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기와 두려움, 도둑놈이 된 뉴욕 생활자

첼시 카페테리아의 장발장

by 박민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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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달러 피자, 2bros. 드디어 먹는다. 뉴욕에선 이것만 먹다 가겠구나. 슬프지 않다. 이게 밥이 돼야, 진짜 뉴요커. 이걸 씹는 순간, 뉴욕이 진짜 뉴욕이 된다.


“5달러요.”

“...?”


5달러? 1달러짜리 두 조각이면 2달러잖아. 치즈 피자만 1달러고, 나머지는 2.5달러. 진작 말하지. 일부러 무거운 것만 골랐지. 식재료가 넘치는 나라라서, 미트볼이 올라가든, 살라미가 올라가든 1달러인 줄 알았지. 맨해튼에서 콤비네이션 피자가 천 원이기를 바라다니. 상식도, 염치도 없는 새끼. 그로서리 스토에서 스무디는 큰 걸로 주문했다. 최근 변변하게 똥을 못 눴다. 섬유질 보충.


10.5달러.


우리나라 돈으로 만 이천 원. 구멍가게에서 믹서로 드르륵 간 스무디가 만 이천 원. 이건 좀 아프다. 비싸서, 통증이다. 뉴욕의 물가는 괴물이군. 비싸네, 못 살겠네. 못난이처럼 굴면, 답은 없다. 뉴욕에서 가장 유명한 피터 루거 스테이크도 먹겠다. 10만 원이면 미디엄 웰던으로 잘근잘근 씹을 수 있지. 알라딘 뮤지컬도 보겠다. 브로드웨이가 5분 거리인데, 뮤지컬은 봐야지. 15만 원이면 나쁘지 않은 자리에서 볼 수 있다. 은행 잔고가 얼마든, 보겠다는 의자가 중요하다. 가난뱅이들은 뮤지컬 안 보고, 발레 안 봐서 못 사는 거다. 없는 돈을 지키려고 궁상궁상. 저지르면 끝까지 저지르며 산다. 펑펑 쓰면, 펑펑 쓰다가 죽는 거야. 어차피 죽는 삶, 죽기 전의 삶은, 내가 직접 고른다. 억지 같은데, 자유로워진다.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스무디 한 잔에 만 원이 넘지? 식당이라면 군말 않고 마시겠어. 거지들이 우글대는 9번가 구멍가게잖아. 자기 친척도, 친구도 인도, 파키스탄, 과테말라 사람이잖아. 친척은 불법 체류하며 최저 임금도 못 받고 1달러 피자로 하루를 버텨. 나한테 이래도 되는 거야? 내가 당신이고, 당신이 나라고. 가게 하나 가졌다고 보이는 게 없어? 어제 팔다 남은 과일, 채소 넣고 돌린 거잖아. 이러려고, 미국에 온 거야? 가난뱅이 등쳐먹으려고? 무거운 돌이 필요하다. 맷돌을 내 머리 위에 얹어 놓고 싶다. 날뛰는 감정이, 걷잡을 수가 없다. 화를 내는 게 아니라, 떨고 있다. 내일모레 교보생명 11만 원, 연금 8만 8천 원. 하하. 알겠다. 내 안의 노예. 세상에서 가장 교활한 감정, 두려움. 말려들 뻔했어. 록펠러 센터에서 재즈도 들어 주마. 칵테일도 마시겠어. 구운 파인애플이 들어간 칵테일을 마실 거야. 피자를 뜯어먹는다. 얼굴만 한 피자 두 조각은, 사라졌다. 먹었으니까 사라졌겠지. 스무디까지 마셨다. 숨이 좀 불편하다.


몸이 급격히 뜨거워지면서 식도 부근이 쓰렸다. 눈을 뜬다. 더 못 자겠다. 수세미로 목젖을 문지르는 느낌이다. 새벽 세 시다. 웃통을 벗는다. 팔 굽혀 펴기를 한다.


489, 490, 491


500개를 한다. 천 개를 했어야지. 도저히 못 하겠다. 칠레 산페드로 아타카마에서 목에 피를 토했다. 지구에서 가장 건조한 곳, 기침을 할 때마다 피가 섞여 나왔다. 비슷하다. 비슷하게 목이 갈라진다. 토하고 싶다. 과식으로 인한 체기지만, 감기라고 생각하겠다. 몸이 끓는다. 팔 굽혀 펴기를 해서다. 아픈데 왜 팔 굽혀 펴기를 해? 뭔가를 해야 해. 산 페드로 아타카마에선 누워만 있었어. 약값을 또 쓰면 안 돼. 또, 돈!


501, 502, 503


600개를 채운다. 두려움이 사라질 때까지, 나를 괴롭힌다. 뼈와 피부 사이에 아무것도 없다. 바람이 그대로 들쑤신다. 침대 매트리스가 따갑다. 씻고 자야지. 비가 내린다. 뉴욕의 비린내가 훅, 비를 통해서 온다. 피자 트림이 더럽다. 누군가가 나의 무너짐을 보고 싶어 한다. 팔 굽혀 펴기를 백 개 더 할까? 아니, 아니. 샤워는 해야지. 아니, 아니. 이불을 만다. 이불이 충분히 길지 않아서, 발 쪽이 시리다. 무릎을 구부리고, 발가락을 이불 안으로 집어넣는다. 동그란 크루아상이 된다. 몸에서 열이 모락모락. 따뜻한 크루아상이다. 크루아상, 크루아상. 좋은 상상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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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 굽혀 펴기는 분명 효과가 있었다. 그냥 몸만 욱신거린다. 열기가 사라졌다. 약도 안 먹었다. 내 몸은 이렇게 유지된다. 내 눈빛이 미친놈처럼 이글거릴 것이다. 거울을 보고 싶지 않다. 뭘 먹어야 하지? 아침까지 무사히 버텨낸 나를, 완벽하게 회복시켜야 한다. 사람으로 들끓는 타임스퀘어 쪽에서 멀어지고 싶다. 타임스퀘어는 왼쪽, 첼시는 오른쪽, 첼시 쪽으로 20분을 걸었다. Penn 스테이션이다. 여전히 사람이 많다. 고고한 주택가가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좀 더 안으로 들어가면 젊은 엄마들이 유모차를 밀고, 아이들이 뛰어다닌다. 롱아일랜드에서 기차를 타고 Penn 스테이션에서 내렸다. 맨해튼의 처음 10분이 여기였다. 무엇을 봐도 엔도르핀이 솟구쳤다. 뭘 먹어야 하지? 핫도그도, 피자도 싫다. 밀가루 음식은 그만. 가난한 뉴요커가 채소를 먹을 수 있는 방법은? 서브웨이다. 서브웨이 샌드위치엔 양파, 토마토, 피클이 들어간다. 채소와, 고기가 먹고 싶다. Essen이란 간판이 보인다. 사람들이 먹고 있다. 음식을 고르고 있다. 음식을 담고, 줄을 서고 있다. 1파운드에 10.99달러. 무게를 써 놓은 걸 보니, 카페테리아다. 싸니까 써놨겠지? 1파운드 양이 얼마지? 일단 들어간다. 비쌀 리가 없다. 비쌀 수가 없다. 주문하고 팁을 주는 식당이 아니다. 가난한 사람들이 맘 놓고 먹으라고, 무게까지 써 놨잖아. 고기를 담는다. 붉은 양념의 포크 립이다. 샐러드 바의 채소들은, 씻은 지 30분이 안 됐다. 안 먹어도, 이미 싱싱하다. 이렇게 확신을 주는 카페테리아는 또 처음이다. 포크 립 양념을 긁어서는, 원래 자리에 되돌려 놓는다. 10그람은 덜어냈겠지? 그러니까 1파운드의 무게가 얼마냐고? 네이버를 연결해 본다. 1파운드 = 495g. 고기 2인분 정도의 양이다. 고기 집에서 고기 2인분을 다 못 먹는다. 만 원이면 실컷 먹겠군. 싸네. 맨해튼에서 이 가격이면 엄청 싼 거네. 튀긴 만두, 볶음밥, 브로콜리 볶음, 미트볼 조림을 담는다. 사장님이 중국 사람인가? 볶음 면, 볶음밥, 볶음 채소. 볶음 요리들이 많다. 계산대에 줄을 선다. 1파운드가 넘을까? 넘지 않을까? 만 원이 안 넘었으면 좋겠다. 만 원이 안 넘으면, 맨해튼에서 마음껏 배고플 수 있다. 하루 예산은 5만 원이다. 이곳만 올 거야. 갑자기 들고 있는 내 접시가 무겁다. 무거워진다. 1파운드를 넘는다. 확실히 넘을 것 같다. 계산대의 누구보다 내 접시가 꽉 찼잖아. 나는 고개를 서서히 내린다. 더 느려진 속도로 접시에 얼굴을 쳐 박는다. 펠리컨이 물고기를 낚듯, 만두를 입에 넣는다. 다시 고개를 든다. 누가 나를 보나? 아무도 보지 않는다. 다시 고개를 쳐 박고 고기 조각을 입에 넣는다. 역시 아무도 보지 않는다. 감히 나를 보지 못한다. 두려움이 먹어버린 한 남자가, 고개를 쳐 박고, 가장 무거워 보이는 걸 찾는다. 어떻게든 살아야겠다. 이 무게는, 견딜 수 있는 무게가 아니다. 1파운드가 되지 않기 위해, 가장 고요하고, 집요한 방식으로 음식물을 입체 처넣고 있다.


두려움은 그날 18달러를 냈다.


두려움이 먹은 그 날의 포크 립은, 최고였다.


PS 글에 사족을 다는 걸 안 좋아해요. 그래도 달아요. 이 글은 두려움의 슬픈 바닥을 드러냅니다. 불쌍함을 강조하는 걸로 오해하셔서, 저를 도우려고 하면 저는 이 글을 후회할 것 같아요. 지금은 구독료도 받고, 이번 여행을 무사히 마칠 액수가 됐어요.


PS 매일 글을 씁니다. 작은 오체투지로 봐주세요. 세상 끝까지 천천히 다가가겠습니다. 박민우의 책들을 도서관, 학교, 관공서, 군부대에 신청해 주시겠어요? 오체투지가 외롭지 않게 해 주신, 여러분께 미리 감사드려요. 2019년은 '입 짧은 여행작가의 방콕 한 끼'를 알리고 있어요. 9년간 방콕에 머물면서 애정했던 단골 식당, 카페, 태국 음식에 대한 이야기니까요. 가볍게, 즐기실 수 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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