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인연, 용기가 필요하다
트레이더 조(Trader Joe’s)는 미국의 이마트다. 이해하기 쉬우라고 이마트와 비교했지만, 이마트는 내게 고마워해야 한다. 트레이더조 님 덕에, 미국 아니고, 미국님이다. 유기농 식재료가 가득하다. 비싸 마땅한데, 보통 마트 가격이다. 심지어 아베다 짝퉁 샴푸 티트리 샴푸는 3.99달러다. 5천 원도 안 한다. nourish 샴푸는 무려 2.99달러다. 내가 왜 4달러 생수에 광분했는지 이해될 것이다. 치킨 배달을 끊게 하는 만다린 오렌지 치킨, 일본 만두 교자, 중국 만두 완탕, 한국 사람 서운할까 봐 파전, 비빔밥. 다 트레이더조에서 파는 냉동식품들이다. 웬만한 식당 음식보다 낫다. 부드러움이 지나쳐서 차라리 자극적이라는 브리오슈 식빵, 못 먹은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먹은 사람은 없다는 쿠키 버터, 마카롱, 티라미수, 모찌 아이스크림. 전 세계에 이민자들을 모두 만족시키겠다는 무모한 전략을, 무모하게 성공시킨 마트계의 SM 엔터테인먼트다.
트레이더 조는 천국이다. 궁극의 식재료를 찾는 천사들만 온다. 카트를 밀며 아보카도를 고르고, 염소 치즈를 담는다. 한국 대표 천사는 와인을 사고, 샐러드와 빵을 담는다. 역류성 식도염에 와인은 치명적이다. 그래도 산다. 속이 타들어가는 것처럼 괴로운데, 그런다고 안 죽는다. 죽지도 않는데, 어떻게 와인을 안 마셔? 치즈도 있어야지. 크림치즈를 산다. 빵은 글루텐이 안 들어간 빵을 고른다. 정성을 다해 쇼핑한다. 저녁밥을 대신할 만찬이다.
“여기, 엄청난 곳이란다. 매일 새로운 사람이 와. 새로운 친구들이란다. 엄마 걱정은 하지 마. 굿나이트, 베이비.”
굳이 내 앞에서 통화를 한다. 딸인듯했다. 새로운 친구들? 그 친구 중 한 명이 아무래도 나인 모양이다. 숙소에 얼마나 머물렀느냐에 따라 서열이 생긴다. 무표정한 얼굴로 노트북을 깨작거리는 이들이 서열이 높다. 겁에 질린 눈동자를 좌우로 굴리는 이들이 신참이다. 공용 거실은 여러 개의 테이블과, 더러운 소파, TV, 보드게임이 있다. 이거 말곤 할 게 없잖소. 고문받듯이 TV를 보는 사람, 노트북과 로봇처럼 마주한 사람, 뭐가 그리 좋은지 하이톤으로 지껄이는 사람이 섞여 있다. 마틸다 할머니는 신참이지만, 사냥감을 물색한다. 어제는 한 흑인 처자가 희생양이었다. 둘의 대화는 두 시간 이상 이어졌다. 오늘의 사냥감은 누가 될 것인가? 통화가 끝났다.
“........”
내 만찬상을 두리번거린다.
안 됩니다. 할머니. 저도 나름 빈 테이블 하나 어렵게 찾아서, 치즈 올리고, 와인 올렸어요. 혼자 와인 마실 생각에, 뛰어서 왔다고요. 할머니와 눈 안 마주치려고 어제부터 나름 애썼어요. 집요해 보이시더라고요. 왜 그러세요. 저, 그 흑인 처자처럼 착한 사람 아니거든요.
“와인 한 잔 하실래요?”
“나는 병 넓은 것만 마시는데....”
말 시킬 때까지 계속 네 옆에 서 있을 거야. 이런 할머니를 어떻게 이기나? 병 넓은 와인은 어떤 와인일까? 대용량 와인일 텐데, 할머니는 그 와인에 자부심을 느끼는 듯했다. 나는 주방에서 유리잔을 가지고 온다. 와인잔은 없다. 그냥 유리잔이다. 할머니는 기꺼이 유리잔을 받는다. 너랑 마셔 주지. 공주의 자세다. 맨발에 플립플롭만 신었는데도, 묘하게 어울린다. 재킷은 추워 보인다. 재킷 탓이 아니라, 조그맣고, 마른 할머니 체형 탓이다. 언제나 예뻤던 여자다. 늘 예뻤던 사람, 사랑받았던 여성스러움이 드러난다. 얼굴을 거미줄처럼 채운 주름 사이로 깊게 팬 눈동자만 어리다.
“사기꾼 같은 치과 의사가 내 치아를 다 망쳐놨어.”
치과 치료를 위해 잠시 샌프란시스코에 와 있다. 집은 기차로 두 시간 거리. 이가 보이지 않는다. 아예 없다. 나도 어금니가 욱신거린다. 씹을 때마다 긴장하게 된다. 일흔의 나이, 50달러 싸구려 방. 혼자. 치아 없음.
“부츠 나라 가 봤어? 시칠리아 사람들을 조심하라고. 다 사기꾼이야..”
부츠 나라? 장화? 장화 모양의 반도국. 아, 이탈리아. 할머니는 이탈리아계 미국인이다. 농장이 세상의 전부인 촌뜨기였다. 마차를 타고 마을 상점에 가면, 물건 담긴 상자만 봐도 그렇게 신기할 수가 없었다. 건강한 시골 아가씨는, 의사가 될 줄 알았다. 메디컬 스쿨에 들어가기 전에 첫 남편을 만났다. 이혼을 하고 고고학자 남편을 만난다. 두 번째 남편은 나이차가 무려 서른 살. 주식 투자로 아내 몰래 차곡차곡 현금을 쌓아놓은 늙은 남편은, 엄청난 유산을 남긴다. 미국 상위 10%의 자산가이십니다. 그녀의 변호사는 아무래도 축하에 가까운 사실을 전한다. 슬펐겠지만, 남은 돈을 쓰는 게 먼저. 젊은 미망인은 유산을 펑펑 쓰며 세계를 돌아다녔다. 지금은 50달러 방에서 치과 갈 날을 기다린다. 한국 남자가 주는 싸구려 와인을 마시면서, 한국이란 나라를 궁금해한다. 같은 공간, 같은 시간이다. 모든 인연은 이유가 있다.
나도 곧 할머니처럼 늙고, 눈은 깊어질 것이다. 할머니가 굉장한 용기를 낸 거였다. 조금만, 조금만. 이 남자가 곧 내게 말을 걸 거야. 내가 와인을 권할 때까지, 그녀는 몹시 두려웠다. 그녀의 용기를 배우기로 한다. 내 나이 일흔이 되면, 누군가의 소중한 시간을 뻔뻔하게 두드려보겠다. 까마득한 곳에서 온 젊은이의 세계로 들어가 보겠다. 싸구려 숙소의 실세로 떵떵거리며 늙어보겠다.
“할머니, 이제 주무셔야죠.”
세 시간의 대화, 내가 끊었다. 여전히 아쉬운 할머니가 입을 오물오물. 그녀가 천천히 사라진다. 세계 2차 대전이라든지, 경제 대공황이라든지 거대한 역사가 한 개인의 어깨에 살짝 걸쳐서 함께 사라진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스칼렛 오하라도 얼핏 보였는데, 타라 농장에서 스칼렛과 맨발로 달리기를 한다. 스칼렛보다 더 빠르고, 더 작은 여자아이가, 발바닥에 피가 나는 줄도 모르고 앞으로, 앞으로 질주한다.
PS 매일 글을 씁니다. 작은 오체투지로 세상 끝까지 닿고 싶어서요. 천천히 성실하게 다가가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