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여행을 할까?
1. 상위 1%의 죽음을 위해
가장 억울하지 않은 삶은 소금 사막을 보고 죽는 것이다. 사표를 내고는 소금 사막만 떠올렸어요. 아무런 자부심도 없었죠. 배부른 놈, 인생 패배자. 네, 저 맞아요. 제가 더 유능했다면, 회사 생활에 잘 적응했다면 사표를 왜 써요? 승승장구 재미난 세상에서 승자의 삶을 누려야죠. 승자를 시기하다 몸 아프고, 마음 아파서 사표 쓴 거 맞아요. 버텨봤자 병만 더 늘 것 같아서 도망쳤어요. 약해 빠져서 저 살 궁리부터 한 거죠. 누구나 죽는다. 그걸 모르는 사람은 없죠. 하지만 실감하고 사는 사람도 별로 없죠. 자신이 패배자라고 느낄 때, 죽음은 친구처럼 따라다녀요. 죽고 싶단 생각도 더러 하게 되고, 삶이 무의미해 보이기도 하죠. 그래서 저는 짐을 싸고 남미로 떠났어요. 왜 소금 사막이어야 했냐면 사진 한 장이 너무나도 신기해서였죠. 차가 공중에 떠 있는 거예요. 나는 차인가? 우기에 소금 사막이 녹으면 바닥이 찰랑찰랑해요. 수면에 반사된 하늘이 바닥을 채워요. 하늘도 하늘, 바닥도 하늘인 공간인 거죠. 그래서 차가 소금 사막을 질주하면 마치 하늘을 나는 것처럼 보이더라고요. 이건 꼭 보고 죽어야겠다. 이과수 폭포와 마추픽추, 소금 사막을 보면 상위 1%의 죽음이 되지 않을까? 내 삶은 하위 10%지만, 죽음의 계층은 내가 결정한다. 그게 장기 여행의 이유였어요.
2. 세상을 바꿀 수 없다면 바뀐 세상으로 간다
왜 나는 이 모양일까? 저에게 불만이 많았어요. 당시 화제의 드라마였던 '명랑 소녀 성공기' 제작 발표회 소식을 입수했죠. 주요 일간지 기자들만 초대한 자리였죠. 제가 장나라 사진을 찍으면 잡지사 중에선 특종을 건진 셈이 되죠. 웬걸요. 입장 자체가 안 되더군요.
-어디서 오셨나요?
-유행통신 잡지사에서 왔는데요.
-죄송합니다. 오늘은 일간지 기자들만 초대한 자리라서요.
-홍보를 하려는 거 아닌가요? 한 매체라도 더 홍보되면 좋은 거 아닌가요?
-죄송합니다. 입장 불가하십니다.
사진 기자까지 대동하고 현장에서 쫓겨났죠. 왜? 왜? 내가 저 인간들보다 못한 게 뭐야? 당시 일간지 기자들의 힘은 상상 초월이었어요. 출연자들이 들리는 거리에서 아, 쟤는 왜 저따위로 말해? 아무렇지도 않게 큰 소리로 지껄일 정도였죠. 그런 안하무인 기자들이 왜 더 대접을 받아야 하죠? 유행통신은 안 나가느니만 못한 매체라는 건가요? 분하고, 창피하더군요. 억지죠. 억울하면 신문사에 당당히 합격했어야죠. 제가 세상을 바꿀 수 없다면 새로운 세상으로 도망이라도 가자. 제가 원하는 세상인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원하지 않는 세상에선 뛰쳐나온 거가 되니까요. 말장난 같지만 해방감이 장난 아니더군요.
3. 그래 봤자 코딱지 만한 지구니까요
지구가 그렇게 크지만도 않아요. 해외에서 아는 사람들을 마주치는 시대예요. 어? 너도 여기 왔어? 같은 비행기에서 학교 후배를 만나고, 런던 버스에선 예전 인터뷰했던 대학생 친구와 재회했죠. 지구 생각보다 그렇게 안 커요. 이리 떠나고, 저리 헤매도 결국 지구 안이에요. 머무는 거죠. 그냥 우리가 태어난 행성을 최대한 누리는 거예요. 별스럽게 다녀 봤자요. 시간과 공간은 써야 하는 거잖아요. 모를 때는 안 가도 되죠. 우린 알잖아요. 이백 개 가까운 나라가 있다는 것도 알고, 오로라와 남극이 있다는 것도 알아요. 다 우리 거예요. 우리는 지구인이잖아요. 보고 싶은 사람도 있고, 안 보고 싶은 사람도 있을 수 있죠. 각자의 자유죠. 하지만 그걸 어떻게든 봐야겠다는 사람을 이상하게 볼 건 아니라는 거죠. 자기 몫을 챙기는 방식이 여행인 거예요. 내가 태아난 별은, 두 눈으로 다 보고픈 마음. 저는 그래서 세상을 두리번거려요.
4. 노후 대비, 뇌 건강을 위해서
고생길이죠. 하루도 편할 날이 없어요. 안락한 집이 언제나 그립죠. 솔직히 이젠 어딜 가도 예전처럼 마냥 신기하지도 않아요. 공항에서의 복잡한 수속, 연착되는 비행기, 수상한 음식, 내 지갑을 노리는 집시들, 눈동자를 굴리는 택기 기사들. 생각만으로도 지치죠. 바로 그 고단함이 꼭 필요한 자극이에요. 여행을 꼭 해야 하는 이유죠. 나이를 먹을수록 안락함이 훨씬 더 좋아져요. 새로운 걸 시도하는 설렘도 알지만 피곤함도 알기 때문이죠. 그래서 일부러라도 짐을 싸요. 불편함에 자발적으로 뛰어들어야 해요. 뇌도, 맥박도 허둥지둥 살길을 찾아요. 그래야만 급격하게 피가 돌면서, 재빨리 늙어 버리고 싶은 몸을 들볶게 되죠. 코알라가 뇌가 퇴화된 이유가 딱히 위기가 없어서래요. 유칼립투스 잎을 독점하니 굶을 걱정 없죠. 천적도 딱히 없죠. 그래서 뇌가 쪼그라들었대요. 멍게 역시 정착하는 순간 자신의 뇌부터 먹어 치워 버린대요. 잡혀 가는 건지, 먹히는 건지 느끼지도 못 하는 거죠. 그냥 있다가, 그냥 사라지는 거죠. 어쩌면 부러운 삶인가요? 멍게 같은 최후, 코알라 같은 노년이 저는 무서워요. 더 무서운 걸 피하기 위해, 조금 덜 무서운 고단함을 택하는 거죠. 길 위에서 바가지 사기꾼과 싸워가면서 늙어 가려고요.
5. 혹시 백 살까지 살 수도 있으니까요
일흔 넘은 여행자들을 요즘 많이 봐요. 혼자서 씩씩하게 잘들 다녀요. 대부분 아니 전부 선진국 노인들이죠. 현실적으로 외국을 돌아다니는 게 더 싸게 먹혀요. 물론 어떤 나라를 다니느냐에 따라 다르지만요. 웬만한 나라는 자기 나라보다 저렴해요. 비행기 값이 추가로 들더라도요. 몸이 허락된다면 해외에 있는 게 여러모로 이득인 거죠. 그래서 매년 두세 나라를 다니는 노인이 얼마나 많은지 모르시죠? 우리나라 역시 이제 선진국이잖아요. 연금만으로 다닐 수 있는 나라가 꽤 많아요. 동남아시아에서 떵떵거리면서 노후를 누릴 수 있죠. 그런데 무섭잖아요. 혼자서는 용기가 안 나잖아요. 그렇다고 늘 동행할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고요. 그래서 한 살이라도 젊을 때 다녀 봐야 해요. 취향도 알게 되고, 낯선 나라에 대한 두려움도 적어지려면요. 여행이 배부른 자의 쾌락인 시대는 지났어요. 노후의 구체적인 플랜에 꼭 들어가야 하는 필수품이 된 거죠. 그걸 어떻게 활용하는가가 장기전이 될 수도 있는 인생을 살찌울 수 있으리라라고 봐요.
PS 매일 글을 씁니다. 재밌게 사는 게 쉽지 않죠. 쉽지 않으니까 궁리하고, 노력해야죠. 저도 작은 힌트가 되도록 하겠습니다. 우리는 분명 더 재미나게 살 수 있어요. 행복은 딱히 멀리 있지도 않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