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토종 입맛이 무국적 입맛이 되기까지

세월 앞에 장사 없더라고요. 미각도 그래요

by 박민우
IMG_0327.JPG
20200116_181947.jpg

내가 만약 사형수라면, 마지막 한 끼를 고를 수 있다면 뭘 고를까?


-떡볶이


이거 책 때문인가요?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 그 책 때문인 건가요? 더 비싼 음식도 많은데 왜 하필 떡볶이냐고요? 치열하게 1등을 다퉜던 음식은 돼지고기 김치찜. 요 둘 중에 그래도 떡볶이. 국물 떡볶이여야 하고요. 떡은 밀떡 반, 쌀떡 반. 오래 끓여서 떡에 양념이 배여야 해요. 그리고 김말이와 채소 튀김이 동동. 오징어 튀김은 뺄게요. 순대도 몇 알만 넣어 주세요. 떡볶이를 골랐으니까 토종 한국인 맞죠? 아뇨. 의심스럽기는 해요. 한국에 있으면 그렇게 태국 음식이 간절해요. 똠양꿍의 시큼함, 두리안의 달콤함, 쌀국수의 감칠맛이 사무치게 그리워요. 한국에도 태국 음식점이야 많죠. 비싸고, 그 맛도 안 나요. 뭔가 한두 개는 빠진 맛이 나요. 한국 사람 입맛에 맞추다 보니까요. 한국에서 못 구하는 재료도 있으니까요.


저도 분명 토종 한국 입맛이었어요. 밥 이틀 연속 못 먹으면 죽을 것 같았던 적이 있었죠. 지금은 어디를 가도 잘 먹어요. 난이도가 조금 있는 나라가 인도죠. 향신료도 많이 쓰고, 위생도 막장이니까요. 인도에서 사탕수수 주스를 컵에다 따라 줘요. 그걸 마시면 대충 헹궈서 다음 손님이 또 마셔요. 일부러 입 안 대고 마시는 사람도 많고요. 그 사탕수수 주스를 일부러 많이 마셨어요. 한 번은 겪어야 한다면 설사, 배탈아 빨리 오너라. 길에서 똥 싸는 참사는 없었네요. 탄두리 치킨에서 나는 향도 처음엔 그렇게 싫더니, 지금은 잘만 먹죠. 무국적 입맛이 되기까지 5년 정도 시간이 필요했어요. 고수가 들어간 음식 다 뱉기, 두리안 냄새에 오바이트 하기, 인도 음식은 쳐다도 안 보기. 이런 시간들이 분명 있었죠.


인간이 약하디 약한 존재라는 게 포인트죠. 여행 가면 갑자기 모든 게 달라지잖아요. 악착같이 싫어만 할 거야. 그게 안 돼요. 1년, 2년, 3년 이렇게 기간이 늘어나니까 한국 음식만 고집하는 게 피곤해요. 쉽지도 않고요. 더 싸고, 더 쉬운 음식들을 자주 먹게 되는 거죠. 맛보다는 실용적인 이유로요. 반복해 보세요. 태어나서 늘 먹던 쌀밥처럼, 어느 순간 쌀국수가 주식이 돼요. 맛있어서라기 보다는 만만해서죠. 먹다 보면 여기는 좀 제대로 하네. 맛집을 알게 되고, 맥락을 알게 돼요. 아, 이 집은 육수를 제대로 뽑았구나. 아, 이 집은 의욕이 없구나. 똥오줌을 구별하는 단계가 오죠. 이왕이면 더 맛난 집을 찾아가요. 그러다 보면 생각나는 맛이 되죠. 그렇게 한두 메뉴에 눈을 뜨잖아요? 새로운 음식에 도전할 용기가 생겨요. 처음엔 낯설지만, 생각나는 메뉴들이 있어요. 저한테는 싸이크록 이싼, 이싼(태국의 북동쪽 지방 라오스와 뿌리가 같아요)의 소시지가 그랬어요. 발효된 소시지인데, 시큼해요. 처음엔 기겁했죠. 발효된 소시지가 뭐냐고요. 그냥 상한 거지, 뱉었죠. 두 번째엔 뱉었던 기억을 까맣게 잊고, 또 사 먹고 말아요. 어? 먹을 만하네? 처음처럼 진저리 처지지가 않네요. 이제는 발효된 소시지만 먹어요.


-쁘리야오


시큼하다는 뜻이거든요. 발효된 소시지랑, 발효 안 된 순한 맛을 같이 파는데요. 저는 무조건 쁘리야오를 외쳐요. 생각만 해도 군침이 도네요. 여전히 한국인 피가 뜨겁다고 느끼는 건 포장해 온 쌀국수를 덥힐 때요. 포장해 온 쌀국수를 전자레인지에 한 번 더 돌려요. 미지근한 국물은 도저히 용납이 안 돼요. 태국 사람들요? 국물이 차갑지만 않으면 돼요. 국물 온도에 대한 집착은 한국인이죠. 한국인이 진짜 유난스럽죠. 얼큰함 성애자.


제 입맛 국적은 한국 30%, 태국 25%, 베트남 20%, 나머지 25%로 구성된 것 같아요. 국수류, 국물이 있는 국수류를 특히 좋아하네요. 제 입맛은 굳이 분류하자면 '국물'이네요. 떡볶이도 국물 떡볶이여야 해요. 깨끗한 기름으로 튀긴 조스 떡볶이 튀김이면 돼요. 저의 최후의 한 끼는 조스 떡볶이와 튀김으로 정했습니다. 너무 검소한 것 같아서 좀 억울하긴 하지만.


PS 매일 글을 씁니다. 일상의 소소함, 그 가치에 대해 쓰고 싶어요. 너무 비장한가? 재밌고 싶어서 써요. 그냥, 그냥요.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외국 음식 잘 먹는 사람 VS 못 먹는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