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글 쓰는 남자
매일 글을 씁니다. 사실, 5월 11일은 정말 쓰기 싫었어요. 그래도 썼습니다. 약속이니까요.
아침 7시, 툭스틀라에서 짐을 챙겨서 택시를 탄다. 멕시코에서 과테말라로 넘어가는 긴 여정이다. 챗gpt에선 툭스틀라에서 과테말라 수도 '과테말라시티'까지 10시간이 걸린다고 했다. 택시가 버스 터미널에 서고 지갑을 연다. 지갑에 돈이 하나도 없다. 뭐지? 머릿속이 하얘진다.
-현금이 없는데, 카드로 결제가 되나요?
-네, 그럼요.
일단 택시에서 내렸다. 돈을 잃어버려? 내가? 언제? 4인 도미토리에서 잤는데, 밤늦게 체크인한 남자가 내 위 침대에서 잤다. 돈가방은 몸에서 웬만하면 떨어뜨리지 않는데, 샤워할 때는 어쩔 수 없다. 개인 사물함에 넣는 게 가장 이상적이긴 한데, 삐걱삐걱 사물함 여닫는 소리로 자는 사람들을 깨우고 싶지 않았다. 샤워도 대충 5분 만에 끝내고, 짐을 챙겨 나왔다. 그 5분 사이에 위층에서 자던 남자가 사라졌는데도, 바쁜가 보지.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는 나와 내 돈가방이 분리되는 순간을 침 꼴깍 삼켜가며 예의주시하고 있었던 거다. 그가 자지 않고 있다는 걸 알았다. 벽 쪽으로 몸을 돌리는 게 보통인데, 내쪽을 향하고 자는 척을 한다. 혹시 게이인가? 실눈을 뜨고 안 보는 척, 자는 척하는 게 귀여웠다. 게이는 게이의 프레임으로 세상을 본다. 구십 프로 이상이 이성애자인 세상에서, 수많은 게이를 본다. 아니, 그러기를 바라며 남자들을 관찰한다. 내 돈을 노리며 입맛을 다시는 좀도둑을, 나에게 설레는 게이로 착각했다. 그리고 돈이 몽땅 사라졌다.
우리나라 돈으로 환산하면 20만 원이 넘는 큰돈이다. 마음이 진정되지 않는다. 여권으로 시비를 걸며 내 여행을 망친 군인들에 도둑까지 가세했다. 멕시코는 개좆같은 나라라고 해도 되지 않나? 도대체 나에게 왜 이러는데?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출국 못해요. 스탬프가 없잖아요.
과테말라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출입국 사무소, 그놈의 스탬프 타령. 없다고. 없다니까아아아아.
-공항에서 나오실 때 기계에서 나오는 종이가 있었을 거예요. 그걸 꼭 받아 오셨어야 했는데. 남미사랑 커뮤에도 그 얘기 많이 나오는데.
출입국 사무소에서 60대로 보이는 한국인 부부가 나를 딱한 눈으로 보더니 한마디 한다. 내가 남미사랑 사람인 걸 어떻게 알았지? 캐리어에 남미사랑에서 받은 노란색 인식표가 대롱대롱, 나로 말하자면 걸어 다니는 남미사랑 광고판이란 걸 잊고 있었다. 자동차로 과테말라에서 멕시코로 넘어온 걸 보니, 중남미를 차로 여행 중인 멋쟁이 부부인 듯했다. 공항 출입국 자동화 기계에서 종이 쪼가리가 나오는데 , 그걸 깜빡해서 경찰이나, 군인에게 돈을 빼앗기거나, 나처럼 추방당하는 일이 곧잘 일어난다고 했다. 그래, 좋다 이거야. 종이 쪼가리가 나오는데, 그걸 안내하는 공항 직원이 한 명도 없어? 알아서 가져가라는 건가? 모르면 추방당하는 거고? 여러 공항에서 출입국 자동화 기계를 이용해 봤지만, 종이 쪼가리가 나온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종이 없으면 출국 못해요. 뒤에 사람들 있으니 비키세요.
출입국 사무소 여직원의 서늘한 말투에 멕시코가 증오스러워진다. 치가 떨린다. 아주 이가 갈린다. 드디어 줄이 끝났다. 나는 다시 창구로 가서
-공항 출입국 기계에 여권 찍었더니 문이 열리고, 나는 그 문을 나온 죄밖에 없어요. 종이가 나온다는 걸 몰랐다고요. 그 기계 옆에 아무도 없었어요. 누구 하나 알려주거나, 도와주지 않았으면서 왜 이제 와서 나를 괴롭히냐고요?
싸울 일이 생기면 확실히 언어 능력이 좋아진다. 나는 오늘 가장 억울한 사람이다. 돈까지 털리고, 유카탄 반도 쪽은 아예 가지고 못하고 이리로 왔더니, 왜, 왜 또 시비인 건데?
-저희 차 대고 다시 올게요.
-아니, 그러지 마세요. 가시는 길 바쁘실 텐데요.
차를 대고 왜, 왜 와요? 제발 좀 그냥 가셔요. 오신다고 뭐가 달라지는데요? 공항 기계에서 종이 쪼가리 나오는 것도 모르는 제가 우습죠? 꼬숩죠? 날씨는 34도로 이글이글 타오르고, 여기서도 쫓겨나면 이젠 어쩌나? 멕시코시티로 날아가서 한국 대사관이라도 가야 하나? 지친다. 화도 나지 않는다. 어쩌라고? 도대체 어쩌라고오오오.
-이번만 그냥 통과시켜 주는 거예요.
여직원의 누그러진 말투가 되려 당혹스럽다. 이렇게 보내 줄 거면서, 왜 그렇게 못 되게 군 건데? 짧은 시간, 지옥과 천국을 오간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오늘 누구보다 운이 좋은 사람은 나다. 돈가방엔 달러가 다른 쪽 주머니에 2천 달러 넘게 있었다. 삼백만 원 넘는 돈이다. 도둑놈이 그 돈을 보지 못했던 거다. 지갑을 통째로 가져가지 않은 것도 얼마나 고마운가? 신용카드가 없으면, 그것만으로도 얼마나 큰 불편이고, 스트레스인데? 내 여행 의지를 지근지근 밟지 않고, 불씨를 살려 둔 고마운 날임을 인정하자. 툭스틀라에서 국경선까지 오는데만 8시간(점심 먹고, 차 대기하는 시간 포함)이 넘게 걸렸다. 그런데 또 택시를 잡아 타고 과테말라 출입국 사무실까지 가야 한다. 거기서 또 9시간 버스를 타야 과테말라 시티란다. 챗gpt 이 멍청아, 뭐? 툭스틀라에서 과테말라 시티까지 총 10시간? 오후 네 시가 넘었다. 과테말라시티까지는 무리다. 과테말라 시티는 포기. 그럼 어디로 가지? 순간
모든 불완전함은 완벽함의 퍼즐이다.
나의 유일한 깨달음이 톡톡, 내 머리통을 두드린다. 등골이 서늘해진다. 형님이십니까? 내가 유카탄 반도를 못 가게 한 것도, 과테말라로 오게 된 것도, 멍청한 챗gpt를 믿게 한 것도, 그래서 '과테말라 시티'를 포기하게 한 것도 다 형님이 시키신 겁니까? 저를 그렇게 보고 싶으셨습니까? 케찰테낭고 쉘라(Xela)에 선다. 달이 유난히 큰 과테말라 제2의 도시.
그리고 형님이 사는 도시
나는 원래부터 쉘라로 와야 했다. 모든 불운의 퍼즐이 하나씩 맞춰져 간다. 만날 사람은 만나게 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