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 저 좀 더 잘게요. 늦게 봐요.”
용주는 장례식장 다녀오고, 다음날 아시아나를 탔다. 회사 접대, 공항, 장례식, 다시 공항. 성질이 더러운 애들이 체력이 좋은가 봐. 나라면 여행 포기. 용주는 비싼 타임스퀘어 힐튼 호텔에서 묵는다. 어떻게든 빈대 붙으면, 방값 아낄 수 있다. 장이 안 좋아서 종일 똥만 누는 애다. 비염이 심해서 종일 코만 푸는 애다. 소음에 둔감하기로는 안 꿀리는 나지만, 인체의 소음엔 예민함을 얘를 통해 알게 됐다. 게다가 일행이 있다. 얼굴만 봤던 용주 친구. 보조 침대 하나 더 달라고 해서, 쪽잠 자는 꼴은 눈물부터 난다. 롱아일랜드에서 온 나는, 이제 자유로워져야 한다. 방값 아끼려고 자유를 포기하는 자는, 맨해튼에 머물 자격이 없다. 자유의 여신상이 그러라고 횃불 든 게 아니다.
그러고 보니 용주는 상하이에서도 봤다. 나와 카즈마는 칭다오를 거쳐 상하이에 도착했다. ‘1만 시간 동안의 아시아’가 십 페이지 정도 진행된 시점. 용주는 상하이에 놀러 와 우리에게 밥과 술을 샀다.
“임시 정부 기념관에 가 볼래요?”
용주가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 정부 기념관을 제안했다. 카즈마는 노 프라블럼. 흔쾌히 가겠다고 했다. 일본어, 영어가 원어민 수준인 용주는 카즈마에게 일제의 만행을 조곤조곤 해석해주고, 카즈마는 고개를 수그렸다. 가자, 갈게, 좋냐? 좋아. 이 두 녀석은 어딘가 모르게 기계스럽다. 성질은 더러우나 애국심은 투철한 한국인과 성격 좋고 애국심도 꽤 강한 일본인이 식민지 시대를 복습했다. 카즈마는 좋은 공부가 됐다며, 용주에게 고마워했다. 진심일 것이다. 하지만 뼛속 깊이는 아닐 것이다. 보통의 일본 사람은 역사적 상식이 전무하다. 카즈마는 다르다. 전쟁, 역사에 대한 독서량이 많다. 일본이 한국 근대화에 기여한 면도 있다고 생각한다. 종종 목소리를 높이며 논쟁을 벌였다. 아는 게 많은 놈이라서, 승기를 잡기가 쉽지 않았다. 내가 카즈마로 태어났다면, 박민우만큼 일본에 분노할 수 있을까? 자신의 국적, 배움, 이해관계에서 자유로워져서 세상을 바라볼 수 있을까? 미국의 젊은이들은 트럼프 대통령이 치욕스럽다. 우리에게 트럼프는 남북 화해의 수호신이다. 미국 젊은이들이 생각하는 정의에서 우린 한참 벗어나 있다. 그날은 상하이에 있는 요시노야에서 규동을 먹고, 유니클로에 들른 날이기도 했다. 용주가 규동을 제일 맛있게 먹었다. 용주에게 망설임이란 게 있을까? 확실한 건 소신이 먼저. 눈치는 개나 줘 버려. 이것저것 눈치 보면, 속만 터진. 크게 될 아이다. 싸가지도 힘. 진심이다.
저녁밥을 먹겠다. 뉴욕 최초의 한 끼다. 집 앞 두 블록 정도만 걷기로 한다. 한 흑인 남자가 공중전화 수화기를 들고, 시원하게 소변을 본다. 머리통은 작고, 소변의 양은 많다. 살찐 쥐 두 마리가 내 앞으로 가로지른다. 뉴욕 사람이라고 쥐가 안 무섭겠어? 지나치게 태연한 것도 위선. 나는 뒷걸음질 친다. 쥐들의 영양 상태는 좋아 보인다. 뉴욕 지하철은 훨씬 더럽다던데, 더러워서 보고 싶다. 더러움의 흥행성을 인도에서 알았다. 쓰레기통이 어디에나 있다. 분리수거 없다. 텀블러를 들고 다니는 세련된 뉴요커가 드물다. 환경에 철저한 선진국 사람. 고정관념이 깨진다. 물을 사려고 상점에 들렀다. 수염이 긴 백인 남자가 혼잣말을 한다. 옷은 지저분하고, 수염은 말라비틀어졌다. 나에게 다가오는 것 같아 섬뜩했지만, 지나친다. 땅콩 잼 있어요? 가게 주인에게 묻는다. 마약이나 술에 찌들었다고 생각되는 사람도 굉장히 멀쩡한 사람일 수 있다. 상점 문 앞에서 두 명의 남녀가 얼굴까지 이불을 덮고 잔다. 경찰이 그렇게 많은데, 자게 놔둔다. 발아래, 머리맡 총 두 개의 트렁크가 있다. 살림의 전부. 곁에 놓인 두 개의 1회용 접시에 샌드위치와 과일이 소복하다. 과일은 딸기와 블루베리, 블랙베리다. 음식을 놔둔 사람이 보고 싶다. 둘은 여행자다. 집이 있었건, 없었건, 직업이 있었건, 없었건 그들은 여행자다. 나보다 더 가난하지만, 더 자유로운 채로 세상과 만난다. 아쉽지 않은 자들은 평생 모를 이웃들이, 그들에게 다가간다. 한 여자가 신호를 무시하고 건너고, 차는 그 여자 때문에 서행한다. 경적을 울리진 않는다. 여자는 헤드셋을 쓰고 있다. 음악을 크게 듣는 여자다. 대체로 신호를 지키지 않고, 보통의 차들은 사람을 봐가며 운전한다. 경적도 마음껏 울리는 편이다. 맨해튼의 소음은 서울의 1.5배. 도시가 고향인 내 심장이 벌렁댄다.
흑인, 백인, 동양인, 인도인, 중동 사람이 골고루 섞여서 걷는다. 백인이 생각보다 적다. 영어, 스페인어, 중국어, 한국어, 이탈리아어, 미얀마 어, 태국어 등이 공중에 떠다닌다. 거리에선 사이렌 소리가 끊이질 않는다. 대형 화제가 났거나, 응급환자다. 맨해튼은 화재가 잦고, 위급한 사람이 많다. 첫 끼니는 제대로 먹겠어. 수중에는 200달러가 있다. 결국엔 서브웨이에서 샌드위치를 먹는다. 수중에 200달러뿐이니까. 서브웨이보다 비싼 한 끼는 큰 용기가 필요하다. 뉴욕의 9번가는 예쁘지 않다. 즉, 기가 죽을 필요가 없다. 따라서 나는 차분하고, 여유롭다.
모처럼 마스크팩을 하고, 머리에 젤도 바른다. 세재 냄새가 가득한 셔츠를 고른다. 늘 입는 오렌지색 재킷을 걸친다. 내겐 거지 같아도, 뉴요커에겐 멋져 보이겠지. 나는 뉴욕의 완전한 새로움이다. 용주와는 이십 대를 함께 했다. 뉴욕 9번가에서 8번가로 가면 나의 이십 대가 처자고 있다. 15분 거리지만, 13분 만에 닿을 것이다. 힐튼호텔이 있는 8번가로 들어서면 느닷없이 본격적이다. 예고편 없이, 클라이맥스다. 인공태양이라도 달아 놓은 걸까? 초대형 광고판들이 빌딩의 허리에서 춤을 춘다. 카메라의 플래시가 조금도 필요치 않은 밤 열 시 반이라니. 세계에서 가장 비싼 전광판이 도배된 곳에서 나는, 당황한다. 타임스퀘어. 이미 알고 있는 곳. 하지만 몰랐다. 이렇게 밝다니. 직접 봐야만 알 수 있는, 완벽한 밝음. 지구의 모든 돈이 몰리는 뉴욕, LG전자가, 삼성 전자가, H&M이, 나이키가 세상 돈을 쓸어 담고자 한다. 모든 권태가 이곳에서 각성하고, 이곳에서 사라진다. 가혹한 시각적 충격으로, 니의 시상하부 곳곳이 얼얼하다. 지구와 지구 아닌 것의 경계. 타임스퀘어는 나의 피로와 나의 상식을 모두 제압했다. 과장할 필요가 없는 유일한 과장. 더 이상은 없다. 맨해튼은 모든 문학적 함축이 제거된, 사실 그대로의 모습으로 찬란했다.
맨해튼의 전광판 아래서, 한 남자가 죽어 있었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다.
PS 매일 글을 씁니다. 작은 오체투지입니다. 여러분께 다가가고 싶어서, 심심한 오체투지를 해요. 조금만 가까이 와주세요. 박민우의 책들을 도서관, 학교, 군부대에 신청해 주시면, 저는 신나서 쌀국수를 두 그릇 먹을 겁니다. 2019년은 '입 짧은 여행작가의 방콕 한 끼'를 알리고 있어요. 9년간 머물면서 알게 된 방콕 맛집, 카페, 태국 음식 이야기를 소소하게 담았어요. 즐겨 주실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