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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부모와 치앙마이 한 달 - 매일매일 수명 단축 엉엉

속이 까맣게 타들어가도, 내일은 좀 더 나아질 걸 믿습니다

by 박민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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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 형님 덕에 편하게 여행했습니다. 고맙습니다. 꾸벅)

-태국 음식 말고, 한식 먹으면 안 될까?


어머니가 차 뒤칸에서 다 죽어가신다. 꽃이 만발한 식당에서 태국 음식을 드시고, 오성급 호텔에서 양식을 드셨다. 땅 형님이 떠나면 차도 없다. 더 화려한 곳에, 더 많이 가야 한다. 크고, 웅장한 곳에서 입을 뻐끔거리셔야 한다. 화려하다고 입소문 자자한 식당을 가는 길이었다. 웬만하면 아들이 하자는 대로 합시다. 입에 안 맞아도, 피곤해도 맛있다, 재밌다 합시다. 나 없는 곳에서 어머니, 아버지는 다짐하셨다. 더 이상 못 참겠다. 어머니의 느끼한 속이 반기를 든다. 이게 저 좋자고 하는 거예요? 어머니, 아버지를 위해서잖아요. 나의 호의는 이렇게 무산되는 건가? 반포와 목동의 부모는 아이를 들들 볶는다. 학원을 보내고, 비싼 보약을 먹이고, 미래와 연애까지 통제하려 한다. 너네 잘되라고 그러는 거야. 아이들이 시들어가도, 콧방귀도 안 뀐다. 나중엔 고맙다고 할 걸? 지금의 내가 비슷하다. 더 좋은 곳, 더 신기한 음식을 하나라도 더 맛보게 해드리고 싶다.


-알겠어요. 한식집으로 가요.


솔직하게 말씀해 주신 어머니가 고마웠다. 아들 눈치 본다고 태국 음식을 드셨다면, 밤새 부대끼셨을 것이다. 나만 좋은 일이 될 뻔했다. 선의면 모든 것이 용서된다고 생각했다. 나를 반성한다. 어머니의 바람대로 한식당으로 방향을 튼다. 아버지는 또 한 번 사장을 찾으신다. 지난번엔 물을 그냥 줬다. 이제는 보리차 티백을 넣은 물병을 20밧(800원)에 판다.


-아버지. 보리차가 한국에선 싸도요. 물 건너오면 비싸져요. 보리차 800원이면 싼 거예요.

-왜, 지난번엔 공짜였는지 물어는 봐야지.

-아, 아버지.


공을 보면 조건 반사적으로 달려드는 고양이와 완전히 같다. 한국인만 보면 무조건 말을 거신다. 따질 게 있다면, 꼭 다지셔야 한다. 나를 골탕 먹이고 싶으신 걸까? 공놀이처럼 정말 재미나셔서일까? 태국 사람들에겐 또 일본말을 하신다. 90년대 초 오사카에서 일용직으로 돈을 모으셨다. 생활 일본어를 하신다. 태국인에겐 무조건 일본말이다. 아리가또. 오하이오. 곰방와. 오이시이. 일본인 단체 관광객이 지나가면, 일본어는 깔끔하게 자취를 감춘다.

-아버지. 도모다찌(친구) 저기 많아요. 어서 가서 이야기 좀 나누세요.

-어어. 이 녀석이. 버르장머리 없이.

일본인들과 눈이라도 마주칠까 봐 시선을 바닥에 고정시키신다. 콧물은 공중에 분사시키는 걸 즐기신다. 나는 흉내도 못 낸다. 손가락 두 개로 양쪽 콧볼을 누르고는 히이잉 말울음소리를 내신다. 웬만한 곤충은 다 작살내는, 무시무시한 속도의 콧물이 땅바닥에 내리 꽂힌다. 하루 최소 다섯 번, 콧물 발사를 실시하신다. 누군가가 손가락질을 한다면, 군말 없이 욕먹겠다. 민폐 가족으로 낙인찍히겠다. 아버지와의 다툼이 더 피곤하다. 내가 제지할수록 아버지는 더, 더 어긋나신다. 이제 콧물 발사는 아무렇지도 않아서, 각도와 속도를 좀 더 차분하게 관찰하는 중이다. 진상 가족이 되는 게, 이렇게나 쉽다.

-진짜 아침 드시러 안 나가실 거예요?

-우린 바나나 먹을래. 먹고, 와!

-제가 카톡하면 열어 주세요. 진동 모드면 안 들리는 거 아시죠?

-진동 아니야.

-확인하셨죠?

-확인했다니까.


숙소 카드키가 꽂혀 있어야 전기를 쓸 수 있다. 어머니가 1층까지 내려와서 문을 열어주셔야 한다. 이놈의 아파트는 왜 카드키가 하나뿐인 거야? 처음 묵었던 숙소도 그랬다. 키 꽂는 곳에 신용카드를 꽂았더니 전기가 돌아갔다. 카드키를 가지고 나올 수가 있었다. 이번 숙소는 그것마저 안된다. 계속 꽂아둬야 한다. 땅 형님은 아버지 입에 꼭 맞는 태국 음식은 얼마든지 있다고 자신했다. 결국 실패했다. 땅 형님 말씀이라면 무조건 오케이 하시는 아버지라, 나도 기대했다. 결국 아버지는 세븐 일레븐에서 산 참깨 두유에 바나나를 택하셨다. 아버지, 어머니는 숙소에 남고 땅 형님과 숙소 앞에서 쌀국수를 먹는다. 쌀국수를 먹고 땅 형님은 공항으로 간다. 이젠 나 혼자 어머니, 아버지를 책임져야 한다. 도망가고 싶다. 방콕 가는 형님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다.

-왜? 어머니가 전화기를 안 받으셔?


그럴 리가 없다. 카톡 음성통화로 열 번이나 걸었다. 안 받으신다. 아버지 핸드폰도 불통이다. 오전 여섯 시를 약간 넘은 시간. 드나드는 사람도 없다. 아무도 없어요? 소리를 지른다. 태국에선 소리를 지르는 건 큰 무례다. 어쩌겠는가? 내가 무례해야 땅 형님이 비행기를 탄다. 강화 유리문을 쿵쿵쿵 두드린다. 아무도 없어요? 아무도 없나요? 혹시 어머니, 아버지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걸까? 침착하자. 침착하자. 방법이 있을 거야. 방법이 있을 거야. 일단 집주인에게 메시지를 보낸다. 에어비엔비 애플리케이션으로 메시지를 보낼 수 있다. 건물 입구의 번호로 전화도 걸어 본다. 관리인의 번호일 것이다. 안 받는다. 아침 여섯 시에 누가 전화를 받겠어? 삼십 분만 지체되면 비행기를 놓친다. 괜찮다면서 땅 형님은 입을 닫았다. 침묵. 땅 형님이 화내는 걸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저 정도면 매우 당황한 상태다. 아니, 어머니, 제발 전화 좀 받아요. 서른 번째 전화를 시도할 때 누군가가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온다. 아, 살았다. 아, 살았다. 다급한 마음으로 7층 방으로 올라간다. 어머니, 아버지는 평온한 자세로 TV를 보고 계신다.

-왜, 전화 안 받으세요?

-응, 안 왔는데?

어머니 전화기를 확인한다.

-왜, 인터넷을 꺼놓으셨어요? 와이파이를 닫아 놓으셨잖아요.

-그거, 소리 나는 거 아니었어? 소리가 커서 내가 줄여놓았는데?

아버지는 와이파이 메뉴가 볼륨 조절 메뉴인 줄 아셨다. 어머니 폰까지 깔끔하게 와이파이를 닫아놓으셨다. 그렇게 아들과의 카톡을 끊어 놓은 뒤 평온한 자세로 TV를 보고 계셨다.

-아니, 너는 한 번 전화를 해봤어야지. 나가기 전에. 어미 말만 믿으면 어떻게 해?

-어머니이이이이이이

형님 저 좀 데려가요. 방콕으로 데려가요. 매일 피가 말라서, 제가 먼저 죽을 것 같아요. 형님, 저 좀 데려가요.


PS 매일 글을 씁니다. 완벽하지 않은 가족과의 여행 이야기입니다. 보고 배우라는 게 아니라, 어쩔 수 없을 땐 불완전해지는 것도 방법이라는 걸 알려 드려요. 작은 재미, 작은 위로가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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