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떴다. 꿈이다. 왜 이런 꿈을 꿨을까? 꿈에서 왜 예레반에 남을까를 고민하냐고? 나흘간 묵었던 방에서 싸구려 호스텔로 옮기는 날이다. 방, 주방, 베란다 사진을 여러 장 찍는다. 에드가, 지금 에어비엔비에 올린 사진들은 너무 어두워. 에어비엔비로 방을 팔고 싶으면, 조금이라도 화사해야지. 이 사진으로 당장 바꿔. 야, 에드가. 형이 이런 것까지 신경 써야겠어? 2만 드람(48,000원)을 드린다. 4일 방값.
-그래, 그래. 늘 안전하게 다녀야 해.
아니, 어머니. 그, 그게 아니라 18,000 드람이고요. 2천 드람 거슬러 주셔야죠. 그러면, 제가 안 받을 거라고요. 작은 선물이에요. 그런 대사를 쳐야 하는데. 생색낼 타이밍을 그렇게 뺏어가시면 어쩌나요? 애드가 이 새끼는 아직까지도 처자죠? 열두시가 넘었는데 말이죠. 어머니는 저 간다고 너무 서운해 마시고, 이젠 좀 쉬세요. 고생 많으셨어요. 네, 예레반에 계속 있어요. 숙소만 옮겨요. 비밀은 아니지만, 어머니나, 애드가에게 굳이 말씀 못 드리겠어요. 그러니, 제발 어디 가냐고 그만 물으세요. 네, 예레반에 있지만요. 딱 하루, 아니, 딱 이틀만 있으려고요. 글 쓰는 사람이잖아요. 유튜브도 시작해서요. 여러 곳을 보여줘야 해요. 여러 곳에 묵을수록 좋죠. 알아들으셨죠? 아니, 무슨 구글 번역기까지 돌리라고 하세요. 대충만 알아들으세요. 그게 훨씬 아름다울 때도 있어요.
메뚜기처럼 숙소 옮기는 것도 더는 못 하겠다. 예레반을 뜰 타이밍이다. 예레반? 좋다. 미친 듯이 좋지 않다. 일단 먹을 게 없다. 나처럼 가난뱅이 여행자는 빵, 빵, 빵이다. 빵 안에 치즈, 빵 안에 닭고기. 하지만, 빵. 빵이 싫으면 케밥, 케밥이 싫으면, 샐러드 바. 샐러드 바에는 채소와 닭고기, 으깬 감자가 있다. 아르메니아 사람 좋다. 친절하다. 잘 알겠다. 좋은 기억만 품고 가겠다. 더 머물지는 못하겠다. 사람만 좋으면 평생 머물 수 있을 줄 알았다. 그 정도 순정파 아니더라. 내 배신이 서운하면 길에서 국수라도 좀 볶든지.
한 번 와본 곳을 헤매고 있다. 유튜브에 새 숙소로 이동하는 날. 상큼한 동영상을 올려보려고 했다. 시침 뚝 떼고 처음 가는 것처럼... 어라? 진짜로 여기가 어디지? 지하철역에서 십 분 거리를 사십 분 만에 겨우 왔다. 애정이 식으면, 뇌세포가 파괴되는구나. 4,800원 호스텔 주인장 낯짝 좀 봅시다. 어제는 코빼기도 안 보이더니. 토요일이라 가족과 시간을 보냈겠지. 하긴 이 돈 받고 종일 숙소 지키는 게 더 웃기지. 어떻게 연락처는 알아내고, 예약은 했지만, 막장 분위기겠거니. 각오는 했다. 너저분할 테고, 시끄러울 테고.
아니, 그런데 사장 양반, 인상 좋다는 말 좀 들으시겠구려. 열두시 반 이전엔 체크인 안 됩니다. 딱 잘라 거절할 때, 까칠하고, 마른 사람이었거든. 문자 메시지뿐이었지만, 분명 그런 얼굴이 보였다고. 동부생명 광고에서 딸내미 목마 태워주는 아빠 얼굴이시네. 젖은 신발은 세탁기에 돌려도 된다고? 착하게 생긴 양반, 다시 생각해 봐요. 괜히 세탁기 망가져서 분위기 싸해지게 하지 말고. 중국산 최첨단 세탁기라 괜찮다고요? 빨래 끝나면 알아서 꺼내 놓을 테니까 걱정 말라굽쇼?
-3층 괜찮아요?
아니, 안 괜찮소. 2층도 떨어질까 봐 벌벌 떠는데? 3층? 무슨 생각으로 3층으로 침대 탑을 쌓았소? 어쩐지 너무 싸더라니. 에어컨까지 있는 4,800원 도미토리라니. 내가 도미토리 전문가잖소. 말도 안 되는 가격 맞소. 그러니까 침대를 때려 넣어야지. 3층 침대라니. 참 신박하구려. 3층에서 한 번 자보지, 뭐. 아직까지 아무도 안 죽었으니까, 영업하고 있는 거 아니요?
더 있어야겠다.
아니, 박민우 씨. 3층 침대가 좀 넓다고 뭘 또 그리 오바야? 눕자마자 그렇게 좋아? 너무 넓잖아. 침대에서 수영해도 되겠어. 한쪽만 뚫린 상자형 방이네. 일종의 캡슐텔. 머리통만 바깥쪽으로 내밀고 자는 거네. 좌우로는 아무리 뒤척여도 떨어질 수가 없겠어. 인간 대포가 되어서 대가리부터 튕겨 나가야 겨우 죽을 수 있겠어. 올라가다가 갤럭시 폰만 안 떨어뜨리면 된다고. 아, 넓다. 아, 쾌적해. 3층이라 아무도 나를 못 봐. 도미토리지만 1인실과 다를 게 없다고.
2
아제르바이잔 바쿠에선 마지막인 줄 알고 이렇게 사진도 찍었는데 말이죠
-박 작가님 아니세요?
맞지. 내가 박민우 작가 맞지. 지금 한국말로 또박또박 박민우냐고 물은 거야? 아르메니아 예레반에서? 예레반 한복판에서? 루신. 스물여섯 살. 한국어가 능통한 현지 가이드. 아주대학교에서 교환 학생으로 2년간 머문 처자. 원래 여섯 시 반에 만나기로 하지 않았나? 지금은 네 시가 조금 넘었고. 어머니랑 영화 보고 오는 길이라고? 어머니가 약속이 생겨서 일찍 헤어지는 중이라고? 이렇게 길에서 만날 줄 몰랐다고? 허허.
-남자 친구도 예전에 예레반에 온 적이 있어요.
이보세요. 루신 씨. 남자 친구 이야기를 왜 꺼내는 거죠? 미리 철벽 치시는군요. 먼저 보자고 메시지 보낸 건 그쪽이고요. 한국인 남자 친구가 있군요. 안 궁금하지만, 나도 마음 편하다오. 편하기도 하지만, 섭섭하기도 하오. 내가 부담 느끼고, 내가 불편한 게 까이는 것보다 낫거든. 아저씨 말 편하게 할게. 왜? 늙다리 아저씨가 헛물켜기 전에 이 정도 선은 그어야겠어? 한국에 있을 때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고? 도움 많이 받아서, 갚으며 살고 싶다고? 2년, 2년 만에 어떻게 한국말을 어떻게 그렇게 완벽하게 해? 내가 천재인 줄 알았는데, 천재는 여기에 있구먼. 7,8월 1년 중 최고 성수기. 서른 건의 한국 단체 여행이 다 취소됐다고? 헝가리 유람선 침몰 사건 때문에? 그 여행사 일을 주로 했다고? 바쁘면 모르겠는데, 바쁘지 않아서 이렇게 만날 수 있게 됐다고? 내 블로그 글도 다 읽었다고? 잠깐, 무슨 소리야? 인 스타 그램에서 여행 사진 본 정도 아니었어? 그래서 메시지를 보냈던 거 아니야? 아르메니아 아파트 더럽다고 욕한 것도 본 거야? 관리비를 안 내서 그런가 싶었는데, 사실이라고? 이 나라는 관리비라는 게 없어서, 더러워도, 허물어져도 방치한다고? 찻값은 당연히 내가 내야지. 무슨 소리야? 루신이 글 읽을 줄 알았으면, 거지 궁상은 좀 자제할 걸 그랬어. 스무 살밖에 차이 안 나지만, 일감 떨어진 처지라며? 당연히 내가 내야지. 원래 예레반은 핑크 도시였다고? 분홍색 돌이 특산품이라고? 돌 색이 조금씩 달라서, 언뜻 모자이크처럼 보이는 거라고? 종교를 지킬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자부심이었다고? 이슬람을 믿는 터키, 이란과 맞서 아르메니아인의 정체성을 유지하려면 종교뿐이었다고? 단지 종교가 아니라 생활이라고? 살구의 나라라고? 그 맛있는 노란 살구가 아르메니아에서 원조라고? 저녁밥을 왜 쏴? 돈도 못 번다면서? 열심히 저축해서 통장 빵빵하다고? 이 맛집 꼭 와보고 싶었던 곳이라고? 정말 잘 먹었어. 이런 현지인들 우글거리는 곳, 완전 내 취향이야. 예레반에서 여행자 놀이를 제대로 했네. 루신 덕분이야. 난 걸어갈래. 30분 걷는 게 뭐 대수라고. 늙다리 아저씨 집 잘만 찾아갑니다. 어서 들어가시오. 하아. 왜 자꾸만 택시같이 타고 가라는 거야. 진짜 집 가는 길 맞지? 나 때문에 일부러 돌아가는 거 아니지? 5분 정도만 걸으면 될 거라고? 아니, 왜 루신이 부탁하고, 내가 허락을 하고 있는 거야? 글 좀 잘 쓰고, 세상 시선 따뜻하고, 빈티 작렬하면 이런 날도 오는구나. 참나 이런 대접받고, 어떻게 예레반을 더 안 좋아해? 큰일이네. 떠야 하는데.
-내, 신발은요?
-세탁기 문만 열어 놓는다고 했잖아요. 세탁기에 있죠.
이 뻔뻔한 사장 보게. 세탁기 문 열어 놓는 게 뭐가 그리 큰일이라고. 그걸로 생색을 낸 거였어? 내가 잘못 들은 거고? 신발 널어준다는 줄 알고 괜히 감격했잖아. 감점. 방에서 나오는 할아버지, 낯이 익다.
-호, 혹시 니시무라 시게요시 상?
저 기억 안 나세요? 바쿠에서 같은 방에 묵었잖아요. 아제르바이잔에서 이란으로 넘어간다더니 벌써 다녀오신 거예요? 어르신도 참 싸구려만 골라 주무시네요. 다른 나라에서 이렇게 또 만나다니요. 이게 인연이죠. 이게 신비죠. 지금 저 중국 친구는 왜 이리 화가 난 거죠? 3일 이상 묵어야 할인인데, 하루만 묵어도 깎아달라고 떼를 쓰고 있네요. 별 꼴통, 별 거지 같은 것들이 다 있네요. 이런 코딱지만 한 숙소 하나여도 스트레스가 장난 아니겠어요. 머리털 숭숭 빠지겠어요. 할아버지 저는 예레반에 더 머물까요? 말까요? 아, 할아버지 영어가 약간 짧으시죠? 결국 결론은 제가 내야겠죠? 오늘 하루를 어떻게 읽어야 할까요? 정신이 하나도 없네요. 그래도 3층 방의 3층은 참 근사하네요. 청담동 자이 36평 형 아파트 안 부럽네요. 꿈에서 결정할까 봐요. 꿈이 답을 해주겠죠. 아, 맞다. 어제도 이러다 잤군요.
더 머물까? 떠날까?
PS. 매일 여행기를 씁니다.저만의 오체투지입니다. 매일 한 권의 책이 더 팔릴 수 있다면 족합니다. 천천히, 더 넓게 닿고 싶습니다. 지금은 '입 짧은 여행작가의 방콕 한 끼'로 오체투지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