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가능은 없다. 정말 그렇더군요
이번 여행기가 너무 폭발적인 조회수를 기록해서요. 여행기 앞 이야기도 전합니다. 네, 여전히 재미있사옵니다.
(첫날 방에 푼 짐이 이 정도)
-그냥 옆에 있는 아가씨한테 부탁했어. 글씨가 보여야지.
입국 신고서를 훌륭히 작성하는 어머니, 아버지를 보고 싶었다. 유튜브, 블로그를 뒤져서 태국 입국카드에 어떻게 빈칸을 채우는지, 꼬부랑글씨는 한국말로 뭘 의미하는지도 자세히 알려드렸다.
-입국 신고서 글씨가 그리 작은디, 어쩐다냐? 옆에 참한 아가씨가 다 써주더라잉. 맛동산 사서 한 봉지 줬재. 한 봉지에 이천 원이나 하던디? 비행기 이 도둑놈들.
5일 후면, 일흔둘, 일흔다섯이 되는 부부. 남자는 국졸, 여자는 중졸. 그나마 가방끈이 긴 어머니보다 아버지 영어 실력이 낫다. 한글을 막 깨친 아이처럼, 아버지는 알파벳을 연결해 곧잘 읽어내신다. 치앙마이 공항에서 안절부절못하는 사람은 나뿐이었다. 어머니, 아버지는 당연하고, 당당하게 치앙마이 공항에 등장하셨다. 입국 신고서는 못 써도 된다. 영어는 몰라도 된다. 작은 글자 안 보여도 된다. 오겠다는 마음. 아들을 보겠다는 마음. 춥지 않은 겨울을 생에 처음 보내겠다는 마음만 있으면 된다. 아무런 요동도 없이, 치앙마이가 그래서 당신들께로 갔다. 성공적인 밤이었다. 숙소 화장실 악취가 유일한 흠이었지만, 생전 듣도보도 못한 엄청난 크기의 침대에서 아기 사슴처럼 곯아떨어지셨다.
2
-나도 화장실이 급한디!
갑자기? 화장실 얘기는 아버지가 먼저 꺼내셨다. 뷔페에서 너무 과식을 하셨나? 하필 숙소 옆이 샹그릴라 호텔이라서, 당당하게 들어갔다. 어머니, 아버지 여기서 안 자도 들어갈 수 있어요. 모르셨죠? 부자들이나 먹는 아침밥 드셔 보실래요? 두꺼운 흰 천 무릎 위에 올려놓고, 배우처럼 드셔 보시죠. 인당 3만 원이지만, 오늘은 그래도 돼요. 여행 중 돈 걱정 안 할 수 있는 날은 첫날뿐이니까요. 오늘만큼은 우리가 재벌이고, 청담동 마나님 합시다. 아이고, 좋구나. 행복하다. 아들아. 어머니, 이제, 그만 하세요. 내일은 더, 더 좋을 거예요. 모레는 더더더 좋을 거고요.
-한 시간 안에 다 보셔야 해요.
어머니는 재래새장이 제일 보고 싶다셨다. 하필 금요일만 여는 큰 장이 근처다. 하필 금요일이다. 단, 열한 시면 장은 끝난다. 남은 시간은 한 시간. 시장에 들어서자마자, 아버지 표정이 어두워졌다. 5밧(200원) 짜리 유료 화장실을 찾아냈다. 청소 중이다. 다른 화장실은 Big C쪽에 있다고 했다. Big C는 태국의 이마트다.
-아버지, 참으실 수 있겠어요? 큰 거요? 작은 거요?
Big C까지는 걸어서 십 분 거리다.
-으응, 작은 거. 참을 수 있다.
-아이고, 내가 급하다.
이번엔 어머니다. 예고편도 없이 갑자기 왜들 이러시는 걸까? 밥 먹고 호텔 천천히 돌아볼 때, 고급진 화장실에서 볼 일 좀 좀 보시지. 어머니 표정이 불길하다.
-조금 전까지 아무 말 없다가 왜 그러세요?
-마려운 걸 어떻게 해? 그럼, 안 마려울 때 억지로 눠?
-십 분이면 돼요.
-못 참겠어. 좀 물어봐.
-물어봤잖아요. 청소 중이래요.
-딴 곳 또 있겠지.
-그게 Big C라잖아요. 마트 화장실요.
-또 있겠지.
-시장에 화장실이 수십 개 있는 줄 알아요?
-아, 물어봐. 물어보면 되잖아.
-싫어요.
마라톤 경기장에서 십 분도 안돼 경련을 일으키는 선수가 있다. 나다. 26일간 달려야 하는 마라톤이다. 나는 완주할 수 있을까? 내 목소리가 시장통을 쩌렁쩌렁 울렸다. 화목한 분위기가 사흘은 갈 줄 알았다. 진짜 아기도 이런 아기가 없다. 뜬금 마려운데, 그 뜬금 마려움이 마구 마려움이다. 먼저번 화장실로 다시 갔다. 여자 화장실은 일단 쓸 수 있으니까. 어머니, 들어가세요.
-휴지, 휴지 좀
-어머니, 소변이라면서요?
-휴지 좀 가지고 와.
여자화장실로 들어간 어머니는 휴지를 외치셨다. 후우우 하아아. 나는 여자 화장실로 성큼성큼 들어갔다. 벽걸이 휴지통에서 휴지를 뽑아, 어머니 칸으로 밀어 넣었다.
"더, 더 갖다 줘."
화장실 여자들의 표정이 사늘하다. 나는, 그 눈빛을 보지 않겠다.
-화장실을 쓰게 해 주세요. 제발요.
-안돼요. 청소 중이라고요.
-우리 아버지, 죽어요.
-에휴, 그럼 쓰세요.
손짓 발짓으로 죽어가는 아버지를 연기했다. 비누 거품으로 반질대는 화장실로 아버지가 엉금엉금 기어가신다. 어머니이이이 소변인 줄 알았는데, 똥이셨습니까? 이제 시원하신가요? 휴지, 더 드려요? 26일이 간단하고, 만만하지 않을 거란 건 알았다. 이제 노인용 기저귀를 사러 간다. 어머니, 아버지. 둘 다 차고 나오세요. 싫어요? 한국으로 돌아가실래요? 오늘부터 아들내미 호랑이 아들내미 합니다. 온 가족이 똥오줌 못 가린다고 만천하에 알리는 까발려지는 것보다 낫잖아욧.
PS 매일 글을 씁니다. 글이 주는 힘을 믿습니다. 함께 웃고, 우는 시간이었으면 해요. 자주 오세요. 자주 웃고, 울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