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히 살 수 있는 세상이 온다면 축복일까요
(방콕 차이나 타운에서 한 컷)
17:25분. 작은 카페. 하니 밀크 섀이크. 110밧(4,300원). 뭘 쓰지? 쓸 게 없다. 벌집 꿀 올려줬다고, 더럽게 비싸네. 괜찮아. 난 부자니까.
세 시간 후에 쓰기로 한다. 세 시간 후엔 뭐가 달라져?
19:34분 집
어머니 여권이 2019년 7월 만료다. 항공권 결제할 때 발견했다. 일단 항공권을 구매하고, 여권 번호는 나중에 입력해도 된다. 하늘이 도왔다. 어머니는 다음날 영하 9도의 한파를 뚫고 증명사진을 찍고, 성남시청에서 여권을 신청하셨다. 어떻게든 아들과 치앙마이에서 한 달을 보내고 싶다. 우리 어머니가 이를 악물고 행복하겠답니다. 너무나 자랑스러운 어머니. 어쩌죠? 기대보다 더 좋고, 더 행복하실 텐데. 새로운 목표가 생겼다. 내 도움 없이도 어머니, 아버지가 치앙마이에 올 수 있게 하는 것. 겨울이 지긋지긋한 어머니는, 겨울 없는 여생을 보낼 수 있게 된다. 외할머니나 할머니처럼, 머물던 방에서 죽음을 기다리지 않아도 된다. 죽음이 기진맥진 겨우겨우 쫓아오도록, 열심히 도망 다닐 수 있다. 김장을 담그듯, 12월이면 차잉마이로 향한다. 한국 친구들을 모아서 아담한 집에서 오순도순 새로운 공동체도 경험한다. 치앙마이 대학으로 김밥을 말아 소풍을 가고, 새벽 시장에서 부추를 사서 옹기종기 부추전을 해 먹는다. 겨울엔 치앙마이라서 설레고, 봄이면 벚꽃 만발 한국이라서 설렌다. 설레는 계절이 일 년 내내인 노후. 내가 왜 이리 두근거리지?
길에서 까만 옷을 입은 사람들이 스님에게 절을 한다. 아침 일찍이라면 탁발이다. 동네 사람들이 아침마다 음식과 돈을 들고 나와, 스님에게 시주한다. 그게 탁발이다. 환한 대낮이라면 탁발이 아니다. 교통사고든, 살인이든 그곳에서 누군가가 죽었다. 차가 빨리 달릴 수도 없는 좁은 도로다. 그래도 교통사고일 수 있다. 더 끔찍한 일일 수도 있다. 그 어떤 죽음도 가능한 세상이다. 탄생과 죽음은 똑같은 자연이지만, 나는 죽음에 더 마음이 간다. 태어나는 건 한 번 해봤기 때문이다. 그렇게 죽은 곳에서 제를 올리면, 죽은 영혼은 집으로 돌아간다고 한다. 관 뚜껑을 열고, 자기 자리에 눕게 된다. 길을 잃은 영혼들은, 구천을 떠돈다. 어릴 때는 무서운 이야기. 지금은 좀 쓸쓸한 이야기.
방금 발뒤꿈치 굳은 살을 떼내려다가, 굳은살이 손톱 사이로 파고들어 피가 났다. 내 몸이 내 몸을 벴다. 어릴 적엔 아버지의 발뒤꿈치가 그렇게 신기했다. 같은 사람인데, 어떻게 저런 발일 수가 있지? 당시 아버지는 우유배달을 하셨는데, 개미들이 빠지면 빠져나올 수 없을 정도로 각질이 심했다. 이젠 내 발이, 아버지의 발을 닮아간다. 팔자 주름, 이마 주름, 눈가 주름, 줄어든 머리숱, 발뒤꿈치 각질, 검어진 얼굴, 푹 꺼진 볼, 흰 수염 등이 내 노화의 증거다. 좋아진 자세, 늘어난 근육, 잘 생겨진 얼굴. 노화에 반항한 증거다. 내 잘생김에 반발하는 이들은, 내가 얼마나 못생겼었는지를 모르시는 듯. 노화는 분명 예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흘러갈 것이다. 터무니없이 안 늙는 사람도 참 많아졌다. 하루아침에 아무도 안 늙는 시술이 뚝딱 개발될지도 모른다. 막연한 헛소리가 아니다. 많은 실험이 이루어지고 있고, 꽤 성과도 있다고 한다. 죽음이 선택이 되는 삶이, 현실로 이루어진다면?
당신은 천 년 만 년 살 수 있습니다. 정해진 수명만큼만 살 수도 있습니다.
나는 누구보다 나를 잘 안다. 천 년 만 년 사는 쪽을 택한다. 이백 살쯤 되어서는 죽고 싶어서 환장한다. 문제는 불사신이라서 어떤 방법으로도 죽을 수가 없다는 것. 영생의 삶에 갇힌다. 제 때 죽은 친구들을, 가족들을 그리워하며 피눈물을 흘린다. 혹시라도 죽을 수 있을까 싶어 사하라 사막을 게토레이 한 병 없이 순례한다. 죽을 것처럼 괴롭지만 죽지는 않는다. 제대로 된 형벌은 이런 것이다. 죽음의 희망을 서서히 놓고는, 영원할 게 뻔한 내일을 저주하며 집에 숨는다. 발톱이 길어져서, 길어져서 땅 밑으로 파고들고, 머리카락은 미역처럼 치렁치렁 바다까지 닿는다. 사람 나무들은 누구와도 눈을 마주치지 않고, 나무가 된다. 살아있지만, 움직이지 않는다. 타의냐 자의냐만 다를 뿐. 사람 나무도 나무다. 그렇게 나무들로 밀림이 되어, 평범한 수명의 가치를 온몸으로 전한다. 나무 인간을 끝으로, 아무도 영원한 삶을 택하지 않는다. 그때쯤 나무 인간들도 진짜 나무가 되어, 모든 계절을 껴안는 법을 익힌다. 죽음이 없는 삶이 원래의 삶이 되어, 무럭무럭 자란다. 더 이상 억울하지 않고, 그립지 않다. 나무는 나무여서, 위로 자랄 뿐.
(저도 모르겠어요. 이런 글로 끝을 맺게 되다니요. 저도 낯선 저를 만나는 과정을 지켜봐 주셔서 감사해요.)
PS 이 글은 2019년 12월에 쓴 글입니다. 매일 글을 씁니다. 글로 전할 수 있는 작은 감동이 있다고 믿어요. 안녕하신가요? 안녕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