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학번 최규성이가 쏩니다.
-형, 오늘은 저 만나셔야죠.
인도에서 후배 한 놈이 날아와요. 절 보러요. 재벌인가요? 주말 잠깐 놀겠다고, 비행기를 타다뇨? 과 후배입니다. 2년 후배요. 우린 국문과를 졸업했어요. 술주정이 자랑이고, 외국 한 번 못 가본 게 자랑인 촌놈 정글 국문과였죠. 이놈은 달랐어요. 날라리였죠. 잘 꾸미고 다녔어요. 부티도 철철 났고요. 졸업하고는 KAIST에서 MBA를 공부하더군요. LG 전성기 시절 대박폰 뷰티폰이 이 친구의 손에서 나왔어요. 국문과와 전혀 안 어울리는, 세련되고, 스케일 큰 친구였죠. 연극반도 같이 했어요. 그래도 딱히 졸업 후에 연락 주고받는 사이는 아니었어요. 귀신 잡는 글발, 박민우의 책을 단 한 권도 안 읽은 놈이기도 하죠. 요런 놈이 후배랍시고 느닷없이 온다네요. 그래라, 이놈아. 아침 일찍 도착한다고요. 일찍 나와달래요. 열한 시까지 나가마 했어요. 저도 참 천사죠. 어딜 선배를 꼭두새벽부터 나오라 마라 하냐고요. 열한 시에 나가 줍니다. 쌀국수 먹고요. 차 마셨어요. 네 시간 떠들며 차를 홀짝홀짝 마셨네요. 어지러워요. 지칩니다. 반갑죠. 즐겁죠. 국수 먹고 떠들고, 차 마시고 떠들고. 다섯 시간 나불나불. 마흔일곱 글쟁이, 할 만큼 했잖아요? 규성이에겐 미인 하지만, 저는 집에 가서 눈이라도 붙여야겠어요.
-발 마사지 같이 받아요. 형
마사지? 그러면 또 이야기가 달라지죠. 입 좀 닫고, 눈도 좀 닫고요. 방전된 에너지 좀 보충한다면, 더 떠들 힘이 생길 것도 같아요. 둘이 나란히 발마사지를 받아요. 금세 잠이 들죠. 드르렁, 드르렁. 코 고는 소리가 우렁찹니다. 저 말고요. 규성이가 주범입니다. 그럼, 그렇지. 밤 비행기 타고 왔으니, 얼마나 피곤하겠어요? 지금은 LG전자에서 나와서요. 인도에서 직원 백사십 명을 책임지는, 대빵입니다. 스트레스가 좀 많겠어요? 뜬금 이 녀석의 발가락을 봐요. 타인의 발가락을 본다는 게, 사실은 굉장히 낯설죠. 약간은 의미 있게 다가와요. 20년 만에 만나 나란히 발 마사지를 받아요. 제가 글을 안 썼다면, 방콕에 안 살았다면. 이런 시간은 없었죠.
-우리 해산물 먹으러 가요.
숙소 옆, 시푸드 마켓 앤 레스토랑(Seafood market and restaurant)을 가자네요. 해산물을 고르고, 직접 요리해 주는 곳인가 봐요. 후기를 검색해요. 네 명이 가면 사십만 원이 든대요. 네? 얼마요?
-야, 여기 너무 비싸잖아.
-와이프랑 왔던 곳인데요. 형이랑 꼭 한 번 가보고 싶어요.
-매리어트 호텔에 식당 괜찮아. 거기 가자. 진짜 맛있어. 내 책에도 소개된 곳이야.
-아뇨. 전 해산물이 먹고 싶어요.
얻어먹기 9단인 저지만요. 40만 원은 패륜의 액수로군요. 둘이면 이십만 원 정도 나올 테고요. 그 돈 절반의 절반으로도 얼마든지 행복할 수 있어요. 왜, 엄한데 돈을 쓸까요? 기분이 확 나빠지는 액수네요. 선을 넘지 말아야죠. 얻어먹는 사람도 마음 편해야죠. 도살장에 끌려가는 기분이군요. 분위기를 깰 용기까진 없어서요. 안절부절 쫓아갑니다. 랍스터를, 대게를, 닭새우를 골라요.
-규성아, 농어. 농어 튀김 먹자.
-그런 걸로 배 채우고 싶지 않아요.
아니, 그런 거라니. 이 미친놈아. 농어도 한 마리에 삼만 원이 넘어. 치칸보다 맛있는 농어 튀김은, 이 촌놈은 아직 못 먹어 봤군요. 규성이는 지금 인도에서 새로운 사업에 도전하고 있어요. 인터넷으로 통신료, 공과금 등을 결제하는 서비스를 시작하고 있대요. 전 무식해서 다 알아듣지는 못하고요. 미래가 창창한 스타트업 회사구나. 그렇게 이해해요. 8천 밧 가까이 나와요. 환율 계산기로 톡탁톡탁 액수를 셈해요. 삼십만 원이네요. 네, 얼마요? 맥주를 추가로 더 마셔요. 삼십오만 원 이상을 한 끼로 써요. 둘이서 삼십오만 원이라뇨? 제 평생 가장 비싼 한 끼로군요. 기쁘지 않아요. 이게 맛없으면, 화병으로 수명이 한 달은 짧아질 테니까요.
-인도에서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전력 질주해요. 안 그러면 못 살아남아요. 잠이 갑자기 안 오는 거예요. 안 풀리는 일들이 하나, 둘 꼬리를 물면서요. 환장하겠는 거예요. 새벽 네 시까지 잠을 못 자다가요. 방콕 비행기를 끊었어요. 형 보려고요. 그제야 잠이 오는 거예요. 방콕을 가야지. 민우 형을 봐야지. 그러면서 잠들었어요.
하이고, 제가 이 놈 말을 다 믿을까 봐요? 절반만, 아니 절반의 절반만 믿는다고 해도요. 누군가가 궁지에 몰렸을 때, 쉼으로 떠오르는 사람이 저랍니다. 저는 이미 이루었습니다. 이 성공담을 저는 누려야겠어요. 밤늦게 술은 절대 입에도 안 댔지만요. 지금은 마셔야죠. 딸 둘의 아빠고, 사랑스러운 아내의 남편인 95학번 최규성이, 인도에서 홀로 머리를 쥐어뜯고 있어요. 35만 원을 쓰면서 이렇게 히죽대는 사람은 처음 봤어요. 우리는 열한 시에 만나서요. 여덟 시까지 먹고, 이야기하고, 먹습니다. 날라리인 줄 알았던 규성이는, 대학시절 새벽 여섯 시면 집에서 나와 종일 도서관에 살았던 친구였어요. 학점은 1,2등을 다퉜고요. 후배 언니랑 결혼한 줄 알았죠. 군대에 있을 때 진즉에 깨졌더군요. 방콕에서 마사지 자격증까지 땄었네요. 기억 속 규성이와, 실제의 규성이는 거의 다른 사람이네요. 부자여서 35만 원을 쓴 게 아니라요. 반가움이었죠. 우리만의 순간을, 만들고 싶었던 거죠. 저도 노련한 얻어먹기 천재라서요. 35만 원이고, 뭐고. 탱글탱글 회로 나온 랍스터 살에 놀라워하고요. 버터에 구운 닭새우를 파먹으며, 눈꺼풀을 흔들어요. 기쁨은 기쁨으로 맞서는 거예요. 반가움은 반가움으로, 맥주는 맥주로요. 우리는 가장 부풀어 올라서, 서로의 잔을 부딪혀요. 우리의 시간은, 주변과는 조금 다르게 흐릅니다. 오늘은 평생 안줏거리가 되겠어요. 35만 원이, 350만 원, 3,500만 원의 가치가 되어 우리 곁에 머물겠군요. 평생요.
PS 매일 글을 씁니다. 여러분에게 닿고 싶어서요. 여러분의 친구, 가족, 여러분이 모르는 사람에게 닿고 싶어서, 매일 써요. 혹시 가까운 도서관, 학교, 군부대에 책을 신청하실 수 있나요? 박민우의 책을 신청해 주세요. 그렇게 저의 바람에 작은 힘이 되어 주세요. 2019년은 '입 짧은 여행작가의 방콕 한 끼'를 알리고 있어요. 방콕이 인생 여행지가 되고요. 일상이 따뜻해지는 그런 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