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바스찬, 니콜라, 다리안, 제이콥과 폭음, 노래방(cozy corner란 식당에 노래방 시설이 있음)에서 강남 스타일 열창, 그리고 숙소로 돌아옴. 숙소로 돌아오는 과정은 꿈처럼 불확실. 그리고, 아침
1.
비에 신발이 쫄딱 젖음, 밤새 빗소리가 들려야 말이지. 젖은 신발뿐이다. 슬리퍼를 신고 산을 탈 수는 없다. 더럽게 짜증 난다. 박민우 알코올 중독자 다 됐냐? 나중엔 아예 네가 마셔라, 부어라. 살판나셨더구먼.
괜찮아? 괜찮아? 숙소 사람들이 나를 걱정한다. 왜지?
-어젯밤에 네가 걷다가, 서다가 정말 힘들어 보였어. 문밖에서 한참을 서성이는 거야. 우리가 일단 앉으라고 했지. 빈방을 찾는 줄 알았어. 갑자기 나 여기 방 있어. 텐트 있어. 이러면서 깔깔깔 웃는 거야. 큰 실수는 없었고. 엄청 웃겼어. 이제는 좀 괜찮아?
술을 도대체 얼마나 마신 거지? 와인, 맥주, 아르메니아 브랜디 차차. 식당 주인이 부엌에서 차차를 따라서는, 나만 몰래 주지를 않나. 러시아인이 식당 손님 전부에게 술을 돌리지를 않나. 내가 노력한다고, 안 취할 수 있는 밤이 아니었다. 노래방에서 마이크는 내 거고, 다들 내 어깨 한쪽 잡고 흔드는 게 소원이었는다. 어쩌겠어? 마셔야지, 취해야지, 춤춰야지. 과연 나는 무사히 숙소를 찾아갈 수 있을까? 희뿌연 어둠이 사하라 사막처럼 넓어지더니, 나만 달랑 남았더랬지. 자, 지금부터 숙소를 찾아보렴. 꿈이 내게 명령했고, 모래뿐인 사막에서 숙소를 찾아내야 했지. 숙소가 있을까? 정말 있을까? 한 걸음, 한 걸음 뗄 때마다 숙소에서 멀어지는 것만 같아서, 어찌나 무섭던지. 10분 거리, 한 시간은 헤맸을 것이다. 캠프파이어에서 낭만 대화를 나누는 이들을 유령처럼 배회하다가 텐트로 들어왔더랬지. 곯아떨어졌더랬지.
매일 쓰는 일기. 오늘은 끝마칠 수 있을까? 가끔은 너무 아득해서, 늘 기적이다. 나는 자꾸만 못 하겠다고, 못 쓰겠다고, 그냥 뻗어 자고 싶다고 우기는데 결국 쓴다. 너무 이상한 힘.
속도 부대끼는데 먹긴 또 뭘 먹어? 달걀 프라이가 지글지글, 향기가 간질간질. 누군가의 아침 식사를 빤히 바라만 보기는 또 싫고. 그래서 숙소 조식을 주문. 10라리(4천 원). 소시지 두 개(싸구려 느낌), 달걀 한 알(두 알도 아니고). 차가 같이 나오길래 포함인 줄 알았더니 차는 또 3라리(천 2백 원). 거참 숙소 사장 장사 못하는구려. 텐트에서 싸게 재워주고(15라리 6천 원), 이런 걸로 남겨야 하는 건 알지만 말이오. 오이, 토마토라도 몇 조각 썰어 주지 그래요. 차는 그냥 줘도 될 것 같은데. 빈속에 글도 써야지, 이따위 아침 식사도 용서해야지. 참 자비 없는 아침이구려.
양이 엄청나다. 닭은 건져내고 국물만 또 한 대접
세바스찬이 떠나기 전에 점심 같이 먹자고, 꼭 같이 먹어야 한다고. 아오, 너만 아니었어도, 나도 오늘 뜨려고 했다고. 숙취로 몽롱하지, 텐트 안은 축축하지(아, 난 자전거로 여행할 팔자는 아닌가?), 신발 젖었지, 숙소 애들은 나만 보면 괜찮냐고 묻지, 아침 식사는 거지 같지. 네가 재촉하는 바람에 짐을 못 쌌잖아. 일기만 겨우 끝냈잖아. 그럼 밥은 네가 사든가. 무슨 또 아점(아침 겸 점심)을 이렇게 거하게 먹어? 토마토, 달걀, 치킨이 들어간 스튜가 그럼 쌀 줄 알았어? 닭이 한 마리가 다 들어가더구먼. 나는 나를 찾는, 반가워하는 이 기운이 참 좋아. 귀찮은데, 너무 좋아. 나도, 너도 서로에게 기쁨이니까 남은 피자는 내가 싸가마.
카즈베기를 대표하는 특급호텔 룸스 호텔의 흔한 전망
한 번은 가야지 했던 룸스 호텔을 찾았다. 하룻밤에 20만 원. 몇십만 원이 총재산인 나는 꿈도 꾸면 안 되는 곳. 어떻게 하면 여기서 잘 수 있을까? 독자들에게 재워달라고, 돈 좀 부쳐달라고 구걸이라도 할까? 몇 날 밤을 뒤척이기까지 했던 곳. 20만 원을 쓰지 않는 대신 브라우니를 시키고, 차와 커피, 생수까지 시킨다. 만 오천 원. 이 행복감은 뭘까? 이 방에서 묵어야만 행복한 사람은 예전의 나였다. 졸다가, 깨다가, 다시 존다. 브라우니를 먹는다. 완벽하지 않은 날씨도, 술에 찌든 무거운 몸도 괜찮다.
사랑받았다
나만의 착각이어도, 착각이 확신이면 성취다. 세바스찬이, 다리안이, 니콜라가, 제이콥이 함께였다. 점심시간에 다시 찾았던 지난밤 식당 Cozy corner 사장은 또 차차를 마시라고 성화다. 바투미 한국인 부부는 이제 우리는 잊었냐며, 바투미로 지금이라도 오란다. 가야 할 곳이 많아지고, 만나야 할 사람이 많아진다. 나는 두툼한 환대의 온기에 휩싸였다. 그 몽글몽글 기운이면 된다. 내 안의 새가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이젠 아무래도 좋고, 아무래야 좋다.
-민우, 지금 경찰서야. 제길
미니 버스를 타고 트빌리시로 향했던 세바스찬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트빌리시 공원에서 한 남자가 가로막더란다. 자기와 섹스를 하자며 잡더란다. 비키라고 했더니, 듣는 척도 안 하더란다. 오히려 세바스찬을 힘으로 제압하려 하더란다. 세바스찬이 주먹으로 남자의 얼굴을 갈기고 뛴다. 결국 경찰서에 그 남자와 같이 간다. 경찰은 상식적이고, 우호적이었고, 남자의 성희롱 혐의는 인정되었다. 사지 멀쩡한 세바스찬을 그 남자는 뭘 믿고 강간을 하려 했던 걸까? 믿기지 않는 일이 언제나 일어난다. 밤기차를 타는 세바스찬은 예쁜 여자가 옆자리에 앉는 꿈을 꾼다. 그나마 위로가 된다.
술 한 방울 없이 캠프 파이어. 절대 술을 입에도 안 댈 거니까, 나는 캠프 파이어가 싫다. 축축한 텐트는 더 싫다. 무슨 생각으로 텐트에서 잘 생각을 했을까? 무슨 생각이긴. 싸니까지. 15 리라, 6천 원에 하룻밤을 잘 수 있으니 땡잡았다 했지. 그것도 성수기 인기 여행지 카즈베기에서. 세상 공짜는 없어서, 흐린 날, 축축한 텐트는 늪 같고, 진드기 같다. 불이 있는 캠프 파이어로 기어 나올 수밖에 없다. 프랑스 여자 마린은 한 남자에게 호감을 보이고, 남자는 게이라고 커밍아웃을 한다. 조지아 남자가 JBL 스피커를 들고 나온다. 마린의 옆자리에 앉아서 속삭인다. 너무 아름다워, 마린. 마린도 이 남자가 싫지 않다. 마린은 자기 오빠도 게이라며 크게 웃는다. 마린은 이번 여행을 앞두고 은발로 염색했다. 120유로를 줬다. 16만 원을 썼다. 입도 뻥끗 안 하는 폴란드 부자. 아빠는 열여덟 아들 생일 선물로 이곳에 왔다. 완벽하게 동양인인 카자흐스탄 남자 엘튼은 고려인인 줄 알았다. 한국 사람의 후예가 아니었다. 투르크족이다. 터키인이 될 수도 있었다. 할아버지의 할아버지가 카자흐스탄에 머물러서 카자흐스탄 사람. 유목민이 섞이고 섞인 터키는, 그런 이유로 또 신비롭다. 미국 보스턴에서 온 버튼은 자꾸만 나를 궁금해한다. 70년대 우리나라 가수 김정미와 신중현을 한다. 김정미는 나도 처음 들어본 가수. 스케이트 보드에 미쳐서 전 세계 도시를 찾아다닌다. 계단과 도로와 뒷골목이 그의 눈엔 다르게 읽힌다. 여기서 점프를 하고, 여기서 계단을 타고, 난간을 타고... 지금 이 순간은 꿈이다. 잠을 자야만 보이는 꿈이기도 하고, 미래의 환상인 꿈이기도 하다. 남미에서, 유럽에서 외떨어져서는 수다 떠는 그룹을 외면했다. 아무렇지도 않은 척, 무심한 척하느라 힘들었다. 외로웠다. 영어도 짧았고, 혹시 전염병 환자처럼 보이지 않을까? 막연한 공포감이 있었다(원형 탈모로 뒤통수가 손바닥 크기로 휑했다). 사람은 사람일 뿐. 어울리는데 딱히 조건은 필요 없다. 오랜 여행을 통해 깨달았다. 나는 사랑받고 있으므로, 여유가 있다. 들을 수 있고, 물을 수 있다. 내가 이야기의 주인공이 된다. 주도한다. 딱히 자랑스럽지 않다. 그냥 이 순간이 나른하고, 비현실적이다. 우리는 언제고 죽을 수 있다. 이 순간은 다시 오지 않는다. 그걸 알면서도, 우린 허비한다. 나는 악착같이 이 순간을 붙잡고는, 외톨이였을 때의 꿈을 기억해 낸다.
꿈을 이루었다.
나만 아는 비밀로 활짝 웃는다. 이번 여행은 나를 성장시켰다. 모든 여행이 그랬듯이...
PS 매일 여행기를 올려요. 저만의 오체투지 방식입니다. 여러분이 우주고, 제가 조금씩 다가가겠습니다. 동네 도서관에 제 책이 있는지요? 박민우의 모든 책이 도서관에 꽂힐 때까지, 관심 가지고, 신청해 주실래요? 이미 감사드립니다. 2019년은 방콕 여행 필독서 '입 짧은 여행작가의 방콕 한 끼'로 오체투지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