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어머니는 사서 걱정한다

우리가 오늘도 무사한 이유

by 박민우

(2018년 8월의 기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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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산에 간다. 서산여고 강의.


내일은 다산북살롱 강의가 있는 날. 수강생들의 부암동 여행기를 보고, 교정을 한다. 교정이라기보다는 말 줄이기. 오늘의 일기를 서산 다녀와서 쓸 수 있을까? 피곤하겠지. 써야지. 쓸 수 있을까? 물을 때부터, 약해져도 된다는 뜻. 내게 ‘약해짐’ 쿠폰은 없다.


가방에 김밥 두 줄. 단무지 대신 오이지, 시금치 대신 집에서 키운 깻잎, 어머니 김밥이 가방에 있다. 여행이 된다. 강남고속버스 터미널로 간다.


10시 40분 버스. 6분 남았다. 뜨거운 아메리카노를 한 잔 주문하고, 화장실 다녀오고, 커피 찾아서, 서산행 우등고속 맨 뒤, 바로 앞, 1인 석. 커피 놓을 홀더가 없다. 우등고속이라며? 버스가 부릉, 한참을 들고 있다. 너무 뜨겁다. 마시다가 아뜨뜨, 흘려선 안 돼. 그저 들고만 있다. 아침 공복의 커피. 쓸데없는 로망. 뜨거운 커피의 인질이 됐다. 꼼짝 못 하는 중.


첫 모금, 맛있다. 두 번째 모금, 잘 모르겠다. 약간 맛있다.


그게 어디? 무선 이어폰을 반품했다. 고막의 통증, 철렁했다. 쾌락을 함부로 탐하지 말 것. 교훈은 절제다. 곰곰이 생각한다. 첫날의 황홀함, 첫날의 자유. 첫 경험의 짜릿함. 짧아도, 황홀은 황홀. 짧아서 더 황홀. 사흘간의 황홀이 어디? 사흘 황홀했다면, 고막쯤이야. 공복에 아메리카노. 첫 모금만 좋다면 마셔야 한다. 뒤따르는 싫증도 예쁘다. 변덕도 기복도 소중한 감정.


뜨거운 커피는, 그물망에 넣으니까 끄떡없음. 우등고속이 컵 홀더를 없앤 이유


강의가 전혀 긴장되지 않는다. 딱히 준비랄 것도 없다. 아이들에게 좀 더 쉽게, 좀 더 친근하게. 최소한의 고민이라도 해야지. 고민이 안 된다. 내 삶을, 내 여행을 전하는 날. 더할 것도, 뺄 것도 없다. 세상 편하다. 나는 김밥을 꺼내고, 질겅질겅 창밖을 본다. 풍경은 볼 품 없다. 뒤에서는 할아버지, 할머니 부부가 편의점 도시락을 드신다. 할머니, 할아버지, 나. 총 세 명은 밥을 먹는다. 서로에게 미안하지 않아서, 천천히 먹어도 되는 시간. 이 더운데 애는 왜 나오라고 그래? 우리가 간다고 그래. 할아버지는 마중 나올 자식이 걱정이다. 우린 먹고 왔다. 밥은 무슨, 그냥 집으로 가자. 어머니, 아버지의 작전. 나는 안다.


서산터미널에서 시내버스를 또 탄다. 고구마가 통째로 사라졌으어. 고구마가? 멧돼지구먼. 멧돼지 아니여. 이파리까지 다 쓸어갔어. 도둑이 사나벼. 버스 안에서 멧돼지와 도둑과, 태풍과 깻잎 이야기가 오간다. 서산으로 오니 엿듣는 이야기의 레벨이 확 올라간다. 도둑이 아니라, 멧돼지였으면 좋겠다.


서산여고 실내체육관, 백 명 이상의 친구들이다. 생각보다 큰 공간. 내 목소리가 마이크를 타고 쩌렁쩌렁. 주의가 산만하다 싶으면 내가 나온 세계 테마 기행 영상을 틀어준다. 기승전결. 긴장감 충만한 강연을 꿈꾼다. 클라이맥스에서 숨도 못 쉬는 청중을 보고 싶다. 당장은 주의가 산만해지면 세계테마기행을 보여주는 반칙 강연자. 강연에서 구성은 뭘까? 어떻게 시작해야, 클라이맥스로 이어질까? 서산여고 학생들의 끊임없는 질문에 놀란다. 서산여고 친구들에게 좋은 인상을 받는다.


선생님과 함께 서산 꽃게장에서 간장게장을 먹는다. 은퇴하신 음악 선생님인데, 오늘 강의도 선생님이 연결해주셨다. 유명 작가나 사진작가들이 소규모로 투어를 한다고 한다. 1인 기업이다. 음악 선생님도 그렇게 러시아를 다녀오셨다. 작가들이 직접 신청을 받고, 여행을 다닌다. 나는 못 하겠다. 돈이 오가는 일이다. 뒷말이 두렵다. 나는 바둑으로 치면 하수 중의 하수. 바로 앞의 수만 본다. 좀 더 크게 보고, 본질을 본다면 당장의 반응은 담담해질 수 있다. 작가와의 여행, 누군가에게는 평행 잊지 못할 여행이다.


내가 지금 여행 따위로 지면을 낭비할 때가 아니다. 역사적인 게장이다. 서산 꽃게장. 우라지게 비싸다. 간장게장 1인분 22,000원(큰 거). 딱 한 마리 나온다. 장난해? 태재고개(분당 서현역에서 안 멀다) 꽃담우란 식당이 있다. 18,000원에 간장게장, 양념게장을 무한대로 준다. 엄청 맛있고, 살도 많다. 딱 한 마리의 게가 얼마나 맛있어야 22,000원인가? 하, 젠장! 이보다 더 맛있는 게는 없다. 확실하다. 꽉 찬 알, 꽉 찬 살. 절대 짜지 않은 짠맛. 그렇게 한 마리. 양에 대한 집착이 사라진다. 너무 완벽하니까, 더 먹고 싶다는 마음이 안 생긴다. 이 살점을, 이 양념을 정성껏 깨끗이 먹고 싶다. 엎드리고 싶다. 절하고 싶다. 2018년 8월 22일, 기억해야 마땅한 하루.


뭐를 좀 더 먹고 들어갈까? 예를 들면 떡볶이? 분당 버스 터미널에서 내렸다. 집요한 식탐에 귀를 기울인다. 바람이 많이 분다. 어서 들어왔으면 해. 어머니의 카톡. 태풍 '솔릭' 뉴스 때문이다. 네, 알겠어요. 집으로 가자. 버스를 총 두 번 타야 하는데, 첫 버스에서 잘못 내렸다. 버스가 왜 이리 안 오나? 한참 기다리다가, 알았다. 잘못 내렸구나. 한 정거장을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으스스하다. 어둡고, 국도다. 시체를 유기하기에 딱 좋은, 천혜의 음침함. 무섭진 않은데, 우울하다. 차라리 무섭고 싶다. 뚜벅뚜벅. 30분 안에 차를 갈아타야 한다. 차비를 한 번 더 내면, 짜증 날 것 같다. 아들 어디? 어머니의 카톡. 어머니는 46살 아들이 아직도 유치원생. 무슨 걱정을 그리 사서 하시나요. 답을 하려다 만다. 무슨 한 정거장이 이렇게 멀어? 겨우겨우, 정류장! 아슬아슬 버스. 지갑을 갖다 댄다.


환승입니다.


30분 안 넘었다.


집으로 간다.


가요. 걱정 마세요. 그제야 답을 한다. 세상의 어머니는 사서 걱정한다. 아들의 불행을 산다. 아들의 사고를 산다. 어머니가 있는 집으로 간다. 세상의 아들이, 딸들이 무사한 이유는 어머니다. 어머니는 늘 하늘에 닿는다. 어머니만 가능하다.


나는 집으로 간다.


PS 매일 글을 씁니다. 작은 몰입으로, 저만의 기다란 띠를 만들고 싶어서요. 달에서도 보였으면 해요. 가늘지만, 너무 길어서. 그 기다란 끈이 여러분에게도 닿았으면 해요. 거창하지 않게, 대단하지 않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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