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이 더러운 입구부터 좀 어떻게 해보세요, 구소련 아파트들은 이러기로 작정한 거요? 조명이라도 달고, 페인트칠이라도 좀 하든가. 관리비를 안 내나? 내 집, 내 방만 깨끗하면 다야? 입구부터 파리 떼가 윙윙윙. 쥐님 시체라도 묵다 가셨나 봐요? 생선 대가리 수거함을 입구에 두셨나요? 코딱지만 한 엘리베이터만 갑자기 깨끗해지면 안 되니까, 음산한 분위기 잘도 유지하셨네요. 피곤해서 그냥 싸지르는 불평 아니고요. 개선하세요. 좋아지면 나만 좋아요? 기본만 좀 해 놓으세요. 제발요.
4층, 38번
엘리베이터 문이 열린다. 세 개의 현관이 있다. 그중 가운데 현관. 여자가 문을 연다. 중학생으로 보이는 남자아이가 있다. 현관이 열리자마자 바로 방이다. 침대 위에는 굳이 레이스가 있다. 공주 침대인가? 감점 10점. 깨끗한 나무 새시 창문이다. 창마다 보기 좋은 나무 새시가 달려 있다. 손잡이를 위쪽으로 올리면 창문이 위쪽만 입을 벌린다. 신기하다. 오른쪽으로 구십 도를 돌리면 정상적으로 열린다. 오른쪽으로 또 다른 방, 욕실, 주방이 있다. 주방을 지나면 작은 탁자가 있다. 여자는 열쇠를 건네고 아이와 사라진다.
왜, 왜, 가지?
독채를 빌렸나? 1박에 만 삼천 원. 이 방을 고른 이유가 뭐였더라? 그래, 에어컨. 에어컨만 있으면 된다. 이 가격에 에어컨 딸린 방은 이거 하나였다. 찜통 방만 피하고 싶었다. 독채였구나. 독채를 빌린 거였구나. 이 가격에 어엿한 집 전체라니. 에어컨이 있고, 다리미가 있고, 세탁기가 있고, 주방이 있다. 주방에는 커피와 차와, 인스턴트커피가 있다. 법랑으로 된 냄비와 믹서기도 있다.
없다.
없는 게 없다. 주방을 지나면 식탁이다. 말도 안 되게 절묘하다. 창가에 바짝 붙어서, 창으로 오는 모든 바람과 밝음을 빨아들인다. 일어나자마자 차 한 잔 들고 무조건 앉아야 하고, 밥 먹을 때도 무조건 앉아야 한다. 노트북으로 영화를 봐야 하고, 끙끙 나의 글을 써야 한다. 여기에서, 이 탁자에서... 조잘조잘 새소리는 기본값이다. 빈틈없이 조잘조잘. 에어비엔비로 빌린 방 중에 가장 저렴하다. 가장 밝고, 가장 그릇이 많고, 냄비가 많고, 찻잔이 많다. 취소하려던 방이었다. 예레반을 다녀간 여행자가 추천해 준 방으로 가려고 했다. 수수료를 절반이나 토해내야 해서, 그냥 왔다. 어쩔 수 없이 왔다.
-방이 충격적으로 좋네요. 위치 설명만 좀 더 보충하면, 완벽한 방이네요.
-네, 조언 감사해요. 우리 집을 못 찾은 최초의 손님이지만요.
아니, 이 개뼈다귀 집주인이 나를 똥멍청이로 만든다. 감사한 마음에 메시지를 날렸더니, 답이 이따위다. 나를 엉뚱한 곳에 데려다 놓은 택시 기사도 똥멍청이, 25동 아파트를 모르는 스무 명에 가까운 주민들도 똥멍청이, 나를 마지막까지 도와준 마트 남자도 똥멍청이네. 입구에서 기다리는데도 잠깐 나와주지도 않은 당신의 친구(인지 가족인지)는 하나도 안 멍청하고. 땀 뻘뻘, 짐 들고 질질질 헤맨 내가 똥멍충이네. 나만 똥멍충이었어. 현명하셔서, 당신만 옳아서 배부르시겠어요. 집이 좋아서 마음껏 칭찬해 주려는데, 그따위로 답해야겠어요? 대부분 러시아 손님들이어서인 거요. 비슷하게 후진 아파트, 비슷하게 배치된 아파트라 쉽게 찾은 거지. 보통의 나라에선 이건 말도 안 되는 거라고요. 말도 안 되게 어려운 거라고요. 아이고 좋다. 열 받아야 하는데, 방이 너무 좋아서, 집이 너무 좋아서 화가 안 난다. 못 내겠다.
-제가 도울 일이 있을까요?
코딱지만 한 녀석이었지. 초등학교 4학년쯤 되어 보이던 녀석이 또박또박. 길을 헤매는 내게 와서는 내게 그렇게 물었지. 내가 헤매는 꼴을 잠시도 못 보며 달려들던 사람들, 못 찾으면 우리 가게로 다시 오라던 복덕방 총각, 이 사람 집 좀 찾아줘요. 엄한 사람들을 붙잡고 나보다 더 애절하게 사정하던 할머니, 끝까지 내가 잘 들어가는지 확인하고 돌아가던 마트 총각.
흐으음. 흐으음.
침대에서 밀린 피로를 떨구는데, 심장이 자꾸 벌렁댄다. 성가시다. 이리 뒤척, 저리 뒤척. 아르메니아는 일주일짜리였다. 아무도 아르메니아를 극찬하지 않았다.
아르메니아다.
가슴이 너무 뛴다. 잠들기는 틀렸다. 코카서스 세 번째 황홀을 주머니에 넣고 밖으로 나갔다. 내 여행 계획은 원점으로 되돌아간다. 어쩌면 나는
아르메니아다.
PS 매일 글을 씁니다. 저만의 오체투지입니다. 글 하나를 쓰면 책 하 권이 팔리겠지. 작은 욕심으로 올립니다. 더 많은 이들에게 닿고 싶습니다. 요즘엔 '입 짧은 여행작가의 방콕 한 끼'로 오체투지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