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아버지. 저는 어디에 숨어야 할가요?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사진 중 하나)
마지막 숙소를 호스텔로 잡은 이유는 부모님께 여행자들을 보여드리고 싶어서였다. 이거야말로 재벌도 해보지 못한 경험이다. 전혀 모르는 이들이 말을 걸고, 다양한 국적의 여행자들이 모자이크처럼 섞인다. 매일 떠나고, 누군가가 온다. 그냥 잠자는 곳이 아니라, 만나는 곳이 된다. 돈이 많아도, 나이가 너무 많아도 전혀 모르는 세상. 아들의 세상을 보여드리고 싶었다. 그리고 나만의 시간도 간절했다. 부모님은 2인실, 나는 도미토리. 잠이라도 따로 잡시다. 아이고, 같이 자야 너도 편하지. 어머니는 낯선 사람과 자야 하는 아들이 안쓰러우시다. 아이고, 어머니. 제발 저 좀 불편할게요. 한 방에서 돌아가며 새벽마다 소변보지 않고요. 그냥 모르는 사람들이 들어오건 말건, 언제 자건 말건, 스마트폰도 마음대로 보면서 불편할게요.
Bed in town. 올드 타운 프라싱 사원(치앙마이에서 가장 유명한 사원 중 하나) 근처 작은 호스텔이다. 2층 입구로 들어가면, 바로 거실 겸 로비다. 벽 하나를 통째로 창으로 뚫어놨다. 창밖으로는 작은 사원이 보인다. 바로크 풍 의자와 소파로 채웠다. 언뜻 가구 전시장 같다. 2인실 1박에 삼만 원. 도미토리는 9천 원. 가격대에 비해서 오버한다는 느낌이다. 예쁘다. 이 가격에 이보다 우아한 거실은 없을 것이다. 오후 한 시였는데 입실이 불가하다. 오후 두 시부터 체크인이니까, 일찍 온 우리 잘못이다. 아버지 눈치부터 살핀다. 어머니, 아머지가 머물 2인실에서 아담한 동양인 아가씨 두 명이 짐을 들고 올라간다. 다시 내려온다. 우리 방을 내주고, 다른 방으로 옮기는 모양이다.
-여행 왔어요?
아버지의 눈이 무서울 정도로 반짝인다.
-네에.
아, 젠장. 한국 사람이다.
-방을 옮기시나 봐요? 우리 때문에 방을 비우는 건가요?
내가 끼어드는 게 낫다.
-아, 그건 아니고요. 친구가 아파서요. 방이 우리한테는 조금 답답하더라고요.
제길, 밝은 방은 아니구나.
-우리도 지금 여행하고 있소.
아버지는 아가씨를 놓아줄 생각이 없다.
-우리 아들이 유명한 여행작가야. 그래서 이렇게 여행 다니고 있소.
유명하다고? 유명하면 먼저 알아봐야지. 자신을 모르는 이들에게, 나 유명한 작자요. 얼마나 슬픈 모순인가? 여행자를 만나게 해 드린다는 생각만 했다. 치앙마이 여행자 최소 20%가 한국 사람이란 걸 계산에 넣지 않았다. 나는 기본적으로 사람은 동물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이 동물보다 딱히 위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동물과 비교하는 게, 아버지를 무시해서가 아니다. 아버지의 반응 속도가 쥐새끼를 발견한 올빼미보다도 빠르기 때문이다. 집중력은 올빼미 이상이다. 어떻게든 말을 걸어야겠다. 의지로 활짝 날개를 펴신다. 대답도 않고, 자신을 무시하던 사람도 있었다. 그래서 아들을 내세운다. 분석하고, 작심한 발언이 아니다. 어떻게든 이 시간을 길게 끌고 가야 한다. 동물적인 다급함이 그러라고 시켰다.
-아, 아버지. 이제 아버지랑은 다시 여행 안 와요. 정말로요.
글로 표현되면, 담담해 보이지만 세제물을 먹었을 때보다도 훨씬 더 화가 났다. 공들여 쌓은 내 모습을 아버지가 뭉개고 계시다. 뭐, 나만 공감할 수 있는 지점이다. 아버지가, 아들 자랑 좀 한다는데, 살짝 민망하면 족하지. 뭘 또 그리 광분까지 해? 내가 똥 이야기를 쓰고, 돈 없다고 세상에 함부로 드러낼 때도, 나는 내 존재가 반짝인다고 생각한다. 글로 사람을 홀리고, 누군가는 열광적으로 나를 지지한다고 믿는다. 내가 썼던 책 중 딱 한 권만 대박이 나면, 진즉에 숨어서, 신비 주의 놀이를 했을 것이다. 박민우가 누구지? 박민우가 어디 있지? 다들 궁금해 미쳐야 한다. 그게 내가 꿈꾸는 글쟁이 박민우다. 아버지가 여행에 들뜬 순진한 아가씨를 붙들어 매려고 도매금으로 나를 파신다. 관심 종자고, 늘 관심이 고프지만, 이런 식으로 나를 팔고 싶지는 않다. 평소엔 무능한 아들이 갑자기 자랑스러운 아들로 돌변했다.
나는 거짓말쟁이다. 늘 내 글은 내 것이 아니라고 떠든다. 나는 필터고, 거름망이다. 나와야 할 글이 나를 통해 나오는 것일 뿐이라고. 뭐라도 되는 양, 거룩한 척 나불댔다. 무슨 소리. 다 내 거다. 내 글은 내 거고, 내 명성도 내 것이다. 길길이 날뛰는 지점엔, 나의 거짓이 있다. 위선이 있다. 그래서 더 못 견디겠다. 아버지가 부끄럽고, 나는 더 부끄럽다. 갑자기 눈빛이 초롱초롱해져서는 무슨 이야기라도 해주길 바라는 눈앞의 아가씨도 불편하다. 아버지는 천재다. 결코 노화로 뇌가 망가지지 않았다. 내가 가장 못 견뎌하는 부분을 정확히 갈겨대신다. 삼만 원 방이 인테리어 잡지에나 나올 법한 예쁜 방이고, 게다가 공기 청정기까지 있다는 놀라움도 시들해질 만큼, 아버지의 기습 공격은 정확하고, 완벽했다. 그냥 말 좀 섞고 싶어서 그랬을 뿐이다. 순진한 삼자들의 시선에 나는 동의 못하겠다. 내가 길길이 날뛰고, 젊은 한국인 아가씨가 관심을 보이는 지점. 그 지점이 아버지의 정교한 큰그림이다. 올빼미의 사냥은 대성공을 거두었다. 정말이지 당장 숙소를 옮기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PS 매일 글을 씁니다. 우리는 숨을 쉬고, 일을 하고, 사람을 만나고, 사랑을 하잖아요. 저는 뭐라도 해야지. 하는 마음으로 글을 써요. 글쟁이는 어쩐지 무기력하고, 백수 같잖아요. 그 느낌을 스스로 못 견디겠더라고요. 그래서 노동처럼 조금은 힘들고, 지치는 느낌이 들도록 씁니다. 쓰고 나면, 스스로가 개운해져요. 그 느낌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