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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민우 Mar 13. 2019

73년 생의 스무 살, 땡처리합니다

추억은 방울방울

문득 깨달음이었죠.


늘 더러운 책상과 책장.

오늘따라 안 당연하게 보이는 거예요.

이게 다 뭐야?

다락에라도 있든가?


욱 치밀어 오르니까, 도저히 봐줄 수가 없네요.

버리려고요.


책상 왼편에 붙은 일체형 책장을 탈탈 털어요.


어른들은 몰라요


한 여자애가 오디션을 보러 가요.

데려온 친구가 덜컥 연예인이 돼요.

너무 억울해.

사실 제가 연예인이 되고 싶었어요.

오호, 강부자 씨를 꼭 닮았구나.

PD가 강부자 소녀에 감탄합니다.


도서관에서 읽다가 입을 막고 뛰쳐나갔네요.  


매일 내신에 대입만 생각하던 우울한 고등학생에게

신선하고, 절묘한 개그코드였어요.


미미와 철수의 청춘 스케치


이규형 작가는 또 다른 영화죠.

자신의 소설로, 영화를 만들었어죠.

87년 흥행 1위 영화가 되죠.


줄거리는 하나도 기억 안 나요.

스무 살의 내가 보았어요.

스무 살의 영화예요.


중2 때 영화였지만

스무 살 때였어요.  

제 기억이니까

제 맘이죠.


여러분 LG 카드고요.

2030 카드이옵니다.

네, 저도 이십 대가 있었음을, 이 카드로 증명합니다.

 TTL이고 X세대였어요.


스킨로션은 아모레 트윈엑스를 썼죠.

이병헌과 김원준이 모델이었고요.

트윈 엑스를 쓰면 김원준처럼 잘 생겨질 수 있다 믿었어요.  


2030 카드 CF 모델은 이영애와 배용준이었을 거예요.

카드 단말기에서 드르륵 소리가 날 때까지

엄청 조마조마했어요.

카드를 써본 적이 없었으니까요.


안 믿으시는 것 같아서


TTL 무려 VIP였네요.

자세히 보니 형 카드네요.  

신비소녀 임은경

광고 하나로 발칵 뒤집혔죠.

어찌 저리 신비롭고

어찌 저리 이쁜고


TTL이어야 어딜 가도 기를 펼 수 있었어요.

번호는 011이어야 했죠.

016, 017,018은 좀 쫄렸죠.


그때 광고들이 정말 대단했죠.


노래방에서 전화를 몰래 받는데, 탬버린이 살짝 움직였던가요?

얼음이 살짝 녹았던가요? 그 얼음 소리까지 다 들리는 016 핸드폰.

그래서 야, 너 어디야?

고소영이 화를 내죠.

거짓말도 보여요.

016 핸드폰은 거짓말이 보이는 핸드폰이었어요.


짜장면 시키신 분


비행기로 짜장면 배달하는 이창명도 떠오르네요. 017이었을 거예요.  


사랑은 움직이는 거야.

김민희가 차갑게 내뱉는 말. 018 한솔 텔레콤이었던가요?

차태현이 움찔. 슬픈 광고였죠.


저는 걸면 걸리는 걸리버 핸드폰을 썼어요.

아무나 못 쓰는 폴더폰이었죠.


왜 다 기억나죠?

짜증 나요.


청춘의 기억은 어찌 그리 유난스러울까요?


 

도도도 도시라 솔미솔미 레 레미 파미레 미라솔


'올림픽 마치'라는 곡이죠.


뜬금 검색을 했더니



http://mlbpark.donga.com/mp/b.php?p=1&b=bullpen&id=201706210005288902&select=&query=&user=&site=donga.com&reply=&source=&sig=hgjBSY2gi3HRKfX@h-j9Gf-ghhlq


참, 이런 사람도 있군요.

기억보다 더 깊은 곳에서

웅크리고 있던 끝판왕의 기억들이죠.

실기시험 좋은 점수받으려고

얼마나 열심히 외우고 불렀을까요.

리코더를 분리하면 침이 질질 새어 나오도록 불고 또 불었죠.



비디오 렌털 샵 카드로군요.


구멍가게 같은 비디오테이프 대여점만 있을 때였어요.

까만 봉지에 비디오테이프 담아올 때요.

문을 열면 향기까지 은은한 초대형 비디오테이프 대여점이 생겼네요.

아, 이런 곳도 있군요.

동네 비디오 대여점이 다 죽어나가는 소리가 들리는군요.

캘리포니아 부촌으로 이사 온 듯 황홀했죠.

한 영화에 비디오테이프도 여러 개네요.

컴퓨터에 제 기록이 남아요.


이러면 야한 영화는 어찌 보나요?


너무 환하고, 고급스러워서 야한 영화는 못 빌리겠더라고요.


할리우드 태생의 근본 있는 블록버스터에

홍콩 영화만 줄곧 빌려봤네요.


저, 일 디보 콘서트도 갔어요.


쩌렁쩌렁 객석을 울리는 목소리에

이건 좀 울어야 하나?

눈물은 안 났지만

입은 안 다물어지더군요.

아, 좋다, 너무, 좋다

감동이었죠.


지금요?


네, 잊었죠.

시간의 힘을 빌려서

다 잊었어요.


아무리 좋아해도요.

한 때더라고요.


지금 제가 좋아하는 것도 한 때가 될 테니까요.


지금, 훨씬 더 좋아하려고요.



어머니가 큰 마음먹고 장만한 세계문학전집도 다 버립니다.

약간 용기가 필요하군요.

채털리 부인의 사랑에서 야한 장면만 부분 부분 보다가

결국 책을 완독하는 모범적인 사례가 되었네요.


모파상의 '여자의 일생'을 보면서 반전에 대해 생각했어요.

패트릭 모디아노의 '추억을 완성하기 위하여'를 보면서 일상을 쪼개고, 쪼개서 묘사하는 '관찰'을 봤죠.

전집의 절반은 못 읽었네요.

다 보고 버리겠다.

 33년을 곁에 뒀네요.  


이제는 버립니다.


못 이룬 꿈

버립니다.


서운하고, 홀가분합니다.


못 이룬 약속

더 버릴 게 없나 생각 중이에요.


이건 딱 봐도 형 글씨체네요.

어떤 노래가 담겨있을까요?

영웅본색, 라붐 이런 영화의 OST가 담겨있을까요?

No woman no cry, more than words 같은 클래식 팝송일까요?

형은 팝송을 참 많이 알았어요.

마이클 잭슨, 컬처클럽만 아는 저와는 차원이 달랐죠.  

가수는 모르고, 노래만 아는 그런 있어 보이는 노래들을 어찌 그리 많이 알던지요.


강남역 리어카에서는

최신 히트곡을 담은 테이프가 언제나 팔리고 있었어요.


저는 이상하게 겨울이 떠올라요.


조관우의 겨울 이야기

DJ doc 겨울 이야기(제목이 같네요)

미스터 2 하얀 겨울

이현우 헤어진 다음날


이현우의 헤어진 다음날은 비발디 사계 중에 '겨울'을 샘플링했죠.


어우, 세련됐어.

어린 마음에 클래식으로 시작하는 가요가 어찌나 있어 보이던지요.


스무 살의 겨울이

유난히 놓치고 싶지 않은 겨울이었나 봐요.


놓아지지도 않아요.

많이 아프고

많이 꿈꾸던 때니까요.


후각이 어찌나 예민했던지

냄새로 기억해요.

그때 겨울, 차갑고, 딱딱한 냄새

지하에 있던 학교 정문 앞 술집

유한 락스 냄새일 뿐인데도 그게 은은하고


우리에겐 스무 살이 있었어요.


죽을 때까지 우려먹을 수 있는 한 때였죠.


그 찬란한 한 때를 버립니다.

안녕

어차피 기억 속에 죽치고 있을 텐데요.


안녕


너만 한 시간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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