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 번째 황홀은 춤!
-애드가가 자고 있으니까, 세탁기 좀 나중에 돌려도 될까?
아이고 어머니 별 걸 다 물으시네요. 그럼요. 그럼요. 땡볕에 두 시간이면 다 말라요. 애드가가 공사 소음 때문에 깊은 잠을 못 자죠?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나는 애드가에게 낮은 수면 시간이잖아요. 그 시간에 트럭 흙 내리는 소리, 드릴로 벽 뚫는 소리. 어머니 속이 더 썩으시죠? 애드가는 애드가대로 피곤하지. 새로 묵는 손님은 글까지 쓴다지. 얄미운 공사는 언제 끝날까요? 어머니 저는 또 소음엔 강해요. 일정한 주기로 반복하는 소음이 아니면, 무시가 돼요. 글이 안 써지면요. 그건 유튜브 때문이에요. 장혜진, 윤민수 듀엣곡 '술이 문제야'에 꽂혔어요. 가을, 겨울용 이별 노래를 왜 한 여름에 냈을까요? 싸이월드풍 이별 노래가 어찌나 구성지던지요. 93년에 만들고, 지금 내놓은 노래일 거예요. 아주 의심스러워요. 촌스러우려면 제대로여야죠. 라이브 동영상, 커버 영상 유튜브로 챙겨 보느라요. 그래서 글 못 쓰는 거예요. 애드가 어머님. 저 다른 숙소로 옮길게요. 방은 이미 보고 왔어요. 사흘 자기로 하고 나흘 잤으니까요. 어머니는 섭섭해하지 않으실 거죠? 그러게, 뜨내기 손님 뭐가 예쁘다고, 없는 쌀로 볶음밥을 하세요? 양념 잘 된 닭고기까지 듬뿍 얹어서요. 쌀도 태국 쌀이라면서요? 제가 방콕에서 머문다고, 일부러 사 오신 거 맞죠?
빨래 기다리느라 못 나가는 거 아닌데요. 땡볕에 어딜 나가요. 왜 아들 걱정만 하세요? 손님 걱정만 하세요? 30분이라도 걷다가 오셔요. 어머니 잠깐 없다고 큰일 안 나요. 그러게 왜 열쇠를 안 주세요? 혹시 여분의 열쇠가 없나요? 새로 장만하려면, 그게 또 돈인가요? 어머니, 나흘간 정말 잘 묵었어요. 책으로 가득한 제 방, 제방으로 뻥 뚫린 산풍경이 시원했어요. 수줍은 애드가와 가끔씩 나누는 대화가 좋았고, 손녀딸이 방문한 것도 즐거웠어요. 애드가에게 누나가 있었군요? 방탄소년단과 같은 나라 사람이란 이유만으로, 그렇게까지 좋아하다니요. 언젠가 방탄소년단 만나면 제가 맛난 거라도 사줘야겠어요.
오늘은 해가 좀 빨리 사라졌네요. 비구름에 갇혀서 한결 서늘하네요. 나가볼게요. 빨래 때문에 이제야 나가는 거 아니라니까요. 사실 또 다른 숙소 하나를 보러 가요. 저 좀 웃기죠? 근처에 JR's house라고요. 유명한 게스트 하우스가 있어요. 그렇게 밥이 잘 나온데요. 하루 8천 원에 조식이 공짜래요. 도미토리에 아무도 없더라고요. 독차지하고 쓰면 돼요. 횡재했죠? 의심이 가는 거예요. 사람이 없어도 너무 없으니까요. 최근에 안 좋은 일이 있었나? 더 좋은 숙소들이 많아졌나? 저렴하고 평이 좋은 sleep studio 호스텔에 한 번 가보려고요. 직접 얼굴 보고 예약하면 더 싼 경우도 많아서요. 그래도 어머니, 이런 따뜻함은 없을 거예요. 멋진 발코니를 독차지하고, 산을 마주하면서 글을 쓰게 해 주셔셨어요. 맛있는 박하차를 마시면서요. 글이 감옥이 아니라, 축복이게 해주셨어요. 어머니 덕이에요. 애드가 덕이에요.
어머니, 오늘 제가 좀 늦게 나왔잖아요. 이왕 나온 거 아주 늦게까지 놀다 가려고요. 어쩌면 예레반의 마지막 주말일 수도 있거든요. 네, 숙소는 마음에 들었어요. 가격이 말도 안 되게 싸요. 하룻밤 4,800원이요. 주방이 좀 부실한데요. 방값 아낀 걸로 맛난 거 사 먹으면 되죠. 밤 열두 시면 후끈 달아오르는 클럽에 가볼까 해요. 일곱 시네요. 다섯 시간을 어디서 버틸까요? 마흔일곱에 클럽은 무리일까요? 왜 클럽에 가고 싶냐고요? 매일 방, 마트, 집, 가게. 이렇게만 지냈잖아요. 깡총깡총 뛰고 싶어요. 제가 또 감이 있잖아요. 길에서도, 식당에서도 저에게 꽂히는 시선이 예사롭지 않더군요. 관심 종자에게 예레반은 선물 같은 도시죠. 신기해서 쳐다보는 거면 어때요? 신기함의 가치를 모르시는군요? 우린 모두가 신비롭고, 신기해요. 그걸 알아봐 주지 않는 세상이 잘못된 거죠. 저는 신기할 거예요. 우스꽝스럽게 보여도 돼요. 그들에겐 활력인 거잖아요. 존재만으로, 제가 가치를 부여받는 건데요. 이 뜨거운 눈빛이 클럽이라고 사라지겠어요? 제가 오징어 춤을 좀 춰요. 관절이 있나 싶은 흐물흐물 춤이오. 그걸로 아르메니아 클럽을 초토화하고 싶어요. 어머니만 믿어주시면, 제대로 흔들어 볼게요. 그런데요. 다섯 시간이 너무 길어요. 공화국 광장 분수쇼만 볼래요. 그거라도 끝까지 볼 수 있을까요? 왜 이리 밤잠이 많아진 걸까요?
7시 58분인데 분수쇼는 이미 시작했네요. 퀸의 <위아더 챔피언>도 나오고요. 비발디 <사계> 중 '여름'도 나오네요. <스타워즈 테마곡> <007> 주제곡도 나오고, 영화 <닥터 지바고>' 라라의 테마'도 나와요. 노래가 바뀔 때마다 분수들이 춤을 추네요. 색도 달라지면서요. 불꽃놀이는 분수쇼에 비하면 훨씬 단조로운 거였군요. 아니 이게 뭐라고 제가 들썩이나요? 저 멀리서는 이란 아주머니가 흔들고 계시네요. 이란에서는 못 하죠? 그 끼를 어떻게 참으셨어요? 이렇게 흔들려고 국경선을 넘은 건가요? 저는 기둥 밑으로 피해요. 물방울이 저한테까지 튀네요. 분수는 장관이지만요. 제, 갤럭시 액정이 깨져서요. 물이라도 들어가면 큰일이니까요. 기둥 밑 축대 위로 올라갔어요. 비가 쏟아지네요. 사람들이 뿔뿔이 사라져요. 제가 자리를 정말 잘 골랐네요. 청사 지붕이 비까지 막아 주네요. 지금 나오는 노래, <인어공주>' 언더 더 씨' 아닌가요? 맞죠? 맞죠? 저만 들으라고, 저만 보라고 이 빗속에서 과분한 노래가 흘러나와요. 오줌 찔끔, 좋네요. 문어 춤을 춰요. 인어공주에 문어가 나오던가요? 그게 뭐가 중요하겠어요. 세상에 없는 문어가 예레반 분수에 화답하겠다는데요. 척추, 무릎 관절 모두 집에 두고 왔어요. 주유소 풍선 인형들 혹시 숨어 계시면 다들 좀 나오세요. 같이 흔들어요. 미친 문어 한 마리 보겠다고 예레반의 아이들이, 아이들 핑계로 아버지가, 어머니가 축대로 올라오네요. 사진 찍고, 악수하고. 그런 표정으로 저 보지 마세요. 저 동방박사 아니고요. 동방 문어입니다. 네네, 사진이 뭐 어렵겠어요? 아이랑 인사하는 게 뭐 대수라고요? 네? 밥이오? 같이 저녁을 먹자고요? 아, 그건 안돼요. 역류성 식도염에 야식이 쥐약이거든요. 즐거운 식탐, 밤늦은 초대. 그건 사양할게요. 젊을 때 누렸던 오만방자한 식탐을 이제는 놔주려고요. 오늘은 춤만 출게요. 춤만 추러 온 거 맞거든요. 젠장, 나이트클럽은 오늘도 글렀네요. 흥은 남겨 놓는 거 아니라고 배웠어요. 이 흥 다 쓰고, 꿀잠 잘게요. 예레반 사람들, 이란 아주머니, 인도 총각들 다 고마워요. 말 걸어주고, 물어봐 주고, 초대해줘서 고마워요. 연예인 병 걸려서 잠이 올까 싶네요. 코카서스의 황홀! 오늘 챙겼네요. 황홀 중의 황홀이네요. 하아, 밤이 짧네요.
PS. 매일 글을 씁니다. 저만의 오체투지 방식입니다. 글 한 편으로 한 권의 책이 더 팔리길 소망합니다. 천천히, 차곡차곡 닿고 싶습니다. 요즘엔 '입 짧은 여행 작가의 방콕 한 끼'로 오체투지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