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으로 여행 잘하시고, 한국에서 봐요. 어제 갑자기 공손해져서, 안녕했잖아. 혼자서 베이글 하나 맘 편히 못 먹겠다니까. 한 번 더 보고 싶다니까 가긴 가겠는데, 메시지 받자마자 양말부터 신지 않았다. 야호, 밥 한 끼 값 굳었다. 그러면서 좋아하지 않았어. 정말 안 그랬어. 형, 그런 사람 아니야. 형 한 번 더 밥 먹이면, 네 마음 편한 거 알지. 형, 거지 아니야. 거지처럼 산다고 거지면, 미친개처럼 짖어대는 너는 개니? 형 유튜브 하면 대박 날 거예요. 형, 형이 쓴 책 읽어볼게요. 형, 한국에 오시면요. 제가 맛집 모시겠습니다. 시응이는 왜 이리 말이 많아졌어? 일주일 같이 돌아다녔다고 가족 아니다. 친구 아니다. 여행이 그렇더라. 종일 돌아만 다닌 건데, 남이라고는 말할 수 없는 사이가 되더라. 떠올리게 되더라. 잘 살 거고, 못 살아도 내 탓 아니지만, 잘 사는지 알고 싶어지더라. 형이 시킨 주스를 네가 한 번 마셨잖아. 맛있어요? 마셔 봐도 돼요? 서로의 접시가 아득히 멀었던 때가 불과 일주일 전이었지. 이젠 네가 내 주스를 마셔. 너야 전자레인지에 철사를 넣는 멍청이라서 잘 모르겠지만, 우주의 파장이 그렇게 방향을 틀었어. 끝없이 서로 영향을 미치게 돼. 그냥도 이렇게 날 좋아하는데, 내 책까지 읽고 나면 스토커가 되겠구먼. 내 책 백 권 사서 친구들한테 돌리면 1일 스토커 권 끊어줄게.
이제 비행기 타요. 한국에서 봐요. 영영 못 만날 것처럼 몇 번을 말해. 촌스러운 것들. 너희들 덕이야. 돈 많이 아꼈어. 이렇게 빨리 롱아일랜드를 벗어날 줄 몰랐거든. 열흘 정도는 공짜로 먹고, 잘 줄 알았지.
Perk kafe가 있는 허드슨 강 쪽으로 걷는다. 바둑판처럼 가로, 세로. 뉴욕에선 길 헤매는 건 철사를 전자레인지에 넣은 시응이도 불가능하다. 길치를 위한 도시. Perk이란 이름 때문에 간다. 미국 드라마 프렌즈의 주인공 아지트가 Central perk였다. central park에서 a만 e로 바꿨다. 말장난인 건 맞는데, Perk엔 커피가 끓다란 뜻도 있다. 좀 놀랐다. 드라마 세트장이라 실제로 central perk 카페는 없다. 그깟 드라마가 뭐라고 유난일까? 런던에 어학연수를 갔을 때, 프렌즈 CD를 가져갔다. 거금 들여서 샀다. 열심히 보면 귀도 좀 뚫리겠지. 술 퍼마시면 신기하게도 들렸다. 챈들러가, 모니카가, 레이철이 정말 내 옆에서 종알종알. 와, 다 알아듣겠어. 왜, 술이 깨면 다시 영어가 되는 거니? Perk kafe는 상수동 어디에나 있을 법한, 아니 상수동, 망원동 어느 카페보다 못한 카페였다. 테이블 하나에 모두 다닥다닥, 심각한 표정뿐이다. 어깨가 닿을 듯 앉아서 노트북을 켠다. 허접해도 뉴욕이니까 킨포크. 야, 내 레노보, 출세했다. 그래, 여기가 맨해튼이야. 애플 맥북만 오는 곳인데, 내가 너 데리고 왔어. 싸구려 신경 안 쓰며 살았지만, 배터리는 좀 버텨라. 전원만 없으면 왜 시체가 되니? 너, 노트북이야. 데스크톱 아니고.
“형, 성민이예요. 어디세요? 저도 지금 뉴욕 시내거든요.”
롱아일랜드 성민(가명)이다. 롱아일랜드에만 있을 줄 줄 알았다. 걸어서도 닿을 수 있는 거리다.
“지금 친구들이랑 있어. 미안해. 한국에서 보자.”
내 앞의 라테를 한참 봤다. 거짓말쟁이. 성민이와 인연은 10년이 넘었다. 나이 먹으면서 남은 인연은 귀하다. 성민이는 탈락. 성민이는 사람 욕심이 많다. 나를 통해 알게 된 이들에게도 다음날부터 열심히 카톡을 날린다. 초반에 내게도 참 열심이었다. 부담스러워하는 이들도 있었다. 사람 욕심, 예쁜 마음이다. 성민이가 좀 서두를 뿐이지, 사람 다 비슷하다.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일부러는 아니고, 방콕에 머물면서 자연스럽게 뜸해졌다. 뉴욕에 오기 전, 선생님은 성민이 이야기를 여러 번 하셨다. 연락이라도 한 번 하길 바라셨다. 선생님께 연락처를 받고, 전화를 했다. 안 받았다. 잘못된 번호인가? 카톡으로 자연스럽게 연동이 된다. 잘못된 번호는 아니다. 카톡에 메시지를 남겼다. 안녕, 민우형이야. 잘 지냈어? 오랜만이다. 롱아일랜드에 가게 됐어. 선생님 필요한 게 뭘까? 뭘 사가야 할까? 답이 없었다. 카톡 1은 사라졌다. 문자는 봤지만, 답하고 싶지 않은 마음. 걱정이 됐다. 상황이 안 좋으면 피하고만 싶은 거니까. 떠나기 전전날 연락이 왔다. 바빠서 답을 못 했어요. 죄송해요. 추석 때 저도 롱아일랜드 가요. 어머니, 아버지 봐야죠. 그때 봐요. 몇 년 만에 연락한 형을 열흘간 씹다니. 대담해. 나를 너무 착하게 봤다. 선생님을 아버지라 부르며 지금도 일주일에 세 번은 문안 전화를 드린다는 걸 몰랐다면, 좀 더 너그러웠을 것이다. 막상 얼굴을 보면 아무것도 아닌 일이 된다. 성민이 어머님이 2년 전에 돌아가셨고, 아버지도 편찮으시다. 성민이에겐 내내 가혹한 시간이었다. 여유롭게 동생을 마주하기엔, 오늘 내가 너무 못 생겼다. Perk kafe는 화장실 거울부터 바꿀 것. 불편하고 싶다. 그래서 피하는 것일 뿐. 그래서 거짓말을 했다. 미국이라는 먼 나라에서, 코앞의 아이를, 그렇게 피했다. 여러 이유로 사람을 피한다. 그걸 너무 많이 해서, 남은 사람이 몇 없다. 도덕적으로 내가 우위다. 자신 있다. 나는 괴물이 되어간다. 외롭게 늙는 형벌이 나를 기다린다.
용주와 매일 만찬이었다. 그런데 맛있는 걸 또 먹고 싶다. 주머니에 있는 돈을 만지작만지작. 내 머릿속엔 늘 통장 잔액이 입력되어 있다. 돈 생각하지 말자. 정기 구독 서비스를 어서 시작해야지. 일기를 서둘러 쓰자. 공지도 안 했다. 미리 알렸어야지. 그것조차 할 시간이 없었어? 연재하면서 구독신청을 받으면 몇 명이나 읽을까? 구독료가 절실하다. 내가 원하는 상황이다. 0으로 간다. 260만 원 정도가 수중에 있다. 샌프란시스코로 곧 간다. 방값으로 백만 원 정도가 나갈 것이다. 하루 5만 원 정도를 쓸 수 있다. 지금까지 여행 중 가장 넉넉한 예산이다. 비슷하게 써본 적도 없다. 물가 비싼 미국이지만, 라면 끓여먹으면 되지. 2 bros 1달러 피자는 어마어마하게 크다. 맛있기조차 하다. 여러분 대신, 제가 먹어드리겠습니다. 어서 신청하세요. 장난처럼 꺼낸 말에, 돈부터 보내주신 독자들이 있다. 뉴욕의 맛집에서 랍스터를 먹어 주세요. 쉑쉑 버거를 먹어 주세요. 나 좋으라고 벌인 일이다. 260만 원 중 50만 원이 그런 돈이다. 이젠 그 돈이 아깝다. 원래부터 내 돈인 것만 같다. 랍스터를 먹고, 쉑쉑 버거를 먹어야 한다. 돈의 힘이 이토록 세다. 놀아나고 있다. 지금까지 용주에게 얻어먹고, 얻어 잤는데도 벌써 벼랑 끝이다. 뉴욕에 오기 위해서 누구보다 열심히 살았다. 내일이 겁 안 나는 오늘, 딱 하루도 불가능한 건가?
휴우우우우
천천히. 엉겨있는 실을 푼다. 흐으으읍. 숨을 깊이 빨아들인다. 휴우우우. 깊이 내쉰다. 열한 살의 나. 송천 국민학교 4학년 6반. 그 아이가 타임머신을 타고 나를 찾아온다. 여기가 어디예요? 미국이요? 뉴욕이요? 영어 할 줄 알아요? 끄덕끄덕. 비행기도 타봤어요? 끄덕끄덕. 다른 나라도 가봤어요? 끄덕끄덕. 미아리 촌구석 볼 빨간 아이는, 미래의 나를 보고 펑펑 운다. 미래의 나는 대학도 나왔다. 삼촌, 이모 통 틀어서 대학생은 딱 한 명. 그 어려운 대학생도 되다니. 모두가 다 배우처럼 생긴 서양 사람들에게 말을 걸다니. 1982년 가을 아이의 손등과 볼은 핏자국이 남았다. 살이 잘 트는, 콧물이 잘 흐르는 아이, 4학년 6반 박민우. 담임 선생님 김영전. 선생님, 저는 한국이 아니라 미국에 살아요. 햄버거도 먹고, 스테이크도 먹어요. 사립 영훈 국민학교 다니는 애들도 못 가본 미국에서요. 선생님, 그러니까 조금만 따뜻한 눈으로 봐주세요. 칭찬 좀 해 주세요. 크리스마스가 한참 남은 지루한 가을, 운동장의 코딱지 아이는 히죽거린다. 하루라도 빨리 늙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미래의 내가, 마흔여섯 살의 내가 눈물 나게 기쁘다.
그리고 Essen 카페테리아에서. 나는 도둑질을 한다.
처
PS 매일 글을 씁니다. 작은 오체투지로 봐 주세요. 지구 끝까지 닿기를 바랍니다. 우린 모두 연결되어 있으니까요. 가까운 도서관, 학교, 군부대에 박민우의 책들을 신청해 주실래요? 정의 오체투지가 외롭지 않겠군요. 2019년은 '입 짧은 여행작가의 방콕 한 끼'를 알리고 있어요. 9년간 방콕에 머물면서 자주 갔던 단골집, 카페, 태국 음식에 대한 이야기니까요. 재밌는 구석, 유용한 구석이 있을 거예요. 즐겨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