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다시 만나기 위해 작별인사를 합니다
아침 일찍 나가서 종일 걸어요. 중간에 돌아와서 낮잠 좀 자다가요. 또 나가서 저녁에 들어와요. 정말 걷기만 해요. 그런데 너무 재미있어요. 샌프란시스코 언덕길을 걷다가, 저 멀리 바다를 보고, 어디쯤에선 집들을 봐요. 바다도 어느 쪽이냐에 따라 분위기가 전혀 달라요. 한적한 백사장도 있고요. 고급 요트가 꽉 차 있는 곳도 있죠. 페리 빌딩은 먹을 것 천지예요. 샌프란시스코 명물 험프리 슬로콤 아이스크림과 블루 보틀 커피를 한 번에 맛볼 수 있죠.
저녁에 들어오면 정엽이는 자고 있죠. 이 아이도 종일 걸었을 거예요. 우린 가난하니까, 걸어요. 가끔 깨어있을 땐 반갑게 조잘조잘 대죠. 어디가 좋았어요. 거기 가 봤나요? 낮은 철저히 따로, 밤에는 반가운 이웃. 정엽이는 늘 스스로가 강조하듯이 돈이 없어요. 그래서 정엽이만의 여행을 해요. 저는 정엽이보다 부자죠. 하루 3, 4만 원은 쓰니까요. 정엽이보다 세 배 정도는 쓸걸요? 가끔 수중에 있는 먹을 거를 주면서 생색내요.
가난한 여행은 비참할까요?
정엽이는 미국에서 가장 물가가 비싼 샌프란시스코에서 하루만 원도 안 쓰는 것 같더군요. 돈이 없어서 방값도 깎아달라고 사정했대요. 깎았다더군요. 저도 남미에 있을 때 방값으로 구질구질 흥정했었네요. 왜 구질구질이라고 했냐면, 대부분 안 깎아줬거든요. 다른 사람들은 아무 말 없이 정가에 자는데, 깎아주는 게 도리어 이상한 거죠. 사람 사는 곳이니까, 깎아주기도 해요. 일주일 묵을 거다. 얼마까지 해줄 수 있느냐. 이건 협상에 가깝죠. 주인도 기분 나쁘지 않잖아요. 하루, 이틀 잘 거면서 나만 특별히 싸게 줘. 이간 징징대는 거죠. 그게 지금 생각해도 창피해요. 깎아 줬다면, 덜 민망했겠죠. 나만 우스워져서는 그곳에 묵어요. 정엽이는 깎았군요. 그게 됐군요. 그게 힘이죠. 길에서는 잘 수 없으니까요. 그 힘으로 깎고, 제 침대 위 칸에서 아기처럼 자게 된 거죠.
정엽이의 여행은 어떤 여행일까요?
우리의 삶에 좋은 힌트죠. 이런 질문은 어때요? 돈이 없는 삶은 불행한가요? 살아갈 필요가 없는 걸까요? 여러분에겐 어떤 답이 준비돼 있나요? 대부분 돈이 없어도, 삶은 불행하지 않다. 이렇게 답하실 거예요. 그래도 이왕이면 돈이 많으면 좋지. 그게 솔직한 심정이겠죠? 저도 그래요. 10달러가 있는데, 마트에서 파는 4달러 아이스크림을 먹고 싶어요. 다시 묻죠. 정말 먹고 싶어? 이 돈을 쓰면 6달러가 남아. 이걸로 두 끼, 혹은 세 끼를 먹어야 해. 고민은 깊어지죠. 결국 먹습니다. 밥을 굶겠다. 의지의 아이스크림이 되죠. 쉽게 먹는 아이스크림에선 이 맛이 안 나죠. 아이스크림을 가장 맛있게 먹은 사람이 됐어요. 간절하면 모든 가치는 새로워져요.
중국 칭다오에서 하루 묵고, 서울로 돌아가요. 저는 중국 돈이 필요해요. 차이나타운 환전소에 갔더니요. 중국 돈이 동이 났대요. 없대요. 신기해요. 제가 중국 돈이 필요하면 다들 중국 돈이 필요해요. 제가 가고 싶은 날 비행기는 언제나 더 비싸고요. 나는 왜 이리 운이 없는 걸까요? 미국 돈 50달러 정도 있어요. 어떻게든 되겠죠. 정엽이는 샌프란시스코에서도 만 원도 안 쓰는데, 중국에서 5만 원이면 황제의 여행이죠.
어머니가 좋아하는 꿀 두 통을 사요. 무게만 생각하면 겁부터 나요. 뭐를 사갈 엄두가 안 나요. 이걸로 저의 출국 준비는 끝났습니다. 오후에 울산 청년 한 명이 짐을 푸네요. 주방 보조 일을 하러 왔대요. 저도 좀 데려가 주세요. 제가 막 나가려는데, 적극적으로 달라붙대요. 이야, 미국은 스케일이 다르네예. 동남아시아랑 쨉이 안 되네예. 완전 별천지네예. 촌놈 출세했네예. 샌프란시스코에 경상도 사투리가 울려 퍼져요. 샌프란시스코에서 꽤 알려진 식당에서 일을 하게 됐대요. 쉬운 일 아니잖아요. 열심히 사는 친구일 테고, 인생을 건 도전일 거예요. 집안의 자랑이고, 동네의 자랑이겠죠. 저랑 AT&T 가서 핸드폰도 개통해요. 가지고 온 아이폰 유심칩만 바꾸면 되거든요. 혼자 힘으로 핸드폰 개통이 엄두가 안 났겠죠. 제게 신세를 지죠. 사람도 동물이죠. 위기의 순간엔 ‘촉’에 의지해야죠. 도움이 되겠다 싶으면 달려들어야죠.
정엽이와 요리사 청년은 밤에도 저를 따라와요. 제겐 마지막 밤이잖아요. 거의 떼를 쓰듯이 따라붙어요. 한국 남자 셋은 샌프란시스코 밤거리를 걷습니다. 울산 총각은 밤에 이렇게 다녀도 되냐고 물어요. 정엽이와 저는 그래도 된다고 답해요.
“저, JYP 떨어졌어요.”
정엽이는 JYP 공채 작곡가 시험을 쳤대요. 오늘 발표가 있었대요. 트와이스 사나를 좋아해서 사나 얼굴 보려면, 꼭 붙어야 했어요. 자신이 피처링하고, 작곡한 곡을 아이폰으로 들려줘요. 한 곡은 랩이었고, 한 곡은 EDM이었어요. 랩은 정엽이가 직접 했다더군요. 그럴듯하던데요. 요즘 시대에 그럴듯하기만 해서는 안 되겠죠. 제가 엄청 좋다고 호들갑을 안 떠니까, 다른 곡을 찾아요. 제 귀가 번쩍하는 그런 곡이 저장돼 있나 봐요. 열흘 이상을 같이 머물렀지만, 정엽이가 작곡가 지망생인 건 마지막 날에나 알았네요. 집도 좀 사는 집이었어요. 부모님이 마포에 전세도 얻어줬대요. 계속 손 벌리다가 부모님한테 혼나고, 뻘쭘해져서는 버티는 중이고요. 부모님은 인도를 추천했대요. 정엽이는 무조건 미국이어야 했고요. 아, 이건 별로죠? 이건 못 들은 걸로 해 주세요. 정엽이는 횡설수설하면서 다른 곡을 골라요. 많은 곡을 가지고 있군요. JYP는 인재 한 명을 놓쳤네요. 요리사 친구는 정엽이에게 벌써 말을 놓네요.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요. 전 절대 말 안 놔요. 그러면 형이 술이라도 사야 하잖아요. 저는 끝까지 예의 바르게, 거리를 유지할 참입니다. 트와이스 사나 이야기를 하면서, 3초 만에 얼굴이 붉어지는 정엽이가 참 좋습니다. 볼살만 빠졌으면 좋겠다고, 그래서 일부러 굶은 거라고 이야기하는 정엽이가 귀여워요. 지방이식을 해볼까? 앙상하고 쭈글쭈글한 저의 볼때기도 좋습니다. 젊은 셰프도 며칠만 더 같이 지냈다면, 더 많을 걸 알 수 있었겠죠. 식당에서 남은 음식을 나눠 먹으며 시시덕거렸을 수도 있죠. 지구란 별에선 사람이 살 수 있어서 참 좋습니다. 한국 사람으로 태어나서 한국어로 수다 떠니까 더 좋습니다. 영원히 머물 수 없습니다. 여행의 지혜죠. 지구에서도 언젠가는 떠나야 합니다. 그 사실이 놀랍고, 감사합니다. 우리는 서로 잊히겠지만, 그렇다고 이 밤이 무의미한 건 아니죠. 2018년 가을, 샌프란시스코의 바람은 참 맛있군요.
PS 매일 글을 씁니다. 엉금엉금 거북이처럼 세상 끝까지 닿고 싶어서, 글을 씁니다. 어디 계시나요? 저랑 만나셔야죠. 우리 인사 나눌까요? 처음 뵙겠습니다. 매일 볼까요? 저는 일단 이곳에서 기다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