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가장 멍청한 여행자

는 나야 나

by 박민우

매일 글을 씁니다. 지난 글들을 차근차근 올려 보겠습니다. 2025년 5월의 기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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캄페체(Campeche) 가는 버스가 잠시 선다. 산크리스토발에서 버스로 12시간 거리. 최종 목적지는 플라야 델 카르멘(Playa del Carmen)인데 캄페체와 메리다가 예쁘다고 해서 이틀씩 들른 후에, 플라야 델 카르멘에서 스쿠버 다이빙을 배울 예정이었다. 액티비티에 관심 없는 편이지만, 세노테는 꼭 한 번 보고 싶었다. 세노테는 석회암 동굴 수영장이다. 천연 싱크홀이라고도 한다. 유카탄 반도에 6천 개가 넘는 세노테가 있다. 세노테마다 주변 나무들이 가지를 뻗치고, 물을 찾아, 아래로 아래로 향한다. 타잔에게나 필요한 동아줄이 치렁치렁 빗줄기처럼 늘어져 있는 에메랄드 빛 연못이 시리게 일렁인다. 사진만으로도 여긴 가야 해. 아이슬란드의 오로라 사진에도 꿈쩍 안 하던 나의 호기심을 발동시킨 아주 기특한 곳이었다.


버스가 검문소에 선다. 두 명의 군인이 타더니, 한 군인이 내게만 여권을 달란다. 둘은 내리더니 내 여권을 이리저리 본다. 사진을 찍고, 어딘가로 전화를 건다.


-잠시 내리세요.


이런 일이 한두 번 있는 것도 아니고, 무슨 일이야 있겠어?


-입국 도장이 없어요.

-아, 그건 멕시코 공항이 자동 입국 시스템으로 바뀌면서, 스탬프를 안 찍어 줘서예요.


모처럼 능숙한 스페인어였다. 아, 만족스러워.


-그런데 입국 기록에 당신 이름이 없어요. 짐 다 꺼내세요.


응? 짐을 꺼내라니? 그때도 그냥 하라는 대로 했지, 일이 더 커질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그렇게 버스가 떠났다. 나의 세노테도 떠났다.


-저는 공항에서 하라는 대로 기계에 여권을 찍었을 뿐이에요. 내가 뭘 잘 못했나요?

-그럼 내 잘못은 뭐죠?


이 자식 웃긴 놈일세. 당신 처지는 알 바 아니고, 자기 할 일만 하시겠다? 이래서 멕시코에서 총기 사고가 흔한 거구나. 총이 있다면 드르륵 갈겨 주고 싶다. 그렇게 나는 검문소 차에 갇혔다.


-언제까지 여기서 기다려야 하나요?


차 안에서 30분을 기다리다 못 참고, 물었다.


-차 안에서 나오지 마욧!


군인의 짜증 섞인 목소리에 분노와 무력감이 동시에 밀려든다. 나는 새로운 깨달음을 얻은 사람. 이 모든 상황은 불완전해 보여도, 결국 완벽한 0초의 일부고, 화소다. 그런데 왜 진정이 안 되냐고? 저 개새끼는, 지금 한 사람의 소중한 여행이 날아간 상황을 이해할 마음이 없는 건가? 일부러 엿 먹이려고 저러는 건가? 자기네들끼리 웃고, 떠들고 아주 신이 났다. 조금만 기다리면 되겠지. 무려 2시간을 넘긴다. 이젠 겁이 덜컥 난다. 혹시, 혹시 이놈들이 다른 마음을 먹고 있는 건가? 마약 카르텔과 연결되어 있는데, 무슨 이유인지 몰라도 아시아인이 필요한 거였다면? 기회는 지금이야. 얼른 도망쳐. 나의 노망난 상상력은 상황을 과장하고, 깨달음이고 나발이고 죽게 생겼다며 미친놈처럼 좌절한다. 드디어, 드디어 차가 움직인다. 검문소에는 총 네 명의 군인이 보초를 서고 있었는데, 내 여권을 빼앗아 갔던 두 명이 차에 탔다. 한 명이 운전, 한 명이 보조석. 차가 잘 가다가, 갑자기 산으로 방향을 튼다. 마약 게릴라들과 내통하는 놈들이 맞았어. 잠깐이지만, 나의 개죽음을 상상하며 애통해했다. 유턴을 한다. 잠시 방향을 튼 거였다. 휴우, 다행이다. 그런데 왜 유턴을? 내 여권을 두고 왔다. 멍청한 새끼들. 그리고 한참을 가다가 또 유턴. 초소에 내리라고 하더니, 군인들과 함께 사진을 찍으란다. 증거용 사진인 듯싶은데, 이 모든 일은 한 번에 다 처리할 수 있었다.


또 다른 검문소에서 선다. 키가 작고, 왜소한 남자가 탄다. 김국진을 닮았다. 쿠바에서 온 여행자라고 한다. 뭐가 그리 신이 나는지, 히죽히죽.


-치노(Chino), 치노! 다 잘 될 거야. 걱정 말라고.

-나 치노(중국 사람) 아니거든. 코레아노라고.

-그게 그거지 뭐, 치노!

-그게 그거 아니야.

-알았어. 진정해. 다 잘 될 거라니까!


영화 속 감초 조연처럼 끊임없이 지껄이는데, 꼭 이런 상황이 아니어도 거부감이 드는 말투와 속도였다. 그도 버스에서 강제로 내려졌던 모양인데, 자기도 왜 잡혔는지 모르겠단다. 한 시간 정도 툭스틀라 시내를 관통해 군인 건물로 들어간다. 툭스틀라에 이렇게 또 오게 되는군. 거리엔 먹는 사람, 마시는 사람으로 술렁술렁, 그러고 보니 토요일이군. 매력적인 툭스틀라의 활력조차 혐오스럽다. 그래도 납치를 당하지 않은 게 어디인가? 어떻게든 해결될 거니까 무조건 감사하자.


-뭐 하는 거예요?


참 가지가지 한다. 쿠바 김국진과 나만 차 안에서 대기 중이었는데, 나는 군인 호위를 받으며 화장실을 다녀왔다. 죄를 지은 적 없으나, 완벽한 죄인 취급이다. 그동안 차에선 한바탕 소동이 있었나 보다. 그의 페트병이 군인 손에 쥐어져 있고, 그는 안에서 바카스병처럼 생긴 걸 입에 넣는 시늉을 한다. 페트병엔 노란 액체가 들어 있는데, 쿠바놈이 나에게도 권했었다. 술 같아서 사양했는데, 그걸 홀짝홀짝 마시다 들킨 모양이다. 또 꼴에 반항한답시고 박카스병 닮은 스프레이로 마시는 척하는 걸 군인들이 제지하는 중이었다. 안 그래도 심란한데, 왜 또 저런 꼴통까지 붙여 놓은 건지.


차 안에 30분 정도 방치된 후에 나도, 쿠바 김국진도 풀려났다.


-다음에 입국할 땐 꼭 도장을 받으세요. 유카탄 쪽은 못 가요. 과테말라는 갈 수 있어요.

-왜 이렇게 된 건지 자세히 설명을 해 줘야죠.

-아, 그냥 가라고.


그렇게 떠밀리듯 청사를 나왔다.


-치노, 같이 가자.

-아니, 싫어.


내가 왜? 쿠바 김국진은 실망한 표정으로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마침 오는 택시를 타고, 전에 묵던 숙소로 간다. 내 여행이 송두리째 무너진 날이고, 아무 이유 없이, 아무 잘못 없이 갇혀 있다, 쫓겨난 하루이기도 하다. 공항에 새 입국 시스템이 도입됐으면, 출입국 관리자들은 기본적으로 알아야 하는 거 아닌가? 내 여권이 기계에 찍혔으니 문이 열리고, 멕시코에 입국할 수 있었던 건데, 정보가 없다니? 그게 내 잘못인가? 청사로 오는 내내 운전하는 놈 통화를 엿들었다. 내 출입국 정보가 어디서 나왔나 보다. 놈들은 한숨을 쉬고, 내 눈치를 봤다. 죄 없는 사람을 그렇게 들들 볶고, 혹사시켰지만, 그 어떤 책임도 지지 않는 나라, 멕시코. 멕시코를 좋아하고, 아니 사랑하고, 그 나라를 더 알고 싶은 순진한 여행자 한 명은 폭력으로 도배된 하루에 난도질을 당했다. 혈기 왕성한 이라면 누군가 한 명 죽이고 싶은 그런 날이었다. 나를 2시간 차 안에 방치시킬 때, 적어도 좀 미안해한다거나, 딱한 표정 정도는 지어 줬어야지. 놈들은 내내 즐겁고, 일상이었다.


차에 갇혀 있는 내내 0초의 천국을 떠올렸다. 나는 신이다. 이미 결과를 알고 있다. 이 모든 상황이 합쳐져서 최고의 완성작이 된다. 아는데도 너무 힘들다. 누군가가 책임지는 꼴을 꼭 좀 보고 싶다. 너무 잘 참으려고도 하지 말자. 무탈한 하루엔 또 지루함을 느끼지 않나? 집에 틀어 박혀 누워만 있었다면 이런 꼴은 안 당했겠지. 그걸 원해? 이런 억울한 날도 있어야지. 수많은 멕시코 사람들의 친절을 잊었어? 바로 전날 취소했는데도, 캄페체 숙소 주인은 전액 환불해 준다잖아. 그런 주인 봤어? 그런 사람이 사는 나라가 멕시코야. 오늘은 어쨌든 실컷 억울해하자. 이런 하루마저 가장 완벽한 그림의 위대한 점이고, 윤곽이니까.


그나저나 캄페체 그 숙소 꼭 가 보고 싶다. 천사 사장의 용안을 확인하고 싶다. 유카탄을 간다면 세노테보다 그 사장 때문이 될 것이다. 세노테보다 사람이다. 내 여행이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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