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시간 일찍 들이닥친 후배의 정체

이교수가 한 턱 거하게 쏜 날

by 박민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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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배님, 숙소 앞에 와 있어요.


여섯 시에 보자더니, 다섯 시에 차를 몰고 왔네요. 95학번 후배 동관이는, 하노이의 대학에서 한국어를 가르쳐요. 이동관, 이동관. 페이스북 사진을 봐도 가물가물해요. 페이스북이란 놈이 신기하긴 해요. SNS는 인생의 낭비니 어쩌니 해도, 까마득한 인연도 연결해 주는 걸 보면요. 차까지 몰고 온 후배 덕에 어깨에 힘 좀 들어갑니다. 여섯 시에는 아무래도 차가 막힐 것 같아서, 한 시간 일찍 왔답니다. 제때 저 못 볼까 봐, 얼마나 애가 탔을까요. 아내와 두 아이는 안 데리고 왔네요. 덜 긴장해도 되겠어요. 런닝맨에 나왔다는 맛집에서요 퍼꾸온을 먹어요. 퍼꾸온은 얇은 쌀전병에 돌돌돌 버섯, 고기를 말은 음식이요. 새콤 소스에 톡톡 찍어 먹죠. 아, 맞아요. 저는 아픈 사람이죠. 속은 간헐적으로 쓰르르 하지만, 설마 죽기야 하겠어요?


-맥주도 한 병 하셔야죠.


맥주를 마셔도 될까? 마셔야죠. 후배와 이십 년 만에 만났는데, 속 좀 불편하다고 빼고 그러면 되겠어요? 벌컥벌컥까지는 아니고요. 홀짝홀짝 사이공 맥주 한 병을 마십니다. 퍼꾸온 맛이요? 맛있죠. 단, 여섯 시도 채 안 된 시간이라서요. 배가 안 고프네요. 아침부터 화장실을 세 번 다녀왔으니까요. 배탈도 여전히 진행 중이죠. 맛이 있다는 걸 이성으로 감지하고, 먹습니다.


-콩 카페에서 코코넛 커피 드셔 보셨나요?


이교수, 나야, 나. 천하의 박민우라고. 그 유명한 콩 카페를 가봤냐니? 호찌민에서 종류별로 다 마셔 봤지. 에이, 그게 뭐가 중요하겠어요. 하노이 콩 카페는, 호찌민 콩 카페와는 또 다르겠죠. 참, 참. 커피는 자제해야죠. 아픈 이야기 너무 한다 싶지만, 제 몸 꼬라지가 그래요. 역류성 식도염에 커피가 쥐약이죠. 하아. 생강 커피가 딱 눈에 들어오네요. 콩 카페에 생강 커피도 파는군요. 인도 바라나시에서 처음 마셔봤죠. 생강이 커피와 상극일 것 같아도요. 섞이면, 그윽합니다. 알쏭달쏭 사려 깊은 커피맛이 나요. 그냥 커피는 쥐약이지만, 생강을 섞으면 그냥 약이 될 수도 있겠죠. 역류성 식도염은 밤에 심해져요. 위산이 식도로 치솟아 올라오면, 가슴부터 목젖까지 활활 타오르죠. 될 대로 돼라. 지금 역류성 식도염 따위가 중요한가요? 같은 시절 같은 학교를 다녔어요. 걔도 알고, 걔도 알죠. 지금은 어떻게 사는지를 한 명씩만 풀어도, 꿀이 뚝뚝 떨어지는 대화로군요. 이교수는 베트남 소수민족들의 사라져 가는 말들을 채집해요. 베트남 산골 400km 거리를 오토바이 몰고 들어가기도 한대요. 오토바이 사고로 죽은 사람도 여럿 봤지만, 해야 할 일이니까요. 사라져 가는 말들을 녹음하고, 문자가 없는 그들에게 글자를 만들어 줘요. 참 멋진 후배를 뒀네요. 대신 간덩이가 너무 부었어요. 베트남 시골길이야 비포장일 텐데, 거기가 어디라고 오토바이를 몰고 가나요. 두 아이의 아빠가요. 아, 월급 이야기도 하네요. 한 달에 오십만 원 받는답니다. 베트남에서 교수 월급이 그렇게 짜답니다. 그런데도 앞으로 이십 년은 더 있을 거래요. 베트남이 자기랑 딱이랍니다. 한국도 내 나라, 베트남도 내 나라가 된 거죠. 선생님을 극진히 따르는, 예쁜 베트남 제자들이 별처럼 늘어나는 게 자랑입니다.


동관이에게 저는 말 많고, 잘난 척 좀 많이 하는, 재미난 선배였대요. 허참, 억울해서 잠은 다 잤네요. 잘난 척이라뇨? 그냥 잘난 거죠. '척' 안 해도 술술 뿜어져 나오는 '잘 남'을 굳이 입 아프게 우기기까지 해야해요? 남자 둘이서 커피 한 잔씩 홀짝이면서 밤 열한 시를 넘겨요. 세월은 허락도 없이 우리를 사십 대 중반으로 데려다 놨지만, 가끔 빠꾸도 하는군요. 우리가 95년 그곳에 있었던 건 분명한 사실이니까요. 우리 주위로 수많은 베트남 젊은이들이 들어오고 나가지만요. 신경도 안 쓰여요. 너희들보다 더 젊은 그때로 돌아가서, 우리의 젊음을 확인하기 바쁘니까요. 월급 오십만 원 후배한테, 얻어먹을 수야 없죠. 아니, 이 녀석이 유네스코랑, 세이브 더 칠드런에서도 따로 연구비를 지원받는다네요. 아내도 같은 학교에서 강사로 일하고요. 아이고, 깜빡 속고 돈 낼 뻔했잖아요. 밥도, 커피도 사주고, 차로 숙소까지 데려다 주기까지 합니다. 근 한 달만에 마신 커피라서요. 잠이 올까 싶네요. 잠 안 와도 배부릅니다. 맥주 한 병으로 세상이 다 귀엽습니다. 삶이 이토록 짧은데, 여행자입니다. 이토록 짧은데, 인연입니다. 무슨 복을 타고났기는요? 그냥 제가 잘난 거죠. 잘난 척이 아니라, 팩트, 팩트. 외우시기 바랍니다.


PS 매일 글을 씁니다. 글쟁이의 작은 오체투지입니다. 언젠가는 제 글을 지구 반대편, 칠레의 산티아고 중2도 읽기를 바랍니다. 더 유명해져야죠. 도와주시라고요. 학교, 도서관, 군부대에 박민우의 책을 신청해 주세요. 박민우의 책은 모두 입고되어 있어야 해요. 너무 재밌고, 유익한 책들 뿐이니까요. 여러분 덕에 제가 삽니다. 감사합니다. 꾸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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