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프렌즈가 제일 재밌더라.
기차가 간다. 선생님은 내 모습이 안 보일 때까지 손을 흔드시겠지. 사모님도 집 마당에서 열심히 손을 흔드셨다. 성민이는 밤에 도착. 일부러 서두른다. 나는 성민이와 마주하는 게 불편하다.
-친구가 지금 뉴욕에 와 있어요. 성민이 얼굴도 못 보고 가네요. 한국에서 봐도 되니까요.
사족 같지만, 마치 누군가를 불평하는 걸로 읽히기를 원하지 않는다. 한 남자가 눈알을 굴리며 눈치 본 이야기다. 좋았던 이야기는 쏙 뺐다. 선생님이 양념에 하루를 꼬박 재운 닭고기는 인생 바비큐였고, 양파 장아찌, 고추 장아찌는 태어나서 더 맛난 걸 먹어본 적 없다. 코리아 타운 파리 바게트에서 팥빵을 아이처럼 맛있게 드셨다. 파리바게트에서도 한사코 못 내게 하셔서, 정말 힘들게 돈을 냈다. 내가 요리를 해 보겠습니다. 사모님을 식탁에 앉히고, 내가 나서기도 했다. 일본 카레, 하우스(House) 브랜드 매운맛에 닭고기, 감자, 당근을 넣고 끓였다. 독일제 냄비가 너무 좋아서인지, 졸아들지가 않았다. 사모님이 고형 카레를 한 봉 더 뜯어서 절반을 풍덩 넣으셨다. 짜면 어쩌지? 결국 일본에도 없는 최고의 카레가 됐다. 선생님 부부는 여러 번 맛있다 하셨고, 그날 밤은 빛나는 사소함으로 반짝였다. 마지막 500달러가 사라졌다. 내가 계산을 잘못한 거지. 있지도 않았던 500달러였을 것이다. 갑자기 마음이 너무 가난해져서, 씨티은행을 찾아다녔다. 당장 현금 천오백 달러가 필요하다. 뉴욕 맨해튼의 방값이다. 20일에 1,500달러(170만 원). 엄청난 돈이다. 뉴욕은 게스트 하우스 도미토리도 70달러(8만 원)다. 전 재산의 삼분의 일이 방값으로 썰려 나간다. 샌프란시스코에서도 2주간 머물러야 한다. 뉴욕에서 밥값, 샌프란시스코 비행기 값, 방값, 밥값을 남은 돈으로 해결해야 한다. 샌프란시스코 물가는 뉴욕보다 더 비싸다. 500달러를 어디다 잃어버렸을까? 미련을 못 버리겠다. 너무 많은 돈이 한꺼번에 나가고, 너무 큰돈을 착각했다. 겉옷 없이 시베리아에 내동댕이쳐진 기분이다. 못 뛰어내릴 높이에서 뛰어내려야 한다. 이번 여행은, 무모하고 무모하다. 당장은 두렵고, 괴롭다.
맨해튼까지는 기차로 간다. 짙은 화장, 문신, 피어싱 승객이 자리, 자리에 뒤섞여 있다. 뉴욕에 살거나, 뉴욕에 가는 사람들. 양아치 같지만, 착한 사람들일 것이다. 뉴욕에서 놀아야 논 거지. 촌스러운 불나방들이 주말을 불사르려고 맨해튼으로 향한다. 수중엔 2000달러(228만 원)가 있다. 맨해튼은 어쨌든 처음. 나만 모르는 위험을 경계한다. 내가 내리는 역이 소매치기의 온상이거나(로마의 떼르미니 역처럼), 현금을 지갑에 넣고 다니는 유일한 바보일 수도 있다. 맨해튼에서 현금을 지갑에 넣고 다녔다고요? 한심해하는 경찰과 마주하고, 잃어버린 2000달러 조서를 쓰고 싶지 않다.
뉴욕에서도 가장 비싼 맨해튼에 방을 얻었다. 일단 선택권이 없었다. 추석 연휴에 모두 뉴욕에만 오는지 한국 민박집들은 동이 났다. 최소 5박을 예약하세요. 민박집만 모아 놓은 사이트는 다섯 밤을 한꺼번에 요구했다. 게스트하우스 역시 마찬가지였다. 빈방, 아니 도미토리의 빈 침대 하나가 없었다. 세계 1등 나라 미국, 미국 제1의 도시 뉴욕, 뉴욕 최고의 번화가 맨해튼, 맨해튼의 주말, 게다가 한국인에겐 추석. 목요일에 금요일 뉴욕 방을 찾는 머저리는 나뿐이었다. 어쨌든 나는 떠야 한다. 뜨고 싶다. 방도 없이 뉴욕 다운타운을 떠돌면, 나는 죽는다. 마약에 찌든 사내가 내 목을 조르며, 안구 혈관을 모두 터뜨릴 것이다. 나는 아랫입술을 씹으며, 에어비엔비, 아고다, 호스텔 월드를 뒤적였다. 헤이코리아(Heykorea)라는 사이트도 샅샅이 뒤졌다. 미국 교포 사이트다.
“장기로 머물려고 빌려 놓은 방이에요. 부모님이 갑자기 아프셔서 싸게 내놔요.”
눈이 번쩍 뜨였다. 카톡을 날린다.
“가격 흥정 가능할까요?”
“안돼요. 원래는 2천 달러였어요. 더는 못 깎아드려요. 지금 공항으로 가요. 어떻게 하실래요?”
순진한 사람이다. 공항으로 간다는 패를 다 보여준다. 비행기를 탈 때까지 방은 안 나갈 것이다. 천 달러밖에 없어요. 배짱을 부리면, 깎아줄 것이다. 깎아줄 수밖에 없다.
“알겠어요. 돈은 어떻게 지불하면 되죠?”
“직접 집주인한테 주세요. 한국인이고, 좋은 분이세요. 그분이 제 계좌로 부쳐줄 거예요. 방은 정말 좋아요.”
깎지 않기로 한다. 부모님이 아프시다잖아. 1,500달러. 170만 원.
“아뇨, 아뇨. 정확히 오시는 시간을 말씀하셔야죠.”
이번엔 집주인이다. 네 시부터 다섯 시 사이에 갈게요. 했더니 정확히 시간을 지정하란다.
“다섯 시까지 갈게요.”
펜실베이니아 기차역에서 걸어서 13분 거리. 굉장한 위치다. 돈값을 하는 방이야. 구글맵이 가라는 대로 간다. 아이폰을 들고, 한 손으로는 캐리어를 든다. 소매치기야, 달려들려면 지금 달려들어. 첫 10분. 세상에서 가장 비싼 10분. 맨해튼이다. 촌놈 박민우가 세계 모든 도시의 왕에 첫발을 내딛는다. 모든 움직임이, 소리가, 냄새가 오직 한 남자의 의식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웅장한 빌딩들이 나를 빨아들인다. 너무 높고, 빽빽하다. 상하이에서도, 홍콩에서도, 도쿄에서도 못 느꼈던 거대함이, 삽시간에 나를 흡수한다. 이 많은 사람들이 갈 곳이 있다는 게 놀랍다. 그들의 발자국 사이로, 내 발자국을 더한다. 서울에서 태어난 나는, 빌딩에게서 고향을 느낀다. 하수구에서 뿜어 나오는 엄청난 수증기가 따뜻하다. 흑사병의 잔잔한 기운이 따뜻하게 데워져서 비위를 건드린다. 무수한 쥐새끼가 지하의 수로를 뛰어다니겠지. 수백 년간 쥐의 오줌이 천천히 번져간 도시라서, 구석구석 꾀죄죄하다.
“방 계약하신 분이시죠?”
벙거지 모자에 안경을 쓴 남자가 건물 앞에 서있다.
“잠시만요!”
건물 안으로 사라진다. 5층의 칙칙한 붉은 건물이다. 1층에 이발소와 인도 음식점과 파니니(이탈리아 샌드위치) 가게가 있다. jonny's panini라고 쓰여 있다. johny가 아니다. h가 빠져있다. 이탈리아의 조니는 h가 없나? 쓸데없는 생각을 해야 시간이 간다. 인도 음식점은 지하가 창고다. 하수구처럼 생긴 철문을 열고, 인도 남자가 올라온다. 커다란 꾸러미를 짊어지고 있다. 나는 그를 보고, 그는 나를 보지 않는다. 레이철, 로스, 챈들러, 모니카, 조이, 피비. 미국 시트콤 프렌즈는 내 인생 드라마다. 뉴욕에 사는 젊은 남녀의 빤한 이야기. 이야기가 시시해도 그냥 좋았다. 시시해서 좋았다. 그들이 살았을 것만 같은 건물이다. 내 앞의 모든 풍경이 익숙하고, 당연하다. 15분을 기다렸다. 그는 방청소를 하고 있다. 침대 시트를 갈고 있겠지. 집을 통째로 빌려서 월세로, 전세로 되파는 사람. 런던에서 지낼 때 한국 친구들도 그렇게 먹고살았다. 모자 남자는 전 사람이 썼던 흔적을 서둘러 지우고 있다. 제때 오라더니. 짜증이 난다. 손으로 만져지는 2000달러의 촉감에 안도한다.
“죄송해요. 오래 기다리셨죠? 들어오세요.”
엘리베이터는 없다. 5층까지 무거운 트렁크를 끈다. 힘들지만, 하나도 힘들지 않다. 5층 D호 집. 한 층에 A, B, C, D 네 가구가 살고, 가구마다 방은 두 개. 내 방은 큰 방. 170만 원짜리 방에선 창밖으로 껑충한 나무가 보인다. 새들이 앉아있다. 책상에 앉기만 하면, 새들이 가지를 옮겨 다닐 것이다. 좋은 방이다. 화려하지 않고, 깨끗하지 않고, 침대 시트는 빨간색이다. 하지만 밝다. 계약서에 사인을 하고, 천오백 달러를 건넨다. 보증금으로 300달러를 더 내란다. 몰랐다. 낸다. 순식간에 1,800달러가 나갔다. 홀가분해진다. 사라지면 차라리 아무것도 아니다.
“자다가 이제 일어났어요. 우리 어디서 봐요?”
용주 메시지다. 타임 스퀘어 힐튼 호텔에서 지금 일어났다. 아무런 거짓 없이 뉴욕이다. 맨해튼이다.
진짜 여행이 기다린다.
PS 매일 글을 씁니다. 작은 오체투지로 봐주세요. 세상 끝까지 닿고 싶어서요. 혹시 도서관에 자주 가세요? 도서관에, 학교에, 군부대에 박민우의 책들을 소개해 주세요. 모두 좋은 책이고, 재미있습니다. 2019년은 '입 짧은 여행작가의 방콕 한 끼'를 알리고 있어요. 9년간 방콕에 머물면서 애정 듬뿍 쏟았던 맛집, 카페, 태국 음식에 대한 이야기니까요. 가벼운 마음으로 즐겨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