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부모와 치앙마이 한 달 살기- 미스터 트롯에 홀린 밤

어쩌면 사무치게 남을 밤, 그깟 냄비 잘 태우셨어요

by 박민우

(원래 안 올리려고 했던 에피소드인데요. 너무 반응이 폭발적이라, 뺐던 건데 굳이 실어요. 어제 실었던 내용보다 과거 시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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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가가 타고 있어서 껐어. 뭐. 괜찮아. 신경 쓰지 마.

집주인 카렌은 방문을 두드리더니, 부엌에 좀 가보라고 했다. 냄비 바닥이 숯검댕이었다. 내일은 방을 빼는 날이다. 오징어 볶음을 하고, 한 줌 생강이 남았다. 아까워서 어머니는 물을 넣고 끓이셨다. 진한 생강차를 먹고 싶으니, 중불로 삼십 분. 오징어 볶음을 든든히 먹고는 잠들어 버렸다. 어머니도, 아버지도, 나도. 하필 집주인 카렌이 들이닥친 날이다. 내내 안 보여서, 끝까지 안 보일 줄 알았다. 나는 약간 공황 상태가 된다. 울타리에 주렁주렁 어머니 빤스, 내 빤스가 걸려 있다. 총 세 개의 방이 있는데, 우리만 빨래를 한다. 다들 동전 세탁기에 돌린다. 카렌의 눈에 어떻게 보일까? 방바닥이 차갑다는 이유로, 반찬이 바닥에 떨어지는 게 싫다는 이유로 아버지는 수건을 깔아라 명하셨다. 그 위에 겉절이 김치와 밥, 그리고 오징어 볶음을 내려놓는다. 카렌은 정원에 물을 주고, 쓱싹쓱싹 비질 중이었다. 자기네 수건이 방바닥 식탁보로 쓰이는 걸 어떻게든 몰라야 한다. 스코틀랜드인 카렌은 매일 청소를 한다. 요 며칠 가족과 피피섬으로 휴가를 다녀와서, 자리를 비웠을 뿐이다. 중국 상하이에서 8년을 머물며 인테리어로 돈을 벌었다. 빠이에도 소품과 액세서리를 파는 가게를 가지고 있다. 에어비엔비 숙소도 한 채가 더 있다. 아버지는 이 방이 형편없다 하셨다. 고기를 자르는 칼, 채소를 써는 칼이 종류별로 있고, 냄비도, 프라이팬도 크기별로 있다. 아시아 요리책까지 구비해 놨다. 주방 앞 작심하고 꾸며 놓은 미니 화단도, 벽에 매달아 놓은 다섯 개의 소쿠리도, 가운데 소쿠리만 빨간색인 것도 카렌의 안목이다. 누구나 예쁘다고 할 순 없겠지만, 평범한 숙소는 결코 아니다. 벌레에 민감하면 절대 비추천이지만, 자연과 감각, 자유로움에 후한 점수를 준다면 강력 추천한다. 구글맵 The look out pai로 검색할 것. 주렁주렁 손님 빤스는, 꼼꼼하고, 자부심 넘치는 인테리어 업자에게 어떻게 보일까? 냄비까지 태웠다.


-우리 집이라고 생각해 봐요. 누가 잠깐만 들어와도 난리면서, 남의 집이라고 가스 불 켜놓고 잠이 들어요? 나무집이라고요. 그냥 다 홀라당 타버리는 나무집이라고요. 그깟 생강 하나로 남의 집 홀라당 태워먹을 뻔했다고요.

어머니는 베이킹 소다와 식초를 풀어서는, 냄비 바닥을 수세미로 벅벅 문댄다.


-민우야, 팔이 마비가 오는 것 같다. 놀랐나 봐. 아이고 놀래라.


아버지는 집에서 해 먹으면, 혈색이 도신다. 더 맛있고, 돈도 아끼는 한식이 무조건 최고다. 간장과 마늘로 맛을 낸 오징어 볶음에 아버지의 젓가락질이 빨라지신다. 실제로 집을 태웠다면, 나는 가장 침착하고, 따뜻해져야 한다. 어머니를 지키고, 안심시켜야 한다. 어머니는 가스불 올릴 때 내게도 알리셨다. 민우야 가스불 켜놨다. 한 귀로 흘려듣고는, 어머니만 몰아세운다. 배신의 현장은 가족 안에서도 얼마든지다.


마사지사를 숙소로 불렀다. 경력 20년 차 마사지사가 어머니의 뭉친 팔다리를 풀어줄 것이다. 아버지는 죽어도 안 하신다기에, 더 이상 권하진 않았다.

낮에는 Cocolino라는 식당을 다녀왔다. 오토바이를 빌려서, 어머니를 태웠다. 뜻밖의 오르막 길에서 어머니와 나는 한쪽으로 쓰러질 뻔했다. 동시에 비명을 지르고, 가까스로 중심을 잡았다. 하필 문을 닫은 날이다. 오토바이도, 우리도 무사했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운이 좋은 날이었다.

-뭐 안 사 먹어도 되는 거지?

어머니는 돈 한 푼 안 내고 인생 사진을 찍었음에 감격하셨다. 대나무로 얼기설기 꾸며놓은 식당이다. 국수를 30밧(1,200원)에 파는, 그냥 밥집이다. 말도 안 되는 풍경을 작은 밥집이 거느리고, 독점한다. 참 좋은 날씨, 좋은 곳에 와있다. 갑시다, 어머니. 오토바이 속도를 올릴 때, 어머니는 아아 좋다 하셨다. 내 허리를 꼭 안으셨다.

시장에서 큼직한 망고 두 개를 사서 하나씩 깎아 먹었다. 이렇게나 달다니. 이렇게 크다니. 이렇게나 싸다니. 하나에 천 원 밖에 안 하는 망고에 반해서 입을 못 다무셨다.

어젯밤에는 미스터 트롯을 틀어드렸다. 어린 출연자들이 구성지게 부를 때마다 감전된 듯, 입만 뻐끔하셨다. 폐암에 걸린 할아버지를 위해 출연했다는 어린 손주의 울음에 함께 눈물을 찍어내셨다.

-민우야, 고맙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지난 방송을 볼 수 없다. 검색하고, 클릭하는 모든 행위가 어렵고, 두렵다. 한 번이라도 잘못 누르면 통장 잔고가 0원이 되고, 집문서가 날아갈 것만 같다. 의심스러운 짓은 절대로 하면 안 된다. 듬직한 아들 덕분에 태국의 시골에서 '내일은 미스터 트롯'을 본다. 고맙다는 말이 절로 나온다. 출연자들이 하나같이 대단해서, 오금이 다 저린다. 어둡다 싶은 방이, 사실은 미스터 트롯을 감상하기 딱 좋은, 영화관 같은 방이었구나. 구성진 트로트가 울려 퍼지는 동안 도마뱀과 새와 개구리가 운다. 한심하고 대책 없는 아들의 삶이 설핏 이해도 된다. 등 따습고, 배부른 것들이 여행 여행하는 이유도 조금은 알 것 같다. 우리 한국 갈 날이 며칠이나 남았지? 왜요? 더 있고 싶어서? 아니. 이런 말들이 오간다. 이런 삶도 있구나. 이런 시간도 있구나. 이런 밤도 있구나. 모든 게 처음이라서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뿌연 시야만큼 불확실한 밤이지만, 일찍 죽은 친구들은 모르는 세상이다. 어머니는 갑자기 심장이 멈춰서, 며칠 전 죽은 친구가 스쳐 지나간다. 다음 주 미스터 트롯도 태국에서 보게 되는구나. 아이처럼 날짜를 세신다. 숲 속의 밤은 길기도 하고, 짧기도 하다.


PS 매일 씁니다. 저는 반짝입니다. 이렇게 사나, 저렇게 사나 늙고, 죽습니다. 그래서 작은 몸부림으로, 내가 반짝인다고 믿는 순간을 만들죠. 쓰는 거죠. 그게 저에겐 반짝이는 시간입니다. 저의 반짝쇼에 찾아와 주셨습니다. 무한한 영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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