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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국 이발소 뒷담화 속이 터져, 터져

내 몸에 사리가 생기는 시간

by 박민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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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 머리 깎는데 한 시간이 걸리는 이발소는, 문 닫아야죠. 유난도 그런 유난히 없어요. 기다리는 사람을 무시하는 게 아니라면, 서두르는 척이라도 해야죠. 머리통으로 팔만대장경이라도 새기나요? 속이 터지는데, 나만 터지는 것 같아서 더 열 받는다니까요. 그래요. 태국에 산 지 십 년 가까이 됐고, 느림보들의 나라라는 것도 알죠. 그래도 정도가 있는 거예요. 이제 저 하나 남았어요. 세 명의 이발사 중에 아무나 먼저 끝내면, 제 차례라고요. 삼십 분이 흘러도 여전히 같은 사람의 머리통을 이리 보고, 저리 보며 찔끔찔끔 깎아요. 조금만 기다리면 내 차례다. 희망이 보이던 그때부터 삼십 분이 흘렀다고요. 늘 붐비는 곳이고, 번번이 포기했더랬죠. 평소보다 손님이 없어서 왔더니, 웬 뒤통수냐고요.

톰보이라고 아시나요? 여자지만 남자처럼 입고, 행동하는 이들을 태국 사람들은 톰보이라고 해요. 톰보이 손님이 거의 끝난 모양이네요. 드라이기로 머리털도 한 번 날리고요. 의자를 젖힙니다. 이발사는 면도칼을 들어요. 에이, 거짓말. 생물학적으로는 어쨌든 여자인데, 면도를 한다고요? 구레나룻랑, 수염을 면도 칼로 정성껏 밀어요. 톰보이 양반, 없는 털도 면도칼로 한 번 더 밀면 더 사내다워지는 것 같수? 제가 중학교 1학년 때 도루코 면도기로 밀다가, 살점 날아갔어요. 남자로서는 내가 선배니까, 까불지 말고 내 말 들어요. 피부만 상한다고요. 민둥민둥 얼굴에 면도칼이 웬 말이냐고요. 아, 호르몬 주사를 맞고 있으면 구레나룻이 생길 수도 있겠군요. 혹시 폭탄 돌리기인가요? 한국인 손님 부담스러워서 다들 느리게 깎는 거예요? 샴푸실로 가서는 왜 이리 안 나와요? 퇴폐 이발소예요? 가운데 손님도 샴푸실로 가더니, 나올 줄을 모르네요. 샴푸실에서 왕게임하는 거 아니죠? 이쯤이면 한 번 뒤집어도 되는 거죠? 이발사 셋 중 제일 늦게 머리를 깎기 시작했던 사람이, 제일 먼저 끝내고는 제게 손짓하네요. 참나, 깎기는 어떻게든 깎는군요.

태국 사람은 머리 깎으러 와서 두 시간 이상을 아무렇지도 않게 기다려요. 기다리는 사람도, 기다리게 하는 사람도 미친 것 같아요. 무슨 생각으로 사는지 모르겠어요. 제가 음식점을 했어요. 아시는 분은 아실 테지만, 배달 전문 스파게티 집이었어요. 특이하죠? 분당에서 했었는데, 장사가 잘 됐어요. 주말이면 전화기를 내려놔야 할 정도로 주문이 폭주했죠. 주문이 조금만 늦어져도, 배달 사고가 나도 담배부터 찾았어요. 그땐 담배를 피웠어요. 아니 피울 수밖에 없었어요. 진짜 죽고 싶더군요. 줄담배를 피워댔죠. 장사가 안 되면, 안 되는 대로, 잘 되면, 잘 되는 대로 담배를 물고 살았어요. 지옥이었죠.


이 미친 이발소는 우리 동네에서 가장 장사가 잘 돼요. 머리만 잘 깎으면 그만인데, 젖은 수건을 얼굴에 올려주고, 어깨 근육을 풀어주죠. 오래 해라. 오래! 뒷사람이 기다리건 말건, 저는 오래 해 줘야 해요. 기다릴 때 시간과, 내가 서비스를 받을 때 시간은 다르게 흐르죠.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이 이런 거 아닌가요? 내 머리통을 이렇게 자세히 들여다보는 이가 있었던가요? 없었죠. 단연코 없었죠. 혼신의 힘을 다해서 깎긴 해요. 그렇다고 내 머리통이 블루 클럽보다 훨씬 나아진 것도 없죠. 눈에서 광기를 뿜으며 요리하는 요리사를 본 느낌이죠. 음식이 맛있나 없나가 중요하지 않아요. 그 눈빛을 먼저 봐 버리면요. 최고로 잘 깎고 싶다. 그 마음이 읽혔는데, 결과가 중요하겠어요? 이 양반들 눈빛에 반해서 자꾸 오게 되는 걸, 이제 알았네요. 또 와서, 또 투덜대겠지만, 나올 때는 웃어요. 웃게 되죠. 내가 이곳에서 이발소를 했다면, 내 마음은 지옥이었겠죠. 천하태평 태국 사람들은, 마음에 지옥을 짓지 않아요. 정말 무능력한 사람들 아닌가요? 분당에서 매일 애를 태웠던 제가, 너무도 억울하고, 불쌍해요. 태국은 정말 딴 세상이에요. 우주선 타고, 멀리 갈 필요가 없어요. 여기가 외계 행성이라니까요. 다음부턴 아예 책 한 권을 가지고 오려고요. 책 절반을 읽을 수 있는, 독서 권장 이발소라고 해두죠. 그래도 적당히 하자. 나만 적당히에서 조금 더 해 주고. 나만, 콕 집어서 나만!


PS 매일 글을 씁니다. 작은 기쁨이었으면 해요. 작은 기다림이었으면 해요. 제가요. 꿈도 크죠? 푸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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