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적이고 가난한 화가의 최후
엄격히 말하면 고갱의 삶은 아니죠. 찰스 스트릭랜드의 삶이죠. 하지만 사람들은 알죠. 찰스 스트릭랜드가 고갱이라는 걸. 서머싯 몸은 고갱의 최후를 취재하기 위해 몸소 타이티를 방문했죠. '달과 6펜스'는 어디까지가 사실일까? 찰스 스트릭랜드를 고갱이라고 봐도 되나? 이런 생각을 하면서 읽게 돼요. 책이 인연이 되는 순간이 따로 있나 봐요. 군부대에서는 이상하게 손이 안 가더니요. 마흔 언저리에 이 책을 주문해요. 그러기를 잘했어요. 젊었을 때 읽었다면, 이런 감동은 없었을 거예요. 청소년 필독서를 청소년 때 읽으면 과연 좋을까요? 저는 청소년 필독서를 어른이 돼서 읽은 게 꽤 돼요. 왜 이게 청소년 필독서지? 소년들이 나와서? 대표적인 게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이죠. 이걸 중고등 학생이 읽으면서 뭘 이해한다는 거죠? 사춘기 소년들의 우정 이야기인가요? 거기서 끝인가요? 훨씬 더 위험하고, 심오한 이야기던데요? 다 큰 어른이 되어서 읽어도 난해하기만 하더군요. 난해하지만, 더 알고 싶어 지는 기묘한 이야기였어요. 아직도 생각나요. MBC TV '모여라 꿈동산'에서 '데미안'을 인형극으로 보여줬던 거요. 사춘기 소년들의 맑고 순수한 우정 놀이로 미화돼요. 그 무거움과 치열함은 사라지고, 발랄 발랄 소년들이 수줍게 만나고, 헤어지더군요.
'달과 6펜스'는 개막장 스토리입니다. 아, 혹시 이 책을 읽으실 건가요? 미리 줄거리를 아는 게 불편하세요? 그러면 오늘은 여기까지만 읽어 주세요. 고전은 누군가의 감상을 미리 읽고 봐도, 색다르게 재밌더군요. 공감을 기반으로, 자신만의 느낌을 재 확장하는 느낌요. 달과 6펜스의 주인공 스트릭랜드는 주식 거래인이라는 안정적인 직업을 때려치워요. 마흔의 나이예요. 고갱의 실제 나이로 유추하면 백삼십 년 전이네요. 평균 수명도 짧고, 일찍 사회생활을 시작할 때니까요. 지금으로 치면 예순 정도겠네요. 그 나이에 가정을 버리고, 파리의 싸구려 방에서 그림을 그려요. 열정만 있으면 뭐 하나요? 세상은 스트릭랜드를 알아주지 않죠. 네덜란드에 온 화가 스트로브는 스트릭랜드의 천재성을 알아보고 물심양면으로 도와요. 스트릭랜드가 몸져누웠을 때, 집으로 들이죠. 아내 블랑시는 길길이 날뜁니다. 어떻게 그런 짐승 같은 남자와 같은 집에서 사냐고요. 스트릭랜드 빠돌이인 스트로브도 막무가내죠. 결국 스트릭랜드는 간호를 해준 블랑시와 바람이 나요. 둘은 집을 떠나죠. 스트릭랜드는 자신의 은인 블랑시를 버리고, 블랑시는 자살을 해요. 스트릭랜드는 별다른 죄책감도 안 느끼죠. 블랑시의 감정 변화는 이 소설에서 가장 흥미로웠어요. 블랑시는 왜 스트릭랜드를 혐오했을까요? 사랑에 빠질 걸 알아서였을까요? 버려질 걸 알아서였을까요? 극단적인 감정의 변화는, 전혀 과장으로 보이지가 않아요. 묘사가 치밀하면, 캐릭터는 놀랄 만큼 현실적이 돼요. 의대생이었던 작가 섬머싯 몸은 경계하고, 집착하는 한 여자의 극단적인 감정 변화를 차분하게 그려요. 세밀화가 되죠. 감정을 해부하고, 감정의 모세혈관까지 찬찬히 뜯어보면서 한 인물을 창조해요. 멍청이 스트로브는 죽은 아내의 나체화를 뒤늦게 발견해요. 피가 거꾸로 솟아 그림을 발기발기 찢어버리려 하죠. 누드화에 감동하고 말아요. 스트릭랜드의 천재성에 다시 한번 압도돼요. 선과 악, 이분법을 거부하는 예술의 가치가 그림을 통해, 아니 섬머싯 몸의 손끝을 통해 생생히 재조명되죠. 크게 보면 권선징악이죠. 스트릭랜드는 한센병으로 최후를 맞이하니까요. 타이티의 오두막 벽에 그린 최후의 걸작을 태우라는 유언을 남기고요.
실제의 고갱도 이랬을 거야. 어느 정도는 맞지만, 똑같지는 않아요. 엄연히 소설이니까요. 독자는 그래서 자유로워요. 고갱이어도 좋고, 아니어도 좋죠. 그래도 이왕이면 고갱의 그림을 보면서, 타이티를 상상하면서 이 책을 읽었으면 해요. 먹고사는 일도 아닌, 그림 때문에 모든 걸 포기한 사내 이야기죠. 그림에 대한 열정. 그거 하나만 빼면 쓰레이죠. 압도적인 재능 하나로, 그 쓰레기가 미화돼요.
왜 제목이 '달과 6펜스'일까요? 달은 예술적 이상을, 6펜스는 세속적인 가치를 뜻해요. 먼 달을 보느라, 눈 앞의 6펜스를 보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비웃는 표현이랍니다. 그런데 작가는 하등 먹고사는데 도움 안 되는 '달'에 집착해요. 말년의 인터뷰에서 '달'에 집착하는 삶이 왜 어리석은가? 그 어리석음을 변호하고 싶다고 말하죠. 저는 글을 쓰는 사람이고, 배 고픈 삶을 살죠. 살아생전 변변한 생색 없이 죽을지도 몰라요. 억울해요. 억울하지만 괜찮아요. 보상은 내게 글을 쓰게 하지 못하니까요. 지금 제가 열심히 글을 쓰는 이유는 배가 고프니까죠. 결핍의 힘으로 쓰는 거예요. 그래서 이 지난한 굴레가, 제게는 꼭 맞는 옷임을 알죠. '달'이라도 있어야 살죠. 6펜스도 없으면 '달'이라도 있어야 해요. 남 이야기가 아니라서 그렇게 절절했어요. 인생 소설이 됐어요.
PS 매일 글을 씁니다. 제가 노래만 잘했다면 뮤지컬 배우가 됐을 거예요. 노래를 못 하니까, 글을 씁니다. 저는 무대 위에 있어요. 모두가 침을 꼴깍 삼키네요. 제 노래를 들으려고요. 아니, 제 글을 읽으려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