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으로 족욕도 하고, 빛으로 차도 한 잔 따라 드시지요
2월에 다녀온 여행입니다. 여행이 불가능한 지금 작은 숨통이 되기를 바라면서 이 글을 올립니다
오토바이를 오늘 몇 시까지 반납해야 하나요?
-24시간 빌리는 게 아니라, 날수로 세는 거예요. 오늘 쓰면 하루치를 내셔야 해요.
어제 열한 시에 빌렸으면, 오늘 열한 시에 반납. 딱 24시간, 딱 하루. 그런데 이 작자가 이틀 치를 내란다. 오전에 갖다 주면 반나절 값만 받겠단다. 아이고, 큰 인심 쓰셨네요. 베트남은 오토바이의 나라다. 전 국민이 두 다리 대신 오토바이로 돌아다닌다. 빌리는 것도, 그래서 쉽다. 숙소 주인에게만 부탁하면 십 분 만에 오토바이가 배달된다. 신형 오토바이는 하루 140,000동에서 150,000동 사이. 7천 원 정도다. 이전 숙소에선 정확히 24시간으로 계산했다. 이번 숙소는 이렇게 또 말이 다르다. 안 타고 만다. 미리 이야기를 했다면, 받아들였다. 그렇다고 싸우자는 건 아니다. 그렇게 아낀 돈이 내 피와 살로 가지 않는다. 놀아나지만 않겠다. 거래 중단. 즉시 반납. 나름의 복수다. 어차피 마지막 날이다. 걸으면 된다.
하루만 더 머무르면 되는데, 내가 묵는 곳은 이미 예약이 찼다. Brew And Breakfast라는 곳에서 마지막 하루를 묵는다. 채식주의 식당과 숙소를 같이 운영한다. 백인들로만 가득 찬 식당은, 나를 거들떠보기엔 너무 손님이 많았다.
-체크인은 오후 세 시부터입니다.
식당 매니저 여자는 상냥하다. 짐은 창고에 맡기라고 했다. 영국인 부부가 사장이라는데, 보이지 않았다. 젊음, 어울림, 백인. 나는 이들과 아무런 공통점이 없다. 이 화목한 기운이 불편하다. 오토바이를 또 빌려야겠다. 이들과 어울릴 자신이 없다. 하지만 하루도 허투루 쓸 수 없다. 고작 카페 여행이라니. 목숨을 건 히치하이킹도 아니다. 평생 친구를 만나는, 밤하늘과 맥주가 오가는 낭만도 아니다. 혼자 바람을 등지고, 카페를 기웃거린다. 도자기와 병으로 재활용한 린푸억 사원을 가는 길이었다. 한글로 린푸억 사원을 찍고 오토바이를 몰았다. 잘못된 장소였다. 이런 일이 왜 일어나는지 잘 모르겠다. 누군가가 엉뚱한 곳을 린푸억 사원으로 표시해 놓은 것이다. 한국인 수천 명은 헛걸음을 했을 것이다. 비닐하우스가 계단식으로 나열된 풍경이 그래서 대신 펼쳐졌다. 겨우겨우 찾은 린푸억 사원보다 더 인상적이었다. 린푸억 사원은 아름답다. 그토록 화려한 사원은 처음이었다. 어디까지나 내 문제다. 전형적인 관광지라고 느끼는 순간 흥이 죽어 버린다. 잘못 들어선 길에 펼쳐진 계단식 비닐하우스는 하늘로 이어지는 파도처럼 넘실댔다. 흉물이어야 하는 비닐하우스가, 흰 고래의 등처럼 탄탄하게 꿈틀댔다. 우연이어야 한다. 우연을 비집고, 운명처럼 등장해야 한다. 나는 이런 놀라움을 원한다.
-내일 열 시까지 반납할게요.
-그러면 하루치 150,000동만 내세요.
그동안 나는 모든 서두르는 여행자를 측은하게 바라봤다. 나는 가진 자였다. 돈만 없을 뿐. 시간 부자였다. 서두를 필요가 없었다. 어떻게든 봐야 한다는 강박증마저 없다. 바닷가에서 물 한 번 안 담가본 적도 있다. 오늘은 내가 그 안쓰러운 여행자가 되고자 한다. 달랏은 실시간으로 꽃망울이 터지는 꽃밭이다. 놀라운 꽃 두어 송이 정도는 더 볼 수 있다. 아닌 곳에서 우물쭈물하지 않을 것이다. 무례한 여행자가 되어, 도망 나올 것이다. 내가 원하는 곳을 찾을 때까지, 계속해서 달리겠다.
그냥 나올까?
시내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Trieu Doa Hong은 차를 판다. 삐쭉삐쭉 판자로 울타리를 치고, 천막으로 덮었다. 정말 돈 안 들인 건물이다. 치렁치렁 어수선하다. 웅장하거나 특이하지도 않다. 울타리로 들어오는 빛을 눈여겨보지 않았다면, 뒤도 안 돌아보고 나왔을 것이다. 빛이 울타리 사이로 곱게 걸러져서는 부분부분 실내를 비춘다. 어수선하다고 했나? 내가? 저게 뭐지? 안쪽에 밭이 있다. 차 밭이다. 밭에서 찻잎을 따는 여자가 있다. 커피나무에서 커피 열매를 따서 눈앞에서 마실 순 없다. 커피콩을 말리고, 볶아야 한다. 갈고, 우려야 한다. 찻잎은, 꽃잎은 가능하다. 눈앞에서 찻잎을 딴다. 그 찻잎이 손님의 차가 된다. 족욕과 꽃잎차가 함께인 세트 메뉴를 주문한다. 우리나라 돈으로 3,700원. 먼저 꽃잎차가 나온다. 언뜻 크리스털처럼 보이는 받침대 위에 크리스털처럼 보이는 주전자가 나온다. 빛을 반사한다. 소원 구슬처럼 찻물에서 햇빛을 토해낸다. 꽃잎 가득한 온수가 앞에 놓인다. 오는 내내 찬 바람이었다. 욕조에 몸 한 번 푹 담그고 싶었다. 발만 담갔지만, 이제 나의 욕심은 사라졌다.
달랏으로 오는 비행기 안에서 피로하기만 했다. 첫날밤 모기로 뜯길 때, 나는 나트랑을 검색했다. 바다로 도망가자. 달랏은 아니야. 본 것도 없지만, 볼 필요도 없었다. 지긋지긋했다. 이제 나는 남은 단 하루가 속상하다. 발가락 사이로 꽃들이 간지럽다. 이제 나는 베트남이 궁금하다. 어떤 나라였는지 더 알고 싶다. 중국을, 프랑스를, 미국을 무릎 꿇게 했던, 어찌 보면 세상에서 가장 강한 나라. 지키는 힘으로는 세계 제일인 나라. 그 무서운 나라가, 부드러움의 힘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베트남의 내일이 궁금하다. 3년 후의 달랏이 너무 달라져있을까 봐 무섭고, 설렌다.
PS 매일 글을 씁니다. 이루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요. 뭔가를 하고 있으면 그게 좋습니다. 저는 글을 씁니다. 그렇게 존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