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싸가지가 살짝 자랑스럽다. 아, 자존심 상해
욕조와 욕실 바닥에 자잘한 유리 파편이 하나, 둘, 셋... 총 여섯 개. 그래서 다들 샤워도 못하고 잤다. 유리 파편을 쓰레기통에 넣고, 욕조로 들어간다. 욕조에만 샤워기가 있다. 수온 조절이 안 되는 샤워기다. 밸브는 하나. 시계 반대방향으로 돌린다. 구십 도를 넘어가는 지점, 물이 뜨거워진다. 잠근다. 잠깐 적신 몸에 샤워젤을 문지른다. 일단 찬물로 씻는다. 비누기가 대부분 사라졌다. 더운물 쪽으로 밸브를 더 돌린다. 십 초 안에 남은 비누 기를 털어내야 한다. 10초 후면 컵라면용 끓는 물이 콸콸콸. 열심히 팔을 움직이면, 7초 안에 끝낼 수 있다. 하루 50만 원 욕실 꼬락서니가 이게 뭐냐고? 이쁘기만 한 쓰레기 집.
아이폰을 들고, 450m 떨어진 스타벅스로 향한다. 빗방울이 안개처럼 자잘하다. 바람이 한 여자의 우산을 뒤집어 놓는다. 구글맵을 깔고부터 길을 물은 적이 없다. 구글맵이 가라는 대로 간다. 성경 책보다 두꺼운 론리플래닛을 들고 묻고, 헤매고, 또 묻고, 힘들게 찾던 시간이 좋았지.
미국까지 와서 스타벅스인 이유는 플러그를 꼽을 수가 있어서다. 전원 없이 8시간 이상 쓰는 맥북 프로를 나도 갖고 싶다. 아침 여덟 시 보스턴의 스타벅스, 줄이 길다. 스타벅스가 시작된 시애틀도 이렇겠지? 시애틀에 가보고 싶다.
“카페 라테, 아알몬ㄷ 미열ㅋ 플리즈.”
연습한다. 우유 대신 아몬드유. 미국 스벅 라테는 아몬드유도 가능하다. 무조건 아몬드 우유지. 젖과 꿀이 흐르는 나라. 혀를 입천장 주변에서 꼿꼿하게 세워야 한다. 밀크 아니고 밀크와 미역 사이. 토가 쏠리도록 혀뿌리로 목 구녕을 틀어막아야, 제대로 된 미쿡 밀크 발음이 된다. 아빠가 세탁소 주인인 하바드 장학생처럼 발음하고 싶다. 아알몬ㄷ 미열ㅋ, 라테 플리ㅈ. 스몰 원. 당황해서 허겁지겁, 마구 이어 붙였는데도, 미쿡 네이티브가 알아들었다. 가문의 자랑, 얼쑤! 미쿡에선 무조건 스몰(톨 사이즈)만 마신다. 미쿡의 늠름한 커피 애호가들은 벤티 사이즈를 드신다. 아이스의 경우 스벅 벤티가 우리나라는 591ml, 미국은 710ml. 최근엔 트렌타(Trenta) 사이즈가 나왔다. 916ml. 인간의 위 평균 크기가 900ml. 배가 부르면 배가 찢어질 것 같다는 표현을 쓴다. 미쿡은 배가 찢어지는 양을 실제로 판다. 유럽 사람들이 새끼손가락만 한 잔에 에스프레소를 마실 때, 미쿡인들은 에스프레소에 물을 탔다. 쓴 거 싫다 이거지. 대신 양은 많이요. 2차 대전 때 미쿡 쿤인 할아버지들이 만드신 아메리카노다. 손주들은 샷 추가, 시럽 많이, 우유도 많이. 뭐든 많이. 숭고한 아메리카노 정신은 온데간데없고, 모둠 김밥스러운 커피를 한 손에 들고, 먹귀처럼 출근길에 오른다.
“유리조각 형이 치웠어요?”
나의 소중한 아몬드 라테는 유리조각을 왜 치웠냐는 용주의 전화로 위태롭다. 이 새끼들 깰까 봐 조용조용 나왔다. 이 고요한 라테의 시간이 어째 불안불안하다.
“내가 쓰레기통에 잘 모아뒀어.”
이 새끼가 왜 유리조각 행방을 묻는지 안다. 증거 사진을 찍기 위해서다. 필요하면 원래 자리에 갖다 놓고 다시 찍으렴. 어제는 보스턴 시내를 돌며 온도계까지 샀다. 샤워기 물 온도를 재서, 사진까지 찍었다. 이리 집요한 새끼도 세상에 산다. 쓰레기통에 잘 모아뒀어. 이 표현은 두뇌를 재빨리 돌려 나온 답이다. 나는 충분히 주의를 기울였으며, 증거 사진은 여전히 가능해. 분노 조절 장애는 나도 있다. 아침부터 이 새끼와 언성을 높이고 싶다.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 내쉰다. 이 새끼의 질문에, 잔머리까지 굴렸다. 아오, 자존심 상해!
“시응이랑 싸웠어!”
응?
“어제 중국집 음식 먹다 남은 거 데워 먹자고 했거든. 시응이가 포장 그대로 넣었어. 철사가 있는 것도 모르고. 깜빡 잊은 게 아니라, 전자레인지에 철사가 들어가면 안 되는 걸 모르더라고.”
어떤 인생을 살았기에 전자레인지에 금속이 들어가면 큰일 난다는 것도 몰라? 우리 시응이가 비범하게 멍청하구나. 용주 너도 1절만 해. 멍청한 놈들이 상처 더 잘 받아. 밤새 둘이 티격태격하다니. 성격 더러운 놈과 희귀하게 멍청한 놈. 이 두 놈과 함께 여행 중이라니. 몹시 영광이다.
James hook에 다시 갔다. 가게에서 제일 큰 랍스터를 골랐다. 용주의 목 밑부터 허리 위까지 꽉 채우는 크기였다. 참고로 용주의 키가 183cm다. 너무 크지 않아? 말렸더니 두 번째로 큰 랍스터를 골랐다. 나름 양보한 게 그거다. 삼십 분 후에 테이블을 휘덮는 랍스터가 올라왔다. james hook의 모든 관광객이 우리에게 몰렸다. 사진을 찍고, 오 마이 갓, 언빌리버블 했다. 양 때문에, 가격 때문에 포기했던 서양의 관광객들은 우리를 존경하고, 흠모하기 시작했다. 용주는 20만 원을 쓰고 보스턴 여행자 서열 1위가 됐다. 가재 살만으로 식도까지 채우는 경험은 또 처음이었다. 몸통 살은 질기기까지 해서, 허술한 내 잇몸은 비명을 질러댔다.
“너무 무섭게 생겼어요.”
시응이의 표정이 창백하다. 진짜 겁에 질린 얼굴이다. 영화 에일리언이 떠오르니? 멍청한 놈이 겁까지 많구나. 잘 생기면 뭐해? 철사를 전자레인지에 넣지 않는 내가 훨씬 우월하지. 이놈의 랍스터는 먹어도, 먹어도 양이 줄지를 않는다. 용주는 그 사이 에어비엔비 본사에 전화를 건다. 미국 본사에서 한국 직원을 찾아낸다. 용주는 담당자, 담당자를 교육하는 사람, 교육하는 사람의 책임자까지 찾아내서는 중후한 저음으로 협박한다. 영어에서 한국어로 능숙하게 오가며 환불의 의지를 불태운다. 2박 3일간 길바닥에서 화장실을 찾은 횟수 7번(용주와 시응이). 천오백만 원짜리 라이카 카메라가 있는 아우디 차문을 활짝 열어놓은 나(서열 바닥으로 급추락). 샤워 밸브를 수직으로 내리면, 샤워할만한 온수가 나온다는 걸 발견해낸 나. 유리 파편을 세심하게 재현하다 열불이 난 용주. MIT 대학에서 무단 주차로 벌금 딱지를 떼고 괜찮은 척 메쏘드 연기를 펼쳤던 용주, 전자레인지 바보 시응이. 순위를 매기자면 내가 셋 중 제일 멀쩡하지 않나? 가장 덜 멍청하고, 비교적 평화롭다. 상식적인 인간이 이토록 귀하다. 아, 길거리에서 두 명의 게이가 나를 보면서 So cute 했다. 너무 기뻐서 용주에게 자랑했지만, 게이들이 얼마나 눈이 높은데. 이러면서 용주가 나를 비웃었다. 용주의 여자 사람 친구이자 교포가 자신의 영국 남자 친구와 쓰리썸을 제안했다. 셋 중 콕 집어서 나를 골랐다. 술자리였고, 나는 No Thanks했다. 이루 말할 수 없이 기뻤다. 시응이가 웬만한 연예인 뺨치게 잘 생겨서, 내 기쁨은 인간의 언어로는 표현 불가였다. 이놈들은 짧은 여행을 마치고 이제 곧 돌아간다. 직장인의 삶이다. 부유하지만, 월급쟁이일 뿐이다. 여행은 늘 부족하고, 짧다. 허기를 가득 안은 채 돌아가야 한다. 가난하지만 시간은 남아도는 여행 부자, 그게 나다. 잠깐이지만 코스 요리를 먹고, 50만 원 방에서 자며 랍스터를 뜯었다. 새로운 생을 다시 산 기분이었다. 자, 이제 혼자다. 마차는 호박으로, 나는 재투성이 아재로 돌아왔다. 세상 제일 비싼 도시 뉴욕에서 살아남아야 한다. 방값으로 생활비의 대부분을 날렸다. 그토록 오고 싶었던 뉴욕이, 두렵다.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한다.
그것도 행복하게 살아남아야 한다.
PS 매일 글을 씁니다. 글로 당신께, 당신께 다가가기 위해서 작은 오체투지를 해요. 2019년은 '입 짧은 여행작가의 방콕 한 끼'를 알리고 있어요. 9년 간 방콕에 머물면서 자주 갔던 단골집, 카페, 태국 음식 이야기닌까요. 소소한 기쁨을 드릴 수 있을 거에요. 도서관에, 학교에 박민우의 책들이 죄다 꽂혀 있으면 소원이 없겠네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