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저는 답을 줄 때입니다
강연을 다니다 보면요. 가장 많이 받는 질문이죠. 어디가 제일 좋았어요? 참 어렵죠. 어디라고 이야기를 해야 하지? 제가 좋다고, 여러분도 좋을까요? 날씨도, 몸 상태도 다 다른데요. 그래도 이젠 답을 드려야 할 때인 것 같아요. 참고로 저는 못 가본 곳이 많아요. 그러니까 전지전능한 답으로 오해하시면 아니되옵니다. 야밤에 그냥 생각나는 풍경들 위주로 쓰는 거라서요. 거기는 왜 빼냐? 거기가 들어갔어야지. 진지해지실 필요는 없사옵니다.
1. 거룩하게, 웅장하게, 위험하게 - 파키스탄 훈자
훈자는 정말 정말 가기 어렵습니다. 일단 파키스탄 비자를 받아야 하고요. 스무 시간 벼랑 끝을 고물 버스로 달려야 해요. 국내선 비행기를 타고 가는 방법도 있긴 있어요. 버스보다는 좀 덜 아슬아슬할 거예요. 벼랑 끝 비포장 도로를 밤새 간다고 생각해 보세요. 조금만 삐끗하면 천 길 낭떠러지로 떨어져서 즉사하는 거죠. 칠흑 같은 어둠에 조금만 덜컹해도, 심장이 덜컹. 제가 잘못 알았네요. 24시간 걸렸네요. 24시간 벼랑 끝 곡예운전에 자신을 맡겨야 합니다. 보통 트레킹을 해서 한참 들어가야 좋은 풍경을 볼 수 있는데요. 훈자에선 아무 숙소에서 창문 열면 이 세상 풍경이 아니에요. 훈자를 보고 나면, 다른 풍경이 시시해져 버리는 부작용이 있어요.
2. 엉엉 울었습니다 - 칠레 토레스 델 파이네
풍경을 보면서 울 수도 있구나. 트레킹 경험도 워낙 없기는 했어요. 뭘 보고 싶다. 그런 것도 없었고요. 힘들기만 하고요. 배만 고프고요. 투덜투덜대다가 고려청자 색의 물빛, 그 물을 둘러싼 세 개의 봉우리에 나도 모르게 눈물이 터져 나오더군요. 트레킹 하는 내내 그냥 다 CG예요. 날씨가 안 좋다면 몰라도요. 단 한 명의 예외도 없이 모두 엎드려 절해야 하는 풍경이죠. 파타고니아의 다양한 동물들을 볼 수 있는 보너스까지. 토레스 델 파이네에서 좋은 날씨에 트레킹을 완주했다면, 착하게 사셔야 해요. 누구는 평생 보지 못할 풍경들을 뭉텅이로 본 거니까요.
3. 조지아가 이 정도였어? 메스티아 코룰디 호수
스위스 저렴이 버전이라고 해서 기분 팍 상했죠. 스위스를 갔어야지. 내가 짝퉁이나 봐야겠어? 코룰디 호수에서 저는 새로 태어난 기분이 됩니다. 이전까지 보았던 모든 풍경이 다 기억에서 싹 사라져 버렸거든요. 코룰디 호수는 사실 호수도 아니고요. 웅덩이예요. 날씨가 좀 좋잖아요. 요 코딱지만 한 웅덩이가 마술을 부려서요. 겁나 영롱하게 신비로워져요. 조지아가 대단해 봤자지. 이랬다가요. 충격의 카운터 펀치를 맞은 거죠. 사족을 달자면 날씨가 크게 작용하기는 해요. 참고로 전 7월에 갔어요. 스키 리프트를 타고 Hatsvali 리조트도 올라가 보세요. 식당도 있으니까요. 말도 안 되는 풍경 보면서 와인도 한 잔 하세요. 저 덕분에 좋은 곳 알게 됐다고요? 가야겠다고요? 돈 좀 부치고 싶다고요? 밥 사주세요. 길에서 만나면요. 하하
4. 목숨 걸고 봤던 풍경 - 키르기스스탄 카라콜 호수
저 여기서 죽을 뻔했어요. 눈이 다 녹지 않은 봄에 트레킹을 했는데요. 하산길이 꽁꽁 얼어 있더군요. 가이드랑 홍콩 여자가 먼저 내려가다가요. 미끌 하면서 홍콩 여자가 가파른 산을 추락할 뻔했죠. 가이드가 아슬아슬 그녀의 손을 잡아채지 않았다면, 그녀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을 거예요. 나는 못 내려간다. 저는 추잡하게 고래고래 비명을 지르고요. 옆 옆 흙길로 어찌어찌 내려오긴 했네요. 제가 죽을뻔한 건 아니네요. 발바닥 가득 물집으로, 사무치는 고통을 겪기는 했어요. 사람이 많지 않아서 더 신비로운 풍경이었어요. 자연과 내가 일대일로 속삭이는 느낌이었죠. 아, 또 가고 싶다.
5. 커피 향이 물씬 - 콜롬비아 살렌토
여기는 세계 테마 기행 촬영차 갔었던 곳이죠. 세계적인 커피 생산지예요. 모든 스태프가 마을로 들어가자마자 대박을 외쳤던 곳. 마을 자체도 예뻐요. 백 년 넘은 이탈리아 커피 머신으로 커피를 끓여주는 카페도 있어요. 푸르고 빼곡한 양탄자 같은 산, 작고 예쁜 마을, 키가 껑충한 야자수들이 신비로운 느낌을 줘요. 이런 세상도 있구나. 지구 아닌 느낌이 물씬 전해지죠. 당연히 커피나무들도 지천에 널렸고요. 트레킹을 하면 좋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고 마을에만 머물러도 그렇게 좋을 수가 없어요. 힐링이 필요한 분들에게는 커피 마을 살렌토를 추천합니다.
6. 남미에도 스위스가 있다 - 아르헨티나 바릴로체
실제로 스위스 사람들이 이주해서 사는 아르헨티나의 스위스 바릴로체. 산과 호수가 끝없이 펼쳐져 있어요. 이스라엘 친구가 차를 렌트해서 편하게 다녔죠. 일곱 개의 호수를 거쳐서 산 마르틴 로스 안데스라는 마을에서 짐을 풀었어요. 이과수 폭포에서 만났던 독일 친구들이 꼭 가보라고 했던 마을이죠. 대자연의 아늑한 보살핌 속에 동막골처럼 단절된 평화가 그곳에 있더군요. 그렇다고 외진 곳도 아니라요. 근사한 스테이크와(한국에선 절대 그 가격에 먹을 수 없는 양과 가격) 아이스크림을 마음껏 즐길 수 있죠. 여행은 정말 아무것도 모르고 다녀야 하나 봐요. 그래서 더 기억에 남는 것 같기도 해요. 그 푸르름, 그 반짝거림. 다시 가면 더 아름다울 것 같은 곳이네요.
7. 죽기 전에 꼭 다시 가야 해요 - 시리아 마르무사
네, 시리아는 지금 갈 수 있는 나라는 아니죠. 마르무사 수도원은 가톨릭 수도원이에요. 시리아는 80%가 이슬람교를 믿으니까요. 가톨릭은 소수 종교인 거죠. 이 수도원은 모든 여행자들을 먹여주고 재워줘요. 살구잼에 빵, 신선한 염소 치즈 등을 매일 배불리 먹었더랬죠. 낮 시간에는 수도원 개보수를 돕고요. 지하에 있는 신비롭고, 아름다운 도서관에서 책도 읽었죠. 사막 한 가운에 거칠게 솟은 수도원의 풍경은 치명적입니다. 이런 나라가 아예 갈 수 없는 나라가 됐어요. 언젠가 여행길이 열리면, 가장 먼저 가고 싶은 나라입니다. 마르무사에 있을 때 폭설이 내린 적이 있거든요. 그거 있잖아요. 이상적인 크리스마스는 눈이 내려야 하고, 난로가 활활 끓어야 하죠. 그런 하얀 세상이었어요. 평생 잊을 수 없는 겨울이 그곳에 있었죠.
PS 매일 글을 씁니다. 왜 쓰냐면, 쓰기 싫을 때 쓰는 제가 좀 멋져 보여서요. 하기 싫어도 하는 거. 저에겐 글만 그게 가능해요. 쓰고 나면 쓰길 잘했다. 그런 생각에 편히 잠들 수 있거든요.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꾸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