 하나 없었다. 골동품과 가구, 향수뿐이었다. 쭈욱 늘어선 카페도, 케밥 집도 없었다. 없을 리야 없다. 정말, 정말 적었다. 모하메드는 이토록 살갑다. 몇 명 더 만났는데, 이란 사람들은 하나같이 친절했다. 같은 떠돌이여서일까? 이란에서 지지리 운이 없었나? 멀쩡한 나라를 함부로 욕했나? 다시 가야 하나? 도리도리. 싫다. 너무 싫다. 터키로 가는 기차에서 느꼈던 탈출의 기쁨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나는 지금 이사를 가는 중이다. 빨간 캐리어와 파란색 배낭이 재산의 전부. 보증금은 없고, 5일간 7만 원. 하루에 만 삼천 원가량. 트빌리시 변두리, 주택가다. 놀이터는 30년? 40년? 왜 때려 부수지 않나 싶은 미끄럼틀과 그네가 찌그러져 있다. 놀이터 뒤로는 작은 호텔이 있다. 왜? 무엇 때문에? 그런 위치에, 호텔이다. 호텔을 지나서 좌회전. 깨끗하고, 허름한 동네. 골목 작은 사거리에서 차가 선다. 개소리가 컹컹컹. 두 군데서 난다. 내 전화에 한 여자가 나온다. 집주인 안나다. 한 손에 딸을 안고 있다.


-짐을 들어드려야 하는데, 미안해요.


외국에서 살았거나, 외국어에 소질이 있는 사람의 발음이다. 나무 계단을 삐걱삐걱. 1층과 2층 사이 1.5층 문이 열린다. 기다란 방이다. 움푹 ㄷ자로 들어간 곳에 더블 침대가 꽉 채워서 있다. 침대 맡엔 65인치 TV 크기 창이 다. 나무 가지는 안 보이고 이파리만 꽉 차 있다. 1층 욕실은 단독으로 쓴다. 세탁기는 같이 쓴다. 샴푸와 샤워 젤은 앞선 손님들이 남겨 놓은 걸 쓴다. 헤드엔 숄더가 보인다. 욕실엔 욕조가 있다. 욕조 마개가 안 보인다. 몸을 담글 수는 없다. 하루 만 3천 원. 욕조에 물을 채우기엔 미안한 가격이다. 에어컨은 없다. 선풍기가 있다. 벽이 얇아서 낮엔 덥겠다.



-주방은 포함이 아니었어요. 모르셨어요?


안나의 말에 노 프라블럼. 나는 활짝 웃는다. 주방을 쓰려고 온 거다. 양배추 주스를 매일 먹으면서, 역류성 식도염을 완치할 생각이었다. 에어비엔비로 빌린 방 중에 주방이 없었던 적은 없다. 일일이 확인했어야지. 내 잘못 이다. 치밀하지 않은 나는, 늘 잘못한다. 잘못 하지만, 잘못 사는 사람은 아니길... 일단 괜찮다. 프라블럼이지만, 노 프라블럼. 이런 내가 이상하지만, 일단 편하다. 빨래를 할 것이고, 정원의 작은 탁자에서 노트북으로 글을 좀 쓸 것이다. 글을 써야 해서가 아니라, 그냥 그러고 싶다. 안나의 시아버지가 정원의 흙을 파내고 있다. 표정이 없지만, 내가 못마땅해서는 아니다. 아닐 것이다. 점심은 뭐 먹지? 이게 내 고민이다. 매일 가던 NO5 온천 목욕탕을 또 갈까? 이번엔 수건을 챙겨가야지. 2라리를 아낄 수 있다. 오늘의 계획이다. 골목을 돌면 빵집이 있을까? 이게 내 바람이다. 어떤 장소를 좋아하고, 싫어한다. 여행자들은 일부로 전부를 판단한다. 이란을 오해했을 수도 있다. 반성하지 않을 것이다. 좋은 만큼 좋아할 것이다. 싫은 만큼 싫어할 것이다. 마음껏 어리석고, 확실하게 정정할 것이다. 알고 보면 나쁜 나라 없다. 그딴 당연한 선문답으로 비켜갈 마음 없다. 힘차게 떨리고, 전할 것이다.



냉동실에 아이스크림 하나가 덜렁. 안나의 선물이다. 백해무익 설탕 덩어리지만, 이건 먹어야지. 아이스크림을 핥으면서 65인치 창으로 이파리들을 본다. 큰 반전 없이 나는 조지아에 녹아들고 있다. 신기할 정도로 모든 거부감이 잦아드는 중이다. 아침이면 눈뜰 때를 기다렸다 이파리들이 더 힘차게 흔들릴 것이다. 적당히 걸러진 햇빛도 뺨을 핥을 것이다. 이런 방에서, 더 좋은 방을 찾고 있을 것이다. 차곡차곡 쌓여서 결국 거대한 감정으로 폭발한다. 아니, 이건 누구라도 두 손으로 뺨을 감싸고 입을 벌려야 하는 풍경이다.


이날의 최고는 이 방이 아니었다.


열 개의 황홀을 찾는 이번 여행, 두 번째 황홀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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