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1세대 작가, 이지상 작가를 만난 날

참 더운 날, 건대에서의 데이트

by 박민우

(2018년 8월, 한 여름의 기록입니다)

(세련됨과 구수함의 조화, 건대앞이 최고십니다)


맘마미아 2가 개봉 중이다. 맘마미아 1을 언제 봤더라? 2008년이다. 십 년이 사라졌다.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다. 시간은 늘 똑같이, 정확한 속도로 흐른다고? 늘, 한결같이, 똑딱똑딱? 그렇다면 그런 줄 알라? 이런 날강도 같은 시간 새끼. 이대로라면 파도처럼 밀려드는 시간에 휩쓸려버리게 된다.


신한은행 ATM을 찾는다. 찾았다. 씨티은행 카드만 있다. 씨티은행 ATM이 어디 있더라? 십 분 정도 헤맸다. 없다. 포기하자. 눈앞의 농협으로 간다. 씨티은행 카드를 넣는다. 씨티은행 카드에 농협이라. 뉴욕 록펠러 센터에 하나로 마트가 개장한 느낌이다. 멍청아, 신한은행 카드는 왜 놔두고 왔어? 그래 수수료 천 원 낸다. 참담한 마음이다. 돈이 나온다. 수수료 0원. 응? 공짜?


왜 그러냐고 묻고 싶지만 못 묻겠다. 고객님, 착오가 있었네요. 수수료 제게 직접 지불하시면 됩니다. 상냥하게 삥 뜯을 텐데. 그냥 조용히 나온다. 이 신비는, 그냥 내가 외계인이라서다. 나야말로 정말 별에서 왔다. 양말 한 짝씩 사라지는 거, 부주의해서 없어지는 거 아니다. 별에서 수거해간다. 나와 같은 외계인들이 장난치는 거다. 돌고래가 사람한테 놀아달라고 끼 부리는 것처럼. 조직적으로 양말이 사라지고, 그 양말은 지구 어디에도 없다. 블랙홀과 시간 이동의 비밀은 양말에 있다.


약속 시간은 한 시 반. 미리 건대 앞을 탐색한다. 2018년 여름 매일매일 덥지만, 오늘은 진짜 지지는 더위다. 살갗 타는 소리가 들린다. 지지직


건대는, 건국대 앞은 인하대만큼이나 좋다. 참기름 가게, 구멍가게, 철물점, 야쿠르트 가게 사이사이 카페가 있고, 술집이 있다. 놀기 좋고, 먹기 좋다. 전국에서 가장 생기발랄한 대학가다. 일주일만 여기서 머물까? 8월 말부터 강연 스케줄이 빽빽하다. 톱스타급 바쁨이다. 왜들 이러시나? 별에서는 더 잘 나갔어. 그깟 지구 톱스타. 한 시 반 약속. 우리는 진즉부터 왔지만 정확히 한 시 32분에 만난다. 한 사람은 출구 안, 한 사람은 출국 밖. 건대입구역 6번 출구. 정확하고, 배려가 있는 만남.


드디어 만났다. 땡볕, 걷는다. 양산을 계속 쓰고 싶다. 남자 대 남자. 나보다 십 년 이상 어른. 양산을 펼치고, 선배님, 같이 쓰십시다. 당당하게 그의 머리에 그늘을 만든다. 마지못해 그가 받아들인다. 한 양산에 두 남자. 해볼 만한 도전이라고 생각한다. 못 하겠다. 그냥 태양 새끼, 너 맘대로 지져.


장소는 그가 정했다. 까만색에 큼직한 꽃들이 박힌 셔츠에 파마머리, 내키면 혼자서 건대 주변을 거닐면서 우육면을 먹고, 팟타이를 먹는 멋쟁이. 차이나타운을 보여주고 커먼 그라운드에 있는 방콕 야시장으로 간다. 지금도 젊지만, 이십 년 전 그가 궁금하다. 집중력 강하고, 까칠하고, 낭만 터지는 나그네였겠지. 팟타이, 돼지고기 바질 볶음밥, 똠얌꿍을 시킨다. 포크 두 개를 내게 건네고, 그도 포크 두 개다. 두 개의 포크로 달걀부침 편하게 찢고, 면을 퍼 담으세요. 큰 뜻이 담긴 것 같지는 않은데, 은근하게 따뜻하다. 중간에 휴지가 없을 때는 그가 휴지를 가져왔고, 빈 컵에 물을 따라줬고, 볶음밥의 달걀은 내 앞 접시에 담아줬다.


카페로 갈까요? 내가 배가 고파 보인다고 더 먹이려는 걸 말리고, 카페로 갔다. 서점이자 카페였다. 당연히 내가 낼 차례다. 한사코 못 내게 한다. 내 책이 꽂혀있나 보라고 한다. 없다. 그 사이 커피 값까지 낸다.


6,70년대 히피들처럼 살고 싶었다. 그저 자유롭고, 그저 떠남이 좋았다. 갑작스러운 아버지의 죽음, 어머니의 병환, 어머니의 떠남, 결혼이 동시에 찾아오고. 그는 자기에게 꼭 맞는 ‘자유’를 포기한다. 그동안 누볐던 시간을 꾹꾹 눌러 책으로 남긴다. 이지상. 여행 1세대의 대표작가, 진짜 여행 작가, 진짜 선배. 문장에 고민과 포기와 가벼움을 인두로 지지는 작가.


자신의 블로그 글에 좋아요를 누른 사람이 고마워, 연말을 부러 기다려 감사의 인사를 장황하게 남긴 남자. 좋아요를 누렀던 남자는 '그냥' 눌렀던 남자. 상처는 순수한 사람의 몫. 우리 별에선 이런 사람이 아이돌이다.


10년이 지나면 더 글을 못 쓸 거라고 한다. 내 나이 이후로 급격히 외로워졌다고 한다. 사십 대 중반까지는 세상과 함께라는 느낌을 받았는데, 이후로 외떨어진 기분이 들더란다. 그 말을 들었을 때 나는 자신만만했다. 아닐 걸요. 나는 다를 걸요. 다가오지 못한 시간을, 자신하는 내가 위태롭다.


그는 한사코 내게 돈을 못 내게 했다. 내가 거지인 걸 두루두루 알리는 이유다. 내 블로그 조금만 보면, 나를 사주고 싶어 하게 돼있다. 나는 나보다 어린 문상건 작가에게도 밥만 사줬다. 커피는 얻어 마셨다. 밥이 비싸니까, 커피는 얻어 마셔도 된다고 생각했다. 인천에서는 심지어 선필이에게, 스물다섯 살 선필이에게 내내 얻어먹었다. 마지막 식사를 끝내고, 그는 계산서를 들었다. 선필이는 내가 계산서 들까 봐 먼저 계산을 끝냈다. 그리고 계산서를 또 들었다. 나 무안하지 말라고. 나는 그러니까, 계산서를 들고, 내가 낼게, 실랑이만 좀 하면 되는 거였다. 할리우드 액션만 하면 되는데 그걸 안 했다. 대접이 당연하고, 내 것이 더 소중한 톱스타병 남자. 차라리 대범하게 잘 먹었다. 껄껄껄. 조선시대 한량인 척이라도 하든가! 쥐새끼처럼 내는 척 못한 걸 후회한다.


내 삶의 화두는 자유다.


나의 보기 싫은 모습도 과정이라 믿는다. 나의 과정은 공개된다. 그러니까 여러분은 불쌍하게 생각해도 되고, 혐오해도 된다. 언젠가는 자유로워질 테지. 번지 점프도 못 하겠다. 무사할 걸 알면서도, 발목에 매달린 끈을 못 믿겠다. 진짜 자유는 끈이 풀려도, 지금까지의 호흡을 유지하며, 중력이 원하는 곳으로 힘차게 나는 것.


시간은 엄청난 속도로 우리를 빨아들이고 있다. 빨려 들고 있다. 마지막의 마지막. 뒤늦게 눈치챈 이들이 몸부림칠 것이다. 빠져나오려 할 것이다. 그때, 그 속도를 즐기며 끝의 끝으로 오히려 달려가는, 날아가는 나를 꿈꾼다. 오해 마시길. 삶의 애착이 누구보다 강한 나는, 그게 궁극의 삶의 기술이라 여긴다. 죽음의 기술이 아니라. 한없이 가벼워져서는, 시간의 방향으로, 흐르고, 타고, 넘실대면서 내 안의 자유를 모두 쓴다.


나는 가벼워질 것이다.


PS 매일 글을 씁니다. 다들 뭐라도 하잖아요. 저는 씁니다. 새로운 인연을 만들고, 오랜 인연을 곁에 두고파서 씁니다. 반갑습니다. 감사합니다. 같은 별에서 태어났으니, 이왕이면 가끔 인사라도 주고받으며 살아요. 우리는 모두 아프니까, 불완전하니까, 흔들리니까, 반짝반짝. 우리가 별, 우리가 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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