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에서 만난 기적
한국에 오자마자, 이틀 자고 바로 전주다. 유경이가 만든 자리다.
유경이는 콜롬비아에서 만났다. 당시 나는 순수한 여행자 입장은 아니었다. 세계 테마 기행 콜롬비아편을 찍을 때였으니까. TV 출연은 가문의 영광. 그때 내 심정이 어땠냐면 죽어도 좋다였다. 좀 끔찍한 의욕이긴 한데, 프로그램만 잘 나온다면, 죽어도 좋다였다. 내게 이런 일이 일어나다니, 촬영 내내 의심했다. 일과가 끝나면 하루치 촬영분을 정리한다. 충격적인 내 몰골을 모니터로 봐 버리고 만다. 거울로 볼 땐 잘 생긴 사람이, 왜 카메라에서 오징어로 뭉개지는가? 논문으로 써야 마땅한 주제다. 나는 멘탈이 나가버린다. 새벽부터 밤까지 강행군이다. 죽기로 각오까지 했으니, 고생은 괜찮다. 오징어 출연자 때문에 시청률이 0%면 어쩌지? 해산물들이라도 보게 해달라고 청원이라도 해야 하나? 화면 속에서 내가 아닌 꼴뚜기가 걷고, 말하고, 인상 쓰는데, 입을 틀어막고 싶었다. 그때 유경이를 만났다. 한국인이 운영하는 숙소라서 한국인이 몇 더 있었다. 모든 한국인이 반가웠다. 내 입에서는 꼴뚜기어가 아니라, 엄연한 인간어가 나왔다. 나는 사람이다. 그러니까 화면을 보는 이들도, 내가 사람이라는 건 인정할 것이다.
전주에서 돈가스 집을 한다고 했다. 홍보 포스터를 만들었는데, 회비가 3만 원이다. 두려운 액수다. 백 원이라도 싼 거 사려고, 다이소를 찾는 나다. 내가 뭐라고, 3만 원 씩이나. 자칭 지구 대표 글쟁이지만, 돈과 관련되면 내 자존감은 쓰레기다. 모순이다. 연예인처럼 굴어야 한다. 소속사가 없다 뿐이지, 내 가치는 내가 만드는 것. 아니, 그래도 그렇지. 3만 원이다. 액수 앞에서 나는 작아지고, 약간은 울고 싶어 진다. 이런 모임이 많으면 좋다. 한국에 온 이유도, 강연이나 모임으로 여비를 벌기 위해서다. 통장의 액수가 늘어나면 최신 노트북을 장만하고, 유투버로 데뷔할 참이다. 잘 생긴 유투버도 많지만, 친근한 꼴뚜기도 좀 보이더라. 솔직한 꼴뚜기도 나름 유튜브 지분이 있다. 해도 되겠다.
일단 장소에 깜짝 놀랐다.
모임 장소는 유경이네 집이었다. 나는 가게에서 모일 줄 알았다. 생각날 때마다 돈가스 집어 먹으면서, 열심히 떠들 참이었다.
서른 명쯤? 프로젝터에 노트북까지. 방이 네 개나 되는 집이다. 기다란 거실은 좁지 않았다. 흠! 나를 기다린 사람들이다. 부산, 울산에서도 왔다. 어떤 이야기를 해야 하나? 일단 나를 전혀 모르는 사람에게 닿아야 한다. 나를 아는 이들은, 관대할 것이다. 실용적인 정보여야겠지. 치앙마이에서 한 달 살기 좋은 숙소를 보여주고, 주변에 갈만한 곳을 보여준다. 그냥 내 이야기만 하면 편하다. 자연스럽다. 나 역시 돈이 필요해서 온 자리다. 돈값을 했다는 말을 듣고 싶다. 그래서 한 달 살기 이야기를 일부러 더 한다. 온 이들의 질문은 결국 내 여행과 내 삶에 집중된다. 처음부터 이런 이야기만 했으면 더 좋았을까? 나를 보는 이들의 열기가 뜨겁다. 내가 누군가에게 영향력이 된다. 바라는 삶이다.
두 시간 정도 이야기가 끝나고, 유경이가 준비한 음식을 먹는다.
산더미처럼 쌓인 연어 베이글, 육즙이 완벽하게 살아있는 삼겹살 튀김, 훈제 오리 말이, 폭신폭신 감자 샐러드, 속이 꽉 찬 김밥, 두툼한 연어, 샹그리아(와인으로 만든 과일주) 디스펜서가 큼직하게 두 개(진짜 이걸 다 보여줘야 하는데, 그땐 흥분해서 먹느라 사진을 못 찍었다), 맥주와 소주, 사과를 잘게 썰어서 넣은 요거트. 그리고 케이퍼가 곁들여진 샐러드.
경이롭다
파티 업체에 주문한 줄 알았다. 그것도 아주 솜씨 좋은 파티 업체. 유경이가 직접 준비했다. 서른 명에게 충분한 어마어마한 저녁을, 친구 두 명 부려먹으면서, 유경이가 했다. 진짜 잔칫집이 됐다. 3만 원이 누구에게나 기쁜 액수가 됐다. 유경이 덕이다. 이 아이는 대단한 재능을, 아무렇지도 않게 쓴다. 정돈가스. 유경이와 유경이 오빠가 하는 돈가스 가게다. 너무 잘 돼서, 전주에만 체인점이 여덟 개? 돈가스만 판다. 돈가스만 파는 한솥 도시락인가? 이번 달에 서울로 올라온다. 서울에서는 더 대박 날 것이다. 내 입맛이 쉽지 않다. 모든 음식이 대단했다.
나를 불러주는 곳에 갈 때마다 설레지만, 두렵다.
만약 내가 돈이 많다면, 이런 자리는 없었을 것다. 그냥 어딘가를 떠돌았겠지. 여행이 점점 대단해진다. 나는 조금 더 다녔을 뿐인데, 나의 여행이, 자극이 된다. 롤모델이 된다. 여행이란 단어만으로 감전을 일으킨 듯, 흥분부터 한다. 이런 모임이 편하지만은 않지만,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근사한 사간이 됐다. 나는 괜찮게 살고 있다.
어려 보여요
아뇨, 가까이서 보면 나이 보여요
나를 두고 한 얘기다. 뭐, 이런 이야기까지 다 들리는 사람이 됐다. 저도 진짜 동안이었죠. 햇빛에 장사 없어요. 폭삭 늙었습니다요. 아르헨티나 조카가 한국에 와서 나를 보자마자 한 말, 와, 완전 늙었어. TV에서 봤던 얼굴에서는 몰랐던 주름과 패인 살이 보이니까요. 감탄하더군요. 내 늙음에요. 요놈의 자식이. 속상하죠. 하지만, 언뜻, 길에서 묻혀온 생기가, 보일 거예요. 한국 사람 정말 안 늙죠. 전국 노래자랑에 출연한 사람들 나이 보면서, 깜짝 놀라요. 신기할 정도로 안 늙어요. 다들 오래 살 거 대비하세요. 백 살이 당연한 시대가 와요. 그때까지 놀려면, 하체 운동 열심히 하세요. 3월, 4월. 한국에서 저는 얼마나 바쁠까요(아직까지는 매우 한가). 괜찮습니다. 모두 잘 될 걸 알아요. 돈이 모이면 조지아로 갑니다. 코커서스 3국 생각하고 있어요. 조지아, 아제르바이잔, 아르메니아. 돈이 부족하면 우붓, 아예 없으면 오사카나 도쿄(공짜로 잘 수 있어요). 아뇨, 무조건 코카서스 3국입니다. 가겠다고 하면, 갑니다. 가게 됩니다. 한 달 살기 프로젝트는 이미 시작됐습니다. 내 여행이, 누군가의 즐거움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