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기쁨과 고통은 이토록이나 상대적이랍니다
평생 가장 충격적인 영화가 뭐였나요? 우리나라 영화 '추격자'도 후보에 올랐지만, 저는 '127시간'을 꼽겠습니다. 자기 팔을 자르는 이야기예요. 러닝 타임은 1시간 34분. 2시간 반 영화처럼 길기만 해요. 한 남자가 미국 유타주에 있는 블루 캐니언을 등반해요. 좁은 협곡은 잘 내려가야 해요. 양쪽 벽을 요리조리 잘 타면서요. 주인공은 원체 위험한 곳들만 다니던 사람이라 이 정도는 껌이죠. 콧노래까지 부르면서 내려가다가요. 협곡 사이에 걸쳐 있는 바위와 함께 절벽 사이로 훅 미끄러져 버려요. 그리고 오른팔이 바위에 끼어 버려요. 구해줄 사람은 없어요. 5일간 바위에서 팔을 빼내려고 안간힘을 써요. 바위는 꼼짝도 안 해요.
5일간요.
소변까지 마셔가면서요. 나머지 몸은 멀쩡합니다. 하지만 팔 때문에 죽어야 해요. 팔만 없으면 살 수 있는데 말이죠. 여러분은 어떻게 하실 건가요? 그렇게 죽음을 받아들이실 건가요? 주인공은 중국산 등산용 칼로 자신의 팔을 잘라요. 이 장면을 오래, 집요하게, 생생하게 보여줍니다. 극장에서 실신하는 사람, 정신과 상담을 받았던 사람도 속출했대요. 이야기이기만 했다면, 그렇게까지 몸서리쳐지지 않았을 거예요. 실화거든요. 진짜로 있었던 일이에요. 애런 랄스턴이라는 실존 인물은 죽음을 예감하고, 캠코더로 자신의 유언까지 찍었죠. 그 상황에서요. 무딘 중국산 칼로 자신의 팔을 잘라낸 순간, 그렇게 기쁠 수가 없었대요.
영화 이야기는 여기까지. 팔이 잘린 순간이 평생 최고의 순간이 된 사내가 있어요. 하지만 단순 사고로 팔이 사라졌어도 기뻤을까요? 어떤 사람에겐 '재앙'이 되고, 어떤 사람에겐 '구원'이 돼요. 같은 일이 일어나도요. 저의 소원은 분당 역세권에 32평 아파트를 사는 거예요. 매일 탄천 공원에서 달리기도 하고요. 강남이나 서울도 지하철로 삼십 분 정도면 가고요. 누가 저에게 그 소원을 들어주겠다고 해요. 저는 뛸 듯이 기뻐하죠. 대신 저와 가장 친한 친구 다섯 명에게는 반포 자이 아파트를 선물로 준대요. 그 사실을 알기 전과, 알고 나서 제 감정은 전혀 다르겠죠? 친구들은 한강 공원에서 치킨을 배달해 먹을 걸 생각하니 부아가 치밀겠죠? 왜 나만 분당이야? 길길이 날뛸 거예요.
우리는 '비교'에 왜 이리 취약할까요? 집이 비를 피하고, 잠을 재워주는 공간이기만 해서는 안되죠. 남들이 볼 때도 어엿해야 하고, 집값도 올라야 해요. 집이 집의 구실만 하는 시대는 이제 불가능한 걸까요? 갑자기 집 이야기는 또 왜 하는 걸까요?
저는 팔을 자른 순간의 기쁨을 이해할 수 없어요. 하지만 5일간 다 죽어가던 한 남자는 알죠. 그 팔이 저주고 감옥이었다는 걸. 엄두도 안 나는 깨달음이라서, 저는 깨닫고 싶지도 않아요.
달마 대사의 제자 혜가도 팔을 자르죠. 자신을 제자로 받아들여 주지 않는 달마 대사 앞에서 팔을 잘라요. 달마 대사는 혜가를 제자로 삼죠. 팔을 자르고 나서야 보이는 건 도대체 뭘까요? 고통의 너머에는 정말 자유가 있을까요? 육신에서 자유로워지는 방법은 그런 극단적인 것뿐일까요? 나는 어디까지가 나일까요? 팔이 달린 나와 팔이 없어진 나는 같은 나일까요? 꼭 필요한 것은 어디까지인 걸까요? 저도 답은 몰라요. 이 잔인한 실화는 우리에게 좋은 질문이 돼요. 거의 완벽에 가깝게 죽어가던 사람이 주는 질문이라서 더 그런가 봐요. 잔인한 영화라서 추천은 못하겠네요. 이렇게 진저리 나는 영화는 살다 살다 처음입니다. 십 년 전에 본 영화 이야기를 갑자기 왜 하는 걸까요? 저도 모르죠.
PS 매일 글을 씁니다. 여러분과 친구 먹으려고 씁니다. 매일 소곤대는 가까운 친구 한 명 두시죠. 매일 찾아가겠습니다. 말 놓으세요. 친구끼리 하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