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픈 꽃이 더 많이 아프지 않기를
샌프란시스코 공항에서 시내까지 바트(Bart)라는 전철을 타면 9.6달러. 아니 무슨 전철이 만 원이 넘어? 비싼 물가에 대한 발작이 또 도진다. 참, 나도 문제다. 그러려니 하는 법이 없어. 꼴에 좀 다녔다 이건가? 더 싼 걸 기어이 찾아냈다. Sam trans라는 공항 경유 시내버스다. 2.25달러. 3천 원도 안 한다. 이번엔 내가 이겼어. 물가가 아무리 비싸도, 빈틈은 있다. 빈틈을 어떻게든 찾아낸다. 오늘처럼만 하면 된다.
“아뇨. 이건 다른 방향이에요.”
번호만 보고 그냥 탔으면 어쩔 뻔했어? 같은 정류장에 양방향 버스가 다 선다. 나나 되니까 물어보지. 바보들은 그냥 타고, 변두리 어딘가에서 피눈물을 흘렸을 거 아냐? 똑똑한 주인 덕에 몸뚱이가 고생을 피했다.
“다운타운 쪽으로 가나요?”
“맞아요.”
2.25달러. 어디나 넣어야 하지? 버스 기사가 손짓하는 곳에 지폐를 넣는다. 1달러, 1달러, 1달러.
“노노, 25센트!”
25센트를 정확히 내란다. 동전? 동전이 있나? 25센트가 딱 맞게 있나? 주머니를 뒤진다. 알고 보면 천하의 후진국. 승객 입장은 조금도 배려 안 하는 나라, 미국. 버스가 못 가고 있다. 나는 또 이렇게 진상 손님이 된다. 주머니에 동전이 없다. 백팩을 바닥에 내려놓고 뒤진다. 앞주머니에 있다, 있어. 마지막 1센트까지 탈탈 털어서 25센트를 만들었다. 지옥 같은 1분, 아니 2분이었다. 동전이 없다면 나는 다시 내렸어야 했나? 굼뜬 여행자의 동전 찾기에, 모두 끔뻑끔뻑. 버스는 세렝게티의 사파리 버스처럼 평온하다. 버스 기사는 과식한 수사자가 되어 껌을 씹는다. 내가 동전을 찾는 동안, 손톱을 하나씩 보고 있다. 승객들은 하마나 기린이 되어 창밖만 본다. 나만 지옥인 2분이었다. 버스가 아무런 감정도 없이, 시동을 건다. 뒤늦게 한 여자가 문을 두드린다. 버스 문이 다시 열린다. 여자 역시 잔돈이 없다. 잔돈 좀 바꿔줄 사람 있나요? 그녀는 다정하게 외친다. 누군가가 바꿔 준다. 승객에게 구걸을 강요하는 매정한 미국 버스. 사람들이 불평을 안 하니, 바뀌지 않는 거지. 불평하지 않고, 짜증 내지 않는 사람. 곰처럼 미련하고, 답답한 사람. 내가 샌프란시스코와 사랑에 빠진다면 이런 답답한 사람들 때문일 것이다.
공항에서 시내로 가는 길은 어디나 지루하다. 그걸 알면서도 또 실망한다. 적당히 괜찮아서 더 실망스럽다. 아예 콘크리트와 시멘트로 덕지덕지 발라진 건물들이었으면 낫지. 그럭저럭인 건물들에, 화창한 날씨라 더 겁이 난다. 설마 이게 다는 아니지? 겨우 이 정도에 사람들이 샌프란, 샌프란한 거 아니지? 막판에 시카고로 바꿀까 고민했다. 시카고로 갔어야 했나? 갑자기 시카고가 확실해진다. 내가 선택하지 않은 모든 가능성이 언제나 더 아름답다.
버스에서 내려서. 20분 정도 더 걸어야 숙소다. 한 시간도 걸을 수 있다. 점심값을 벌었다. 차비 아껴서 점심값 벌기. 너무 재미있다. 흠, 그래. 이 정도면 사람들이 좋아할 수는 있겠어. 가끔 괜찮은 풍경이 나온다. 나는 아니다. 그냥 도시다. 화사한 편이고, 못나지 않았다. 내 오만방자한 기대가 원망스럽다. 삐딱한 내 감정은 피로 때문이다. 새벽에 일어났다. 좁은 비행기에 갇혀서 다섯 시간 쪽잠을 잤다(국내선이 다섯 시간이다. 이게 미국이다). 허기와 피로에 놀아나는 중이다. 첫날은 대체로 실망스럽다. 다음날, 혹은 다음다음날, 진짜가 정체를 드러낸다. 예상되는 반전이 반전이 될 수 있을까? 샌프란시스코는 내일쯤 좋을 것이다. 숙소와 가까워질수록 노숙자가 많아진다. 굳이 화난 얼굴로 걷는다. 나를 만만하게 보지 말라고! 벽에 등을 대고 서거나 앉은 이들이 나를 무기력하게 본다. 마리화나 냄새가 강렬하다. 나를 공격할 의지도 이유도 없다. 한 명의 늙은 남자가 걸어온다. 바지를 입지 않았다. 속옷도 없다.
응?
내가 뭘 본 거지? 키가 165cm 좀 넘어 보이는 왜소한 백인 남자가. 한 손에 지팡이를 들고, 한 손에 자루를 쥐었다. 윗도리는 입었다. 아래는 입지 않았다. 신발도 없다. 비틀비틀, 초점 없이 지나친다. 잠깐 스쳤던 내 기억이 맞다면, 그는 성기 부근에 밴드를 붙이고 있었다. 없다. 성기 특유의 굴곡이 없다. 거세하고, 밴드를 붙이고, 바지를 벗었다. 용기를 내서 그의 뒷모습을 본다. 그는 비틀거리지 않는다. 비틀거린다고 생각했다. 고요하게, 제대로 걷는다. 그러니 그의 삶은 내 염려와는 다를 것이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는 이토록 다양한 우주가 있다. 언제든 죽을 수 있는 자니까, 살점을 도려냈을 것이다. 미련이 없으면, 고통도 없는 것일까? 모든 고통이 고통인 나는, 몸이 다 떨린다. 깊은 심해를 그 사람에게서 본다. 어둡고, 차갑다. 나는 너무나 한심하게, 빤한 시선으로 벌벌 떤다. 내 모든 사고의 경계가 허물어진다. 그의 자잘한 감정들. 거세를 결심한 그날, 그 밤이 두렵고, 궁금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프지 말기를. 가고자 하는 목적지가 분명히 있기를… 우리는 다 꽃이다. 아픈 꽃도 지지 않고, 꽃으로 걷는다. 집 없는 꽃들 사이로 나는 조금 더 다정히 걸을 필요가 있다.
PS 매일 글을 씁니다. 작은 오체투지입니다. 언젠가는 세상 끝까지 닿기를... 아, 이런 말도 좀 가려가면서 하고 싶네요. 오늘은 그냥 크리스마스. 메리 크리스마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