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국 국경선에서 쫓겨난 사연

떠도는 글쟁이는 환영하지 않습니다만

by 박민우

(2018년 한 여름의 기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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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없어서 쫓아냅니다. 처절한 문구가 담긴 여권)


오늘은 꼭 여권 신청을 한다.


여권은 유효기간이 2025년까지다. 절반도 못 썼다. 하지만 새 여권이 필요하다. 나는 태국에서 입국 거절을 당했다. 한국 여권 소지자는 태국에서 최대 3개월을 머무를 수 있다. 3개월 이후엔 일단 태국을 떠나야 한다. 재입국을 하면 다시 3개월 머무를 수 있다. 그걸 비자 런(Visa run)이라고 한다. 군인들이 정권을 잡은 후에 엄격해졌다. 비자 런을 자주한 이들은 강제추방을 당했다. 특히 러시아 사람들이 많이 쫓겨났다. 방 보증금도 못 빼고, 짐도 못 챙기고 쫓겨났다. 연인과 강제로 헤어진 경우도 많았다. 자발적으로 태국을 뜬 외국인도 많았다. 어떤 사람은 되고, 어떤 사람은 안 되는데? 불안해서 살 수가 있어? 많은 이들이 태국에 실망하며 자기네 나라로 돌아갔다.


수많은 이들이 입국 거절을 당해도, 계속 비자 런을 했다. 내 운명은 석 달마다 갱신됐다. 믿는 구석이야 많았다. 잘 생긴 외모(끄덕끄덕), 동굴 저음, 글을 쓰는 작가, 글을 매우 잘 쓰는 작가, 한국이라는 국적. 여권을 의심스럽게 보면서 고개를 갸우뚱한다 싶으면 비장의 무기를 들이밀면 된다. 내 책이다. 책이 등장하는 순간, 내 목 주위로 광채가 형성됐다. ‘1만 시간 동안의 남미’나 ‘지금이니까 인도, 지금이라서 훈자’를 꺼냈다. 무릎이라도 끓어야 하는 거 아냐? 앉아서 여행의 신을 맞이하는 게, 출입국 직원들은 불편한 모양이었다. 90일 도장 쾅쾅 찍어서 서둘러 보내드리고 싶은 마음, 나를 조금이라도 오래 보고 싶은 마음. 내 책 표지만 보고도, 그들은 나를 존경하지 못해 안달이었다.


-육로로 가는 거면 내가 태워줄게.


친한 태국인 친구가 캄보디아 국경선 쪽에 갈 일이 있다고 했다. 나무 몇 그루를 사야 하는데, 그쪽에도 유명한 나무 시장이 있다는 것이다. 땅을 이미 사놓고 나무를 하나씩, 하나씩 채우고 있는 부티 철철 남자다. 육로로 비자 런이 가능할까? 비행기만 이용했던 나는 불안했다. 1년에 두 번까지는 육로로 이동이 가능하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그래서


쫓겨났다.


일단 캄보디아로는 아무 문제없이 넘어갔다. 즉시 태국으로 넘어가려 하니까, 캄보디아 사무소에서 푼돈 좀 달라고 해서, 몇 달러 줬다. 귀여운 뇌물이라고 생각했다. 태국 출입국 사무소. 마지막 관문이다. 나는 가방에서 요술봉, 내 책을 만지작, 만지작


-이리로 오세요.


책을 펼칠 틈도 없다. 50대로 보이는 군인 간부 앞에 앉는다. 그는 표정 없이 내 여권을 본다.


-나는 태국 맛집 책을 준비하는 작가예요.

-그럼 정식으로 비자를 신청해야죠.

-태국 대사관에 문의했어요. 작가를 위한 비자는 없답니다.

-그건 내가 알 바 아니고.

-이런 책을 쓰는 작가입니다(지금이니까 인도, 지금이라서 훈자를 들이밀었다)

-그건 됐고, 600달러 있어요? 없으면 추방입니다.

-신용카드 있어요. 지금이라도 현금 인출기에서 뽑아올 수 있어요.

-아니요, 현금 600달러가 있냐고요. 없으면 추방입니다.

-태국으로 못 돌아가나요?

-캄보디아에서 비행기 표를 사세요. 비행기로는 입국이 가능해요.

-확실해요?

-100% 확실해요. 내가 보장하죠.


레이건이라는 영국 친구는 그때 수중에 600달러가 있었다. 육로로 두 번만 비자 런이 가능한데, 세 번째였다. 레이건은 하지 말라는 짓을 해서 걸린 거고, 나는 꽤나 억울한 경우다. 레이건이 내 뒷주머니에 스텔스기처럼 날렵하게 600달러만 꽂아주면, 나는 무사히 태국으로 되돌아갈 수 있었다. 우리가 처음 본 사이라는 게, 600달러를 꺼낼 수 없는 유일한 장애물이었다.


태국 친구는 어떻게 된 거냐고 문자 메시지를 보냈다. 국경을 넘으니, 통신 서비스도 사라졌다. 답도 할 수 없다. 태국 친구는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나? 지옥이 된다. 기약 없이 기다리는 사람도 있고, 기약 없이 내동댕이 쳐진 나도 있다. 현금은 없다. 신한카드 한 장뿐이다. 태국도 아니고, 캄보디아다. 카드가 안 되면, 나는 끝장이다. 레이건도 여자 친구와 생이별을 했다. 여자 친구가 태국 사람이었지만, 쫓겨나는 걸 막지는 못했다. 상대적으로 레이건이 훨씬 여유가 넘쳤는데, 여자 친구를 다시 못 봐도 웃기로 한 모양이다. 나의 웃음기는 사라졌다. 그냥 베트남을 다녀올걸. 몇 푼 아끼려고 이 지경이 되었다. 모든 결과를 알고 나면, 우린 가장 현명해진다. 캄보디아 씨엠립 여행사에서 레이건과 나는 항공권을 구입한다. 예상대로 비쌌다. 살 수 있다는 게 다행이었다. 나의 신한카드는 움직인다.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앙코르와트가 코앞이지만, 우린 방콕만 가고 싶다. 방콕이면 된다.


-발권이 안 됩니다.


캄보디아 씨엠립 공항에서 레이건의 웃음까지 싹 사라졌다. 비행기 표까지 샀는데, 자리를 못 내주겠단다.


-헤이, 미스터 박. 당신의 여권엔 돈이 없어서 쫓아냅니다라고 쓰여 있어요. 태국 말로요. 발권해줄 수가 없어요. 600달러는 있나요?

-헤이, 레이건. 당신은 불법으로 태국으로 입국하려고 했어요. 여권에 쓰여 있어요. 발권 불가입니다.


그러니까 출입국 간부는 싱글거리면서, 예의 바르게, 저주의 주홍글씨를 쾅쾅 박아놓은 거였다. 이때 살짝 태국에 정이 떨어졌는데, 그 간부가 너무 정중해서였다. 목소리도 일정한 톤을 유지했다. 침착하게, 우리 둘을 궁지로 몰아넣고는, 지금쯤 퇴근해서 저녁밥을 물렸을 것이다. 커피로 입가심도 하겠지. 당신들은 100% 돌아올 수 있어요. 일단 돈 없는 거지라고 써놓기는 합니다. 그 간부는 악마다. 진짜 악마!


-레이건 꿔줄 돈 있어?

-나도 있어야지. 방콕 공항에서 또 보여 달라고 할 수도 있는데


나라도 안 꿔준다. 현금 인출기를 찾는다. 뛴다. 피가 마른다. 현금 인출기가 세 대 연달아 있다. 착해 보이는 놈을 고른다. 착한 현금 인출기에 카드를 넣고, 현금 서비스를 누른다. 캄보디아 현지 화폐가 아니라, 달러를 뽑는다. 우리나라 현금 인출기에서 달러를 뽑을 수 있나? 없다. 캄보디아는 되나? 되겠지. 될 거야. 캄보디아는 달러를 쓰잖아. 알지만, 그 달러를 기계에서, 꿔본 적 없다. 신한카드야 제발!


드르르륵륵


달러를 세는 기계 소리를 다 듣고 나서야, 숨을 내쉴 수 있었다. 레이건은 여자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방콕에서 베트남으로 가는 항공권을 끊으라고 했다. 그러니까 우리는 현금 600달러와 태국에 입국해서, 다른 나라로 출국하는 항공권까지 보여줘야 했다. 삼십 분 동안 100개의 머리털은 더 잃었을 것이다. 우리 둘 다. 영혼이 탈탈 털린 하루였다. 다행히 내겐 아시아나 마일리지로 끊은 한국행 항공권이 있었다. 돈 없어서 쫓아냄. 태국 글자로 또박또박 쓰인 그 여권.


나에겐 새 여권이 필요하다.


PS 매일 글을 씁니다. 글이 누군가에게는 글 이상일 수도 있지 않을까요? 하필 제 글이요. 그런 희망으로 씁니다. 지금 제 글을 보고 계시나요? 제 희망의 증거입니다. 반갑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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