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을 돌며 짱박혀 볼까?
(2018년 푹푹 찌던 그때 그 여름의 기억입니다)
집 도착, 인천에서 8박 9일(생각나는 순으로)
1
출발 당일. 지갑이 없다. 제발 나타나라. 제발! 욕조에서 젖은 바지를 꺼낸다. 퉁퉁 불은 가죽지갑도 꺼낸다. 에어컨이 없는 32평 아파트는 용암처럼 끓고 있었다. 이 집 덩어리가 나를 죽이려 한다. 욕조로 풍덩 뛰어들어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바지도 함께였다. 5만 원 권은 품질이 형편없어서 노랗게 만 원짜리를 물들였다. 만 원짜리 너도 잘한 거 없어. 어떻게 그렇게 노래지니? 젖은 돈은 금방 마르더라. 그걸 주머니에 꾸깃꾸깃 넣고, 인천으로 향했다.
2
송도에서 소래포구로 가는 지하철. 지하철 안에서 노선도를 본다. 손 놓은 사이 캐리어가 맹렬하게 구른다. 퍽. 아니 빠악 소리를 내며 소화기 쪽에 부딪힌다. 소화기는 무사하다. 텅 빈 지하철. 나 말고는 딱 한 사람. 소화기 혹은, 소화기 진열대가 부서졌다면, 나는 자수를 했을까? 죄를 늘리지 않은 하루!
3
승객여러분께
저는 어릴 때 부모님을 돌아셨습니다
저랑 동생하고 생활하고 있습니다
정신지체 장애인 또는 뇌출혈이
되어 있어서 수술해야되는데
그러지 못하고 있습니다
식사도 하지 못하고 있어서 불편합니다
병원비가 만만지 않아 지원조차도
못받고 있습니다
단 500원이라도 도와주신다면
감사하겠습니다
보신후 제자리에 놓아 주세요
4
한 남자가 나눠주는 종이를 무르팍에 놓고, 아이폰으로 찍었다.
맞춤법을 보고 있는 내가 놀라웠다.
천 원을 꺼낸다.
사지 멀쩡한 사람이 왜?
평소의 나는 주머니를 뒤적이지 않는다.
평소의 나보다, 따뜻해져 있다.
지하철 소화기를 박살 낼 뻔했다.
몇몇 독자에게 쓴소리도 들었다.
주눅 들어 있지만, 따뜻해져 있다.
세상의 약한 자들을 이해하고 싶다.
5
소래포구가 어디에 있나요?
폴로 호텔 지배인은 굳이 바깥으로 나와서는
저기요
한다.
충분히 감동하고 마는데
눈물 펑펑 쏟는 영화를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6
소래포구엔 해산물 가게, 식당, 모텔뿐이다. 사이사이 카페도 있다. 몇몇은 문을 닫았다. 문 닫은 카페를 보면 바그다드 카페가 떠오른다. 나는 이 영화를 시작 5분만 봤다. 사막 한가운데 외떨어진 주유소, 그리고 카페, 두 여자. 지독하게 나른해서, 일단 멈춤.
■
대학교 시청각실이었다. 이따가 봐야지.
이따가, 이따가, 이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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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따가가 쌓여서 25년이 되었다, 집으로 가면 네이버에서 바그다드 카페를 찾아봐야겠다.
7
마지막 밤이다. 자축은 죠스 떡볶이와 순대. 맥주를 마실까? 말까? CU가 보이면 산다. 나는 PAYCO라는 어플을 깔았다. 내 카드를 PAYCO에 입력하고 지불하면, 할인을 해준다. 세븐 일레븐 안되고, LG25 안 된다. 오직 CU. CU만 천 원을 할인해 준다. CU 없으면, 맥주 없다. 포기하려는데, 호텔 근처에서 보인다. 칭다오 한 캔을 산다. 3천 원. 엉? 아무 할인이 없다. 무슨 소리야? 천 원 할인 쿠폰을 받았는데? 결제할 때 자동으로 결제된다며? 자세히 보니 5천 원 이상 구매란 조건이 있다. 그러면 500원 할인은 되겠지? 500원 쿠폰을 클릭한다. 주류, 담배는 제외!
나를 놀리는 자본주의
칭다오는 맛이 없더라.
8
인스타그램에 구월동을 태그(#)했더니, 구월동 미용실, 스티커 사진관이 나를 팔로우했다. 스티커 사진관은 polaface란 업체인데, 6000원에 여권사진이 가능하다고 했다. 새 여권이 필요했다. 호텔 체크아웃하고, 캐리어 질질 끌고, 구월동 로데오거리로 간다. 김밥천국에 설치된 기계를 발견하고, 앉았다. 분당 수내역 사진관에서는 25,000원이다. 감개가 무량하다. 그런데 지폐가 안 들어간다. 카드는 되나? 스크린 메뉴도 먹통이다. 고장이다. 고장 시 문의는 010-XXXX-XXXX. 전화를 할까? 놀랍게도 나는 여권사진 어플을 아이폰에서 찾아낸다. 여권 사진 어플은 내가 찍은 사진을 보정도 해주고, 프린트까지 해서 집으로 보내준다. 기계 안에서 셀카를 찍으면, 어플이 증명사진으로 완성해 준다. 기계 안의 푸른색 배경도 마음에 든다. 너는 나를 헛걸음시켰어. 배경 좀 공짜로 써도 된다. 열 장 이상을 찍는다. 아무리 찍어도 좌우로 삐뚤. 갸우뚱 기울어진 얼굴만 나온다. 공짜로 찍으면 비대칭 얼굴. 땀을 닦고, 커튼을 걷고, 밝은 세상으로 나온다. 25,000원을 써야겠다.
9
자, 마지막 날이다. 헛걸음까지 했다. 밥을 먹어야 한다.
애슐리
애슐리를 네이버 지도 어플에 쳐본다. 호텔 조식운 깻잎과 장아찌와 미역국이었다. 내가 생각하는 조식이 아니라서, 미련이 남는다. 13,900원에 어이없이 다양한 메뉴가 있는 애슐리는
200m
지도 어플에 따르면 200m 떨어져 있다. 200m만 걸으면 뉴코아 백화점이고, 애슐리다. 피곤하고, 식탐 쩌는 영혼이 애슐리를 외치자, 서둘러 뉴코아 9층에 입점해버렸다. 세상은 나를 향해 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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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 어금니가 빠질 것 같다. 잇몸이 부었는데, 그냥 부은 게 아니다. 조금만 건드리면 이가 뿌리째 쑥 빠져나올 것 같다. 이가 쑥 빠져버리면 나의 뉴욕행은 물 건너간다. 임플란트 하나만 해도 백만 원. 응급조치가 필요하다. 매일 코코넛 오일로 오일 풀링을 한다. 코코넛 오일을 담아왔어야 했다. 오일 풀링 안 한지 9일째. 잇몸이 이토록 황폐해진다. 오일풀링은 꼭 하세요들. 저는 오일풀링으로 효과 봤어요. 독자 중에 치과 의사가 있으면 어쩌지? 정정하겠다. 개인적인 잇몸 상황에 호전되는 경우도 있지요. 플라시보 효과입니다. 가까운 치과에서 진단부터 받으세요. 흔들흔들 내 이빨, 내 여행의 위기다. 뉴욕에 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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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쪽 이빨로 혼신의 힘을 다해 음식을 씹고 있다. 로제 파스타, 까르보나라 떡볶이, 고구마 케이크, 옥수수 케이크가 맛있다. 가끔 음식이 왼쪽 이빨로 넘어가면, 신경을 누른다. 맛에 집중이 안 된다. 오른쪽으로 더 천천히, 더 집중해서. 어떻게 온 애쉴리인데. 정성껏 먹자. 엄청나게 큰 공간이 손님으로 꽉 차고, 음식은 재빨리 채워진다. 13,900원. 이 많은 메뉴를 다 먹을 수 있는 13,900원 뷔페는 방콕에도 없다. 세계 어디에도 없다. 애슐리에서 일하는 사람은, 얼굴이 노래지도록 움직인다. 노동 착취의 현장이자, 광기로 똘똘 뭉친 식탐꾼들의 지옥불이다. 나는 지옥불에서 다섯 접시를 비우고, 심지어 이글까지 쓰고 있다. 너무 큰 공간은, 누군가가 들고나는데 무심하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공간이다. 아메리카노와 물러 터진 고구마 케이크는, 진짜 사랑스러운 조합이다. 내 잇몸은 그만큼 짓무르겠지만, 행복하다. 비루한 글쟁이는, 지옥불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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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여행은 주로 방에 머물고, 이따금 나가고, 이따금 글을 깨작대며 보냈다. 정석항공과학고등학교에서 턱걸이를 할 때 가장 신선했고, 떡볶이에 삿포로 맥주를 마신 밤이 가장 피로했다. 저녁이면 생각으로 무거웠고, 아침의 나는 커피, 하며, 눈을 떴다. 배가 나온 아저씨가 아들과 배드민턴을 치고, 아주머니가 컨실러 곱게 펴 바르고 마트엘 간다. 공대생일 것 같은 친구들이 자취방 앞에서 담배를 피우고, 자전거를 타고 가는 외국인이 한국 여자에게 인사를 한다. 선배님, 안녕하세요. 유창하게. 애슐리에서 서로 입에 넣어주던 커플이 말싸움을 하고, 숭의역 가나요? 노부부가 내게 길을 묻는다. 누군가가 인천에서 살아요라고 한다면, 나는 화색이 돌며 아는 척할 것이고, 소래포구는 가장 못 생긴 포구라며 낄낄댈 것이다. 충동적으로 인천 버스를 타고는 인하대로 향할 것이고, 용현시장에서 반찬들을 사 모을 것이다. 커피에 반하다에서 아메리카노와 라테를 연거푸 마실 것이고, 입구와 두 번째로 가까운 자리에 앉아 지나가는 모든 인하대생을 힐끗댈 것이다. 스무 살의 나로 완벽히 돌아가진 못했지만, 스무 살의 나를 여기저기서 보았다. 생각보다 못 생겼고, 생각보다 뻔뻔해서, 지금의 늙음이, 안심됐다.
PS 글을 씁니다. 매일 작은 긴장감과 떨림을 글로 옮깁니다. 그래야 제가 살아있는 게 되니까요. 반갑습니다. 오늘도 잘 지내셨나요? 저도 괜찮은 하루였어요. 안부를 묻고, 안부를 확인하는, 가깝고, 만만한 글쟁이고 싶습니다. 글이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