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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 개의 진주, 그중 하나 쏘살리토

내겐 미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마을

by 박민우

“작가님 쏘살리토는 안 가세요?”


인스타그램 라이브 방송 중에, 쏘살리토를 알게 돼요. 가물가물, 들어본 것 같은 이름. 이탈리아 작은 골목 어딘가가 떠오르는 이름이네요. 가보기로 합니다. 자전거를 빌려요. 헬멧까지 제대로 쓰고요. 금문교를 건넙니다.

이렇게 보게 되는군요.


그깟 다리가 뭐? 이랬죠. 샌프란시스코 하면 금문교지만, 다리가 다리잖아요. 길쭉하게 땅과 땅을 연결한 물 위의 막대기. 어떤 다리를 보면 입이 다물어지지 않을까요? 한강의 어떤 다리에게도 특별한 감정이 없는 제가요. 이제야 봐요. 흠, 그리고 저는 입을 다물지 못해요. 맞아요. 그냥 다리예요. 큰 다리요. 붉은색으로 칠이 된 거대한 아치형 다리죠. 골든 게이트 해협을 잇는 믿음직한 일자형 다리. 다리만 있는 게 아니죠. 차와 사람과 자전거가 붉은 다리 위에 바글바글해요. 푸른 바다 위의 붉은색(정확히는 오렌지색)이 강렬하더군요. 행복에 겨운 사람들을 봐요. 평생 오늘만 기다렸던 사람들처럼요. 때론 다른 사람의 얼굴로 내 행복을 가늠하죠. 덩달아 좋아져요. 샌프란시스코 숙소 주위만 어슬렁거려도 충분했죠. 그래서 몰랐네요. 금문교까지 자전거로 달리면서 샌프란시스코의 또 다른 면을 봐요. 산책하기 딱 좋은 바다, 책 읽기 딱 좋은 모래사장, 연날리기 완벽한 공원을요. 샌프란시스코 골목에는 없는 풍경이죠. 샌프란시스코가 두 배로 커졌어요. 두 배로 화려해졌죠. 운전면허도 없는 제가 자전거라도 탈 줄 알아서,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요.


다리를 건너서요. 오른쪽 내리막길로 방향을 틀어요. 경사가 꽤 돼요. 조심조심. 브레이크를 빡빡하게 당기면서 끽끽끽. 무서우니까요. 천천히 내려가요. 이번 미국 여행은 순서가 바뀌었어요. 굉장히 가고 싶어서 간다가 아니라요. 일단 장소를 정하고, 가고 싶은 마음을 키웠어요. 매년 12월 31일 마지막 날이 싸움소처럼 달려들어요. 정말 시간은 하루하루 같은 분량일까요? 한치의 오차도 없이 똑같은 하루인 것 맞죠? 아닌 것 같아요. 아니에요. 1980년 국민학교 입학식, 1988년 올림픽, 고입 연합고사, 1993년 3월 대학 입학식, 2005년 파나마 백화점 크리스마스 공연, 2006년 새해 첫날의 콜롬비아 타강가. 이렇게 하나하나 다 기억나야 하잖아요. 그게 안돼요. 그런 날은 드물어요. 호떡 반죽 한 덩이처럼, 그런 1년이에요. 그런 1년들이 계속 쌓여가더라고요. 얼마나 초조하고, 패배감이 들던지요. 뭉쳐지고, 일그러진 시간들로 1년. 1년이 새어 나가고 있더라고요. 그래서 미국이었죠. 새로운 장소에서 호떡 반죽 같은 시간 말고, 지압 슬리퍼처럼 또렷한 시간. 그런 한 달을 보내고자 했어요. 흐리멍덩한 내가 가여워서요.


금문교 다리를 건너고, 아슬아슬 내리막길을 달리면서 내 시간이 오돌돌 지압 슬리퍼처럼 선명해지는 게 느껴져요. 피부의 소름처럼, 발가락 양말의 발가락처럼요. 내내 잠잠했던 흥분에게 신호를 보내죠. 지구에 태어나기 전에, 우린 미친 듯이 지구에 오고 싶었던 거예요. 아무나 못 와요. 정말 미친 듯이 오고 싶은 이들만 올 수 있죠. 인간으로 태어나서, 인간이 느낄 수 있는 모든 감정을 다 느껴보겠어. 지구에 오고 싶은 이유였죠. 그런데 웬걸, 기억을 못 해요. 기억 금지. 지구에 오기 위한 조건이죠. 문득문득 스스로가 한심하고, 삶이 지겨운 건 기억을 못 해서가 아닐까요? 얼마나 오고 싶었는데요. 어떻게 온 지구인데요. 저는 기억이 날 것도 같아요. 이러려고 온 거예요. 샌프란시스코에서 쏘살리토로 가는 자전거를 타려고요. 맑은 날 땀방울을 방울방울 묻히고서 쏘살리토를 보려고요. 쏘살리토가 보이네요. 기억이 되살아난 만큼, 내 앞의 모든 풍경도 당연합니다.


이럴 줄 알았어요.


하얗고, 파란 마을이네요. 세상의 여유와 유머를 모두 품은 마을이네요. 예습 없이 여행하니까, 알아야 할 곳도 몰라요. 이런 곳을 못 올 뻔하다니요. 하지만 결국 왔어요. 오게 될 곳은 오게 되어 있으니까요. 아무나 올 수 없죠. 행복하겠다고 작정하고, 달려들어야 올 수 있어요.


쏘살리토


여러분에게도 쏘살리토가 다가왔습니다. 안 가보신 분들은 저를 통해 쏘살리토와 인사하세요. 삶의 작은 꿈으로 간직해 주세요. 더 예쁜 마을이 왜 없겠어요? 그런 곳들은 제게 알려 주세요. 천 개의 진주를 하나씩 담는 일생을 살아요. 오늘 저는 하나의 진주를 담았죠. 알아요. 이 글을 본 사람 중 열 명도 오지 않을 거란 걸요. 열 명이 열한 명이, 혹은 스무 명이 되었으면 해요. 여러분도 지구에 너무 오고 싶었던 분들이니까요. 축복으로 흩뿌려진 진주에 와보셔야죠. 저처럼 작은 카페에서 커피 한 잔 하셔야죠. 아팠던 시간을 용서하고, 짧기만 한 지구의 일생을 아쉬워하셔야죠. 단 한 번만 허락된 인연입니다. 우리는 다시 오지 않아요. 다른 진주를 담아야 하니까요.

쏘살리토로 오세요.


PS) 제가 꼭 가야 할 곳들을 알려주세요. 제 인생에 영향을 주세요. 매일 일기를 써요. 작은 오체투지입니다. 제 글로 지구 반대편까지 닿기 위해 엉금엉금 거북이처럼 기어요. 엉금엉금 쓰고, 엉금엉금 가까워지고 싶습니다. 여러분 반갑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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