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이리 안절부절인 걸까?
-형! 나, 22일 뉴욕 도착.
용주(이 놈도 본명 쓰지 말란다)는 대학교 후배다. 전공은 다른데, 내 인생 가장 오래, 많이 어울렸다. 20년 넘게 꾸준히 가깝다. 몇 달간 안 본적은 여러 번, 몇 년간 안 본 적도 있다. 전적으로 이 놈, 이 새끼, 이 자식 탓이다. 말을 정말 싸가지 없이 내뱉는다. 선을 넘어, 그냥.
-형이 뭘 안다고 그래. 형은, 그러니까 안 되는 거야, 형 코털 나왔어. 코딱지 보여. 코 풀고 오세요. 이에 고춧가루 끼었어요.
불법 주차된 차들은 그 자리에서 신고한다. 술집에서 나와 운전대를 잡는 사람이 보여도 신고한다. 세상엔 멍청하고, 이기적인 운전자뿐이다. 이런 새끼와 왜 어울릴까(정의의 사도지만 뭔가 불편하다)? 내게 아이폰을 꼬박꼬박 준다. 새 거는 아니고, 구형을 준다. 바로 직전 모델은 아니고, 전전전 모델 정도를 준다. 나랑 연락이 안 돼서 짜증 난다며 줬다. 그럴 거면 통신비도 내주든지. 스마트폰이, 인스타그램이 이렇게 사악한 건 줄 이 자식은 알았다. 나는 아이폰의 노예가 됐고, 이놈은 뜸 들이며 아이폰을 바꿔준다. 코털이나 고춧가루는 사실 고마운 지적이어서, 감사하며 거울 한 번 본다. 모욕감을 느끼는 동시에 감사하다. 길들여졌다. 메릴린치, 모건 스탠리, HSBC, 도이체 방크 같은 곳에서 일했다. 억대 연봉자고, 청담동에 산다. 어릴 때부터 잘 살았다. 애가 먹고 싶으면 언제든지 먹이세요. 어머니가 학교 앞 분식집에 미리 돈을 낸다. 먹고 싶을 때 먹으면 그게 떡볶이일까? 내겐 전설보다 더 믿기지 않는 일화다. 미아리에서 가난하게 자란 나와는 마흔 넘어서까지 결혼을 안 했다는 공통점뿐이다. 추석 연휴에 뉴욕으로 온다. 나 보려고 오는 거지. 거칠고, 싸가지 없는데 밑바탕에 흐르는 나에 대한 호감이 읽힌다. 내 책이 나오면 수백 권씩 산다. 주위에 돌린다. 나를 길들이는 법을 안다. 나쁜 새끼. 용주와 내내 뉴욕에서 어울릴 마음은 없었다. 나는 햄튼의 고급 별장에서 노닥거리며, 윌 스미스를 만나야 한다.
-형, 친구 아버지가 사고로 갑자기 돌아가셨어. 못 갈 것 같아.
사모님, 선생님과 병원으로 향하는 중이었다. 용주는 인천공항에서 장례식장으로 향했다. 사모님은 방광이 좋지 않다. 종기는 종기대로, 방광은 방광대로, 혈압은 혈압대로 고치고, 망가지고 한다. 쌩쌩한 몸뚱이로 사는 건 한 때. 고쳐도, 고쳐도 어딘가가 또 탈 나기 마련. 이리 고치다, 저리 고치다, 도저히 손 쓸 수 없을 때가, 세상과 이별하는 때. 사모님은 건강하게 오래 사셨으면 한다. 나로 한정하자면, 미련 없고 싶다. 둑이 이러 터지고, 저리 터지고, 무너지는 그때 홀가분하게 안녕할 수 있는 마음. 준비하고 싶다. 나의 마지막, 마지막의 마지막 한 달이 궁금하다. 롱아일랜드 초밥왕(이 지역 최고 초밥집의 사장님이자 셰프셨다) 선생님은 솜씨를 발휘하셨다. 아보카도가 들어간 캘리포니아 롤이 찬합에 예쁘게 채워졌다. 병원 길이 소풍길이 됐다. 음악다방에서 선생님은 사모님을 처음 만났다. 선생님은 음악다방 DJ였다. 경기고, 서울대, 외무고시를 막힘없이 뚫었던 남자는 음악다방 DJ이기도 했다. 얼마나 많은 아가씨들이 마음을 졸였을까? 서울대 DJ는 브라더스 포(Brothers for)의 그린필드를 튼다. 한국 전쟁으로 폐허가 된 서울. 청춘들의 비등점은 낮아서, 쉽게도 끓어오른다. 방광염이라든지, 고혈압이 가당치도 않은 예쁜 여대생 아가씨가 붉어진 얼굴로 큰 눈을 깜빡인다. 도요타 SUV 안은 흑백영화가 된다. 색이 약간 검어진 아보카도 롤을 입에 넣는다. 이 아보카도 롤은 맛있으면서 불편하다. 밖에서 먹는 음식은 지겨워. 선생님의 말씀은 맞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편하다. 한 푼이라도 허투루 쓰지 않으려는 마음이 읽혀서다. 성민이는 정원 흙을 파고 나무를 옮겼으며, 뉴욕 맨해튼 큰 딸이 사는 트라이베카에서도 지냈다. 성민이에 관한 이야기는 늘 집중해서 듣는다. 나는 열심히 성민이를 칭찬한다. 들키기 싫어, 마음에 없는 칭찬을 하는 바보짓을 내가 한다. 성민이보다 사랑받고 싶은 걸까? 아니다. 성민이가 사랑받고 싶어 한다. 성민이는 원하는 마음을 얻기 위해, 자신의 전부를 썼다. 나는 그럴 마음이 없다. 내겐 부모님이 있고, 이분들은 딸이 있다. 아름다운 거리감이,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사모님은 내가 성민이처럼 던지길 바란다. 느껴진다. 나도 성민이처럼 땅을 팔 수 있을까? 나무를 옮길 수 있을까? 나는 일을 못 한다. 못 한다니까 못 하는 거지. 하려고만 마음먹으면 왜 못 해? 백 번 맞는 말이다. 강원도 양구에서 나는 서강대 다니는 후임과 한조가 되어 배수로를 팠다. 군인 대부분 그딴 일을 한다. 총알을 쏘거나, 대포를 발사하는 건 아주 가끔. 부대에서 가방끈이 가장 긴 우리 둘은, 한조가 됐다. 우린 누구보다 열심히 곡괭이질을 하고, 평균의 절반도 파지 못했다. 우리의 땀은 평균의 두 배였다. 병신, 뺀질이, 고문관. 군대에서 들어야 했던 모든 모욕은, 나를 짓눌렀다. 씩씩하게 두 팔 걷어 부치는 게, 내겐 어려운 일이 됐다. 나를 내던질 마음도 없으면서, 마음까지 편하고자 하다니. 도둑 심보가 지금의 불편함이다.
-박 작가 친구들도 미국 오면 롱아일랜드 들리라고 해요. 우리 집에 방 많으니까. 박 작가가 봐도 롱아일랜드 너무 좋지요?
-저는 남편과 달라요. 사람 거두는 건 쉬운 거 아니에요.
사모님이 잘랐다. 사모님 말씀이 전적으로 옳다. 사람은 쉽게 거둬지는 게 아니다. 일상의 침묵과 송두리째 다를지 모를 가치관도 받아들여야 한다. 불필요하게 배려하고, 배려함으로 피로하고, 자신도 모르게 바닥을 드러내고, 상처로 어색해져야 한다. 그 과정을 모두 거치고서도 여전히 이어져 있다면, 그게 인연이다. 우린 그런 과정이 아직 없다. 나 들으라고 하는 말이 아니라, 내가 편해서 진심을 드러내신 거다. 선생님은 사람이 그립다. 음악다방 DJ는 지금도 음악을 틀 준비가 돼있다.
“보스턴에 가 보려고요. 친구가 마침 뉴욕으로 온대요. 같이 가자네요.”
보스턴으로 뜨는 건 용주의 계획이었다. 용주는 오지 못한다. 나는 거짓말이 필요하다.
“박 작가 보스턴은 정말 아름다운 곳이야. 내 두 딸도, 거기서 공부했어요. 꼭 가 봐요.”
선생님의 눈동자에 보스턴이 일렁인다. 보스턴이 좋은지는 관심 없다. 롱아일랜드가 아닌 곳이었으면 한다. 누구보다 절실하게
PS 매일 글을 써요. 작은 오체투지입니다. 지구 끝까지 닿고 싶은 바람이 있어요. 가까운 도서관, 학교, 군부대에 박민우의 책들을 신청해 주시면 무지 감사하겠습니다. 2019년은 '입 짧은 여행작가의 방콕 한 끼'를 알리고 있어요. 9년간 머물면서 애정했던 맛집, 음식 이야기입니다. 소소하게 즐겨 주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