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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민우 Jul 02. 2019

오지랖으로 예레반 평정 - 이 호스텔의 통반장은 나

천천히, 지그시 이 도시가 내게 온다.

생수병도 일본 것이 최고여! 주거리 빵집 빵들의 위엄

-쿵쿵쿵      


다섯 시부터 누구야? 이 집 주인장은 열두 시 반에 옵니다요. 어제 손님 쫙 빠져나갔잖아. 한 명이라도 더 받아야지. 나갑니다. 나가요. 러시아 여자, 아르메니아 남자. 선남선녀 커플. 남자네 집 식구들 깨우기 미안해서 여기로 왔다? 집도 작아서 여자 친구가 불편할 것 같다고?  왜 나는 이렇게 잠귀가 밝은 걸까? 굳이 3층 침대에서 엉금엉금 내려와 문을 땄을까? 주인도 없는데 받아도 되나? 한 명이라도 더 받아야지. 무슨 소리야. 일단 빈 침대 아무 곳에서나 자요. 침대 커버는 당장  없으니까 샤워는 나중에 하고. 싫으면 길바닥에서 헤매시든가. 나한테 방값을 왜 물어? 나도 엄연한 손님이라고? 대충 5달러야. 나한테는 4달러였는데, 나는 3일 손님이거든. 넌 하루 손님이니까 5달러 정도겠지.       

          

-야, 하멧, 아침부터 빈속에 무슨 맥주야?       

        

집에서 몰래 맥주를 만들어 마시는 너도 참 난 놈이다. 나라가 술을 금하면, 너 같은 애들이 몸부림을 치는구나. 가문의 자랑이겠어. 이란에서 캐나다로 유학이라니. 미국과 척을 지면서 어디든  비자를 요구하잖아. 여행 비자조차 쉽지 않잖아. 온타리오에서 MBA 과정을 끝내고 나면, 고액 연봉자가 되는 거잖아. 지금 이란 돈의 가치가 네 배나 폭락했다며? 휴지 조각이라며? 탈출을 꿈꾸지만, 지옥을 벗어날 방법이 없다며? 캐나다 대사관이 없어서 아르메니아까지 왔지만, 축복받은 삶이네. 사흘 밤낮 버스에서 시달렸지만, 이제 곧 캐나다라고. 자유라고. 그런데 자꾸 네 안에 다른 네가 산다는 말을 하고 그래? 또 다른 자신이 빵 터질까 봐 무섭다고 한 건 그냥 해본 소리지? 그깟 맥주로 통제 안 되는 아이 아니지? 네가 갑자기 칼을 들고 와 오이를 써는데, 왜 이렇게 마른침이 삼켜지냐? 두부처럼 오이가 썰리는 게 보통 칼날이 아니네. 지금 화가 난 건 이란 정부 때문이지? 그 칼은 오이만 썰 거지?       

         

알지, 알지. 미국 드라마 <브레이킹 베드>. 나도 봤지. 소심한 화학 선생이 시한부 선고를  받고, 마약 팔이 살인자로 거듭나잖아. 감명받았다는 말을 몇 번이나 하니? 주인공 화학 선생을  닮고 싶다니, 그게 말이야, 밥이야?  진정한 살인마가 되는 마지막 장면에서 소름이 끼쳤다는 게 무슨 의미야? 설마 그게 네 이야기여서, 네 이야기면 좋겠어서 돋은 소름은 아니지? 끔찍해서 돋은 소름이어야지. 인간이니까 인간적인 소름이어야 하는 거야. 마약 이야기는 이란에서 온 사람들마다 하는군. 술은 금하면서, 마약은 흔한 나라라니. 이란이 진정한 막장 국가구나. 추운 캐나다니까  비닐하우스에서 대마를 키울 거라고? 오이를 좀 그만 썰든지. 칼은 좀 내려놓으라고. 그래, 어제 택시기사 집에서 왜 잔 거야? 호텔 주소를 보여줬더니 그냥 자기 집으로 데려갔다고? 공짜로 재워준다더니 15,000 드람(36,000원)을 뺏어갔다고? 택시비까지 해서 20,000 드람을? 이란은 손님 대접이 극진해서, 아르메니아도 그런 줄 알았다고? 네가 그렇게 멍청해질 때, 네 안의 또 다른 너는 안 말려? 똑똑한 놈은 네 안에 안 키워? 브레이킹 베드에 나오는 선생은 꿈도 꾸지 마. 그냥 열심히 공부해서 MBA나 잘 마쳐. 버스 시간 다 됐다. 아직까지 맥주를 마시고 있으면 어떻게 해? 가, 빨리 가. 응응, 조심조심.           

     

니미수라 시게요시 어르신. 그럼요. 가르쳐 드려야죠. 제가 묵었던 트빌리시 숙소요? 사흘 후에 트빌리시에 가신다고요? 마침 저한테 조지아 동전이 있네요. 버스 탈 때 동전 필요해요. 받으세요. 아뇨, 아뇨. 그냥 선물이에요. 기어이 주시겠어요? 500원도 공짜는 불편하세요? 네, 네. 이걸로 맛난 빵 사 먹을게요. 이 오이는 뭔가요? 저 먹으라고요? 잘 먹을게요. 아르메니아 오이 맛있죠. 와, 일본에서 가져온 생수병을 쓰시네요. 거기다가 계속 물을 받아 드세요? 이름표까지 붙여서요? 아이고, 어르신. 같은 물통 재활용하시면 세균 더 창궐해요. 그냥 여기에서 가끔씩 물을 사드세요. 늘 응원합니다. 어르신. 백 살까지 그렇게 다니셔야 해요. 저의 미래입니다. 저의 소망입니다. 절대로 병원에서 안 죽을래요. 길에서 죽을래요. 마지막의 마지막, 그 마지막의 마지막만 병원에 있을래요. 사망진단서라도 끊으려면 의사가 어쨌든 필요하니까요.

               

-아니, 그렇다고 주인 없는데 손님을 자게 하면 어떻게 해?     

-아, 그럼 어떻게 해? 아르메니아 사람들은 늦게 일어난다며? 다섯 시에 주인은 못 깨우겠대. 잠깐 눈 붙이고 연락한다고 그랬단 말이야.      

-알았어, 알았어. 잘했어.           

     

당연히 잘했지. 하루라도 재우면 그게 다 돈이잖아. 내가 꼭 생색내야겠어? 평소보다 일찍 출근할 정도로 불안했어? 내가 어련히 알아서 들였을까? 예전에 묵었다며? 남자는 아르메니아 사람이야. 너네 나라 사람이고, 너네 나라 사람이 데려온 여자 친구야. 애국심 넘치면서, 이럴 때만 또 까칠하게 굴기야? 열 받게 할 거야? 그럼 뭐 떠나야지. 너도 짜증, 나도 짜증. 지금 요 앞 빵집에 가서 시금치 들어간 거랑, 감자 들어간 빵 두 개 사서 한꺼번에 다 먹을 거야. 그리고 헬스클럽도 알아볼 거야. 운동도 좀 해야겠어. 내가 운동 열심히 면 여기 묵더라도, 자주 못 볼 걸? 오늘 저녁엔 분수쇼도 한 번 더 보고, 요 앞 레바논 빵집도 가봐야겠어. 아직, 결정한 거 아니야. 예레반에 뼈를 묻겠다거나, 사무치게 좋다는 거 아니라고. 가끔씩 이상한 느낌으로 울컥하는데, 너무 사소해서 아무래도 억지 같아. 어제는 그냥 마트를 가는데, 좋아 죽겠는 거야. 요 며칠 선선해져서 그런가 봐. 시큼하고 묽은 요구르트 '탄'에 맛들려서인가 봐. 그거 한 병 마실 생각에 발걸음이 가벼워져. 어제 먹었던 닭고기 빵도 한몫했지. 토마토소스에 엉긴 닭가슴살이 얇게 펴 발라진 빵이었거든. 따뜻하지, 촉촉하지, 부드럽지. 700원 빵이 참 겁도 없이 완벽하더라. 사랑에 빠진 건 아닌데, 먼 훗날 아, 오늘, 아, 지금. 사무칠 것 같은 예감이 좀 들어. 그 느낌이 불길해서, 발을 못 떼겠네, 제기랄. 굳히기 한 판, 확정된 사랑. 이런 걸로 오해할까 봐, 다시 강조할게. 나는 언제고 떠날 거야. 당장은 아니고. 내일도 물론 아니고.        

   

PS 매일 여행기를 올려요. 저만의 오체투지. 글 하나를 올리면, 한 권의 책을 더 팔겠지. 그런 마음으로 한 자,  한 자 채웁니다. 지금은 '입 짧은 여행작가의 방콕 한 끼'로 오체투지 중입니다.       


천 원이면 배 터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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