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륭아,죽고 싶다니? - 마흔다섯 가장에게 보내는 위로

팍팍한 세상, 같이 조금씩 조금씩 살아보자.

by 박민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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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 열흘 동안 극단적인 선택만 머릿속에 가득했다. 이곳(태국)에서 죽으면 어떻게 집에 돌아가지? 데리고 가려면 힘들겠지? 엄마는 어떻게 될까? 아이들은 어떻게 되지? 모든 게 너무나 걱정이 되어서 아직까지 붙잡고 있었다.


오늘 페이스북에 이런 글을 올렸더라. 방콕 고기뷔페에서 삼겹살 먹은 지 얼마나 됐다고, 이리 풀이 죽은겨? 안 풀려? 화장품 사업이 착착 진행이 안돼? 안 되는 쪽이 훨씬 당연한 거지. 이거 해결하면 저거 터지고, 저거 해결하면, 또 다른 곳이 막히고. 돈은 돈대로 나가고, 가족들만 생각하면 잠은 안 오고. 함부로 위로도 조심스럽긴 하다. 가장의 마음을 내가 어찌 알겠어? 결혼도 안 하고, 나 하나 건사하는 걸로도 허덕이는데. 그래도 제륭아. 96년 8월에 강원도 양구 독립 포대 행정병으로 들어온 제륭아. 너는 모르겠다. 내가 이미 상병이었으니까. 내가 취사병 창고에서 어디다 목을 맬까, 줄을 찾던 이등병 때를 짐작도 못 하겠네.


그래, 너의 선임, 박민우 상병, 혹은 박민우 병장은 이등병 때 목을 매고 싶었어. 지금은 행보관이라고 하지? 우리 때는 인사계라고 불렀던 간부가, 내게 뭘 하냐고 묻더라. 그때 나는 떠나는 포대장의 이임사를 쓰고 있었어. 이등병 박민우는 당황했지. 포대장이 직접 써야 할 이임사를 대신 쓰고 있었으니까.


-포, 포대장님이 이,이임사를 쓰라고 하셨습니다.


사실대로 말은 했지만, 말해도 되나? 더듬게 되더라고.


-너, 이 새끼 다시 말해 봐. 포도대장? 그럼 인사계는 똥싸개냐?


군장을 싸고, 연병장을 돌게 했어. 이상하지? 보통 인사계는 이등병들을 챙기잖아. 탈영이라도 하면 어쩌나? 사고라도 치면 어쩌나? 주로 인사계(행보관)가 챙기거든. 왠 날벼락이냐고. 포도대장이라니? 어리바리 이등병이라, 정말 말이 헛나왔나? 나만 군장을 싼 게 아니야. 우리 분과 전부를 싸게 했어. 막내 이등병 하나 잘못 들어와서, 분대 전체가 군장을 싸고 돈 거지. 그게 끝이 아니야. 나는 행정실에 남아서 여러 간부들의 노리개가 됐지. 돌아가면서 나에게 얼차려를 주더구나. 중사, 하사가 낄낄대면서 말이야. 가방끈 좀 길다는 놈이, 이렇게 멍청할 수가 없어. 이등병 놀려먹는 재미가, 그렇게 고소했나 봐. 혼자 취사실에 가서, 가장 늦게 밥을 먹었어. 군장을 옆에 두고서. 이 식판을 비우고 나면, 내무실로 돌어가야 해. 나 때문에 군장을 싸고, 뺑이를 쳤던 선임들을 봐야 해. 나 때문에 쑥대밭이 된 내무실로 홀로 들어가야 하지. 앞으로 남은 2년이 막막하더라. 낙인찍힌 인간이, 과연 무사히 제대를 할 수 있을까? 당장 내일은? 모레는? 어떻게 견디지? 군장은 영원히 풀어줄 것 같지 않았지. 한 인간이 완벽하게 해체되고, 갈기갈기 찢기는데 딱 하루면 충분했어. 나는 절대로 내무실로 돌아갈 수 없었지. 그래서 밥을 먹고 옆 창고에 들어가서 구석을 찾았지. 어두운 밤, 차가운 벽이 등짝으로 전해지더라. 목을 맬 곳을 찾았어. 그전에 누군가가 자살을 했다는데도, 하나도 안 무서운 거야. 그렇게 겁 많은 내가, 죽음이 아늑하게 느껴지는 거야. 내무실로 들어가느니, 차가운 바다로 뛰어들고 싶더라. 상어 떼가 우글거리면 더 좋고.


그래, 결국 끈도 못 찾았고, 매달 곳도 못 찾았어. 생각만 한 거지. 내무실로 내려왔고, 그때 나를 좀 예뻐라 하는 상병이, 와, 이름도 생각난다. 조진하 상병. 얼마나 고마웠으면, 이십 년 동안 까맣게 잊고 있었던 이름이 대번에 생각나네. 조진하 상병이 나한테 와서는


-인사계가 왜 저러는 거야? 분명 포대장이랑 싸운 것 같은데...


하, 눈물이 왈칵 나더라. 그 전까진 그냥 내가 포도대장이라고 한 등신이라고 생각했어. 누구도 포도대장이라고 부르는 걸 들어본 적도 없어. 이등병은 더더욱 입에 담을 수도 없는 말이기도 하고. 시비를 걸려고 작정한 거지. 그런데도, 그렇게 몰아붙이니까 어느새 나 스스로도 포도대장이라고 부른 것처럼 느껴지는 거야. 하지도 않은 일로 죄가 되고, 죄인임을 받아들이게 되는 거야. 조진하 상병이 그 말을 해주는 순간, 아, 내가 등신이 아닐 수도 있다. 평범해질 수도 있겠다. 희망이 보이는 거야. 그 희망으로 어떻게든 버텨봐야지. 지긋지긋한 2년을 그렇게 견뎠어.


제륭아. 곧잘 이런 상상을 해. 이 삶이 내 의지로 선택한 거라는 상상이야. 너무나 완벽하고, 그래서 무료한 신의 세계에서 너나 나도 신이었지. 인간이 한 번 돼볼까? 이왕이면 안달복달 울고불고, 우습기만 한 인간으로 살아봐? 완벽하고 평온한 삶을 살 거면, 뭐하러 인간으로 태어나? 신의 세계에서, 완벽함이 무료했던 거지. 그래서 우리의 외모, 성격, 팔자까지 신중히 고른 거야. 그게 지금의 삶인 거지. 죽으면, 딱 그때 각성하게 되지, 아, 씨발. 이제 기억나네. 스스로 참전한 게임은 그렇게 막을 내려. 그 전까진 최선을 다해서 안달복달하자. 비참함, 무기력함, 희망, 사랑을 철저하게 다 느껴가면서 말이야. 우린 모두 엄청나게 수고하고, 수고한 후엔 다들 죽어. 죽기 전에 기억을 많이 많이 남기고 가자. 눈에 넣어도 안 아픈 딸들을 더 많이 많이 놀아주고, 안아줘. 방콕에 언제 오니? 오면 밥 먹자. 너를 위해 천 밧 안 쓰고 있다. 맛난 거 먹자.


PS 매일 글을 씁니다. 글쟁이의 작은 오체투지입니다. 가까운 도서관, 학교, 군부대에 박민우의 책을 신청하시게요? 오체투지 할 마음 나네요. 2019년은 '입 짧은 여행작가의 방콕 한 끼'를 알리고 있어요. 9년 머물면서 자주 갔던 방콕의 단골 식당, 카페, 그리고 태국 음식에 대한 이야기를 담았어요. 즐겨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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