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도 제 자신이 웃겨요. 태국에 이렇게 오래 머물 줄 누가 알았겠어요. 동남아시아에 환상 가져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으니까요. 아니 그 반대였죠. 가난하고, 지저분하겠지. 이런 편견이 있었죠. 같은 아시아권이니까 신비감도 없고요. 어떤 나라가 가장 살기 좋을까? 백이면 백, 모두 답이 다르겠죠. 가장 이상적인 나라는 어디일까? 어디에서 살고 싶었더라? 제 취향의 변화는 이랬어요.
1. 여기가 천국인가? 2000년대 초반, 런던
9개월간 런던에서 어학연수를 했어요. 히드로 공항에서 시내로 들어갈 때 그 감격은 지금도 잊지 못해요. 도시 전체가 롯데월드 같더라고요. 주택가도 다 중세 시대 성 같았어요. 잔디에서 아이들이 축구를 하네요. 우리나라는 국가 대표나 겨우 쓸 수 있는 건데 말이죠. 런던의 공원들에 반했지 뭡니까? 영주권만 주면 영혼까지 팔 수도 있었죠. 한국이 지옥처럼 느껴지던 시기이기도 했어요. 덜 일하고, 더 누리는 선진국이라면 피폐한 저를 구원해줄 수도 있지 않을까? 영국에서 영국 신사처럼 살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가을이 끝나가면서 날씨가 갑자기 확 바뀌더군요. 오후 네 시만 되면 어둑어둑. 극강의 추위는 아니지만 으슬으슬, 비까지 자주 내려서 추적추적. 우울증이 절로 오는 날씨가 되더군요. 다 옛날 집들이라 추워요. 몸을 지지며 느끼는 뜨끈함은 꿈도 꿀 수 없죠. 제가 날씨에 크게 좌지우지되는 인간이었더군요. 날씨에서 불합격. 영국에서는 못 살겠다.
2. 그러면 날씨 좋은 스페인은?
스페인은 지금도 좋아요. 사람도 좋고, 날씨도 좋고, 음식도 맛있고. 그래서 유럽 사람들도 스페인에 별장을 많이 사더군요. 서른 살 때는 스페인에 살고 싶었어요. 호기심도 많고, 어울리는 게 마냥 좋았던 나이죠. 스페인 사람은 쾌락 유전자가 촘촘히 박힌 민족이에요. 춤, 술, 섹스, 수다를 꾹꾹 눌러 담은 민족이죠. 언제나 들떠 있어도 돼요. 조용히 살고 싶으면 좀 쓸쓸해지는 느낌? 만약 스페인이 아시아에 있었다면 묻고 따지지도 않고 스페인이었을 거예요. 서양과 동양, 소통의 결정적 장벽 같은 게 제게는 있어요. 여행지로는 최고인데, 사는 건 망설여지더라고요. 늘 광적으로 노는 나라라서 그런 걸까요? 노인이 되면 왠지 더 쪼그라들어 보이더군요. 스페인 어딘가에서 늙어가는 제 모습이 상상이 안 돼요.
3. 주택가마저 그저 화보, 밴쿠버
밴쿠버도 정말 아름답죠. 한국인, 중국인, 홍콩 사람이 워낙 많아서 딱히 백인만의 세상이라는 생각도 안 들고요. 사람들도 순해요. 공원도, 녹지도 참 잘 되어 있더군요. 캐나다 이민을 진지하게 알아본 적도 있었죠. 밴쿠버에 잠시 머물면서 느낀 건, 나는 선진국과 맞지 않는구나였어요. 집들이 죄다 인테리어 잡지에 나오는 것처럼 가꿔놨더군요. 사이사이 노점이나 재래시장 같은 건 당연히 없죠. 무조건 자연, 무조건 힐링이죠. 저녁엔 딱히 나갈 곳도 없고요. 안정적이지만 심심하다. 아토피 피부염이 있는 이들은 깨끗이 나을 것만 같지만, 저는 아토피는 없으니까요. 활력이 안 느껴지면 저는 호감을 거두더군요. 여행으로는 너무 좋죠. 한두 달 머무는 것도요. 심심한 안정감을 견딜 수 있을까? 자신이 없더라고요.
4. 형을 이민 보낸 아르헨티나?
좋으니까 추천했죠. 그것도 가족한테요. 형은 저의 강력 추천으로 아르헨티나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살아요. 지금도 오래요. 와서 같이 살재요.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사는 박민우. 잘 살 거예요. 활력하면 남미니까요. 날씨하면 남미니까요. 치안이 좀 안 좋아요. 우리 형을 예로 들자면 길에서 벽돌 테러를 당했죠. 스마트폰 하나 빼앗겠다고 길에서 벽돌로 머리통을 내려친 거예요. 길바닥에 실신했죠. 이런 일이 늘 있는 것 아니죠. 그런 일 일어나면 정 떨어져야 맞잖아요. 한국 전혀 오고 싶어하지 않더라고요. 보세요. 다 자기에게 맞는 나라가 있다니까요. 남미의 대도시에서 밤에 혼자 다니는 건 누구라도 해서는 안돼요. 밤에 원 없이 산책도 못 한다면 나이 먹고 너무 슬프지 않을까요? 멀기도 너무 멀어요. 부모님이 위독하시기라도 해 봐요. 까딱하면 장례식도 못 갈 수 있어요. 아들 하나쯤은 그나마 가까운 곳에 있어야죠.
5. 중국에서 한 번 살아 봐?
의외로 중국이 만족도가 높았어요. 처음엔 비호감이었어요. 붉은 글자가 어디에나 가득해서 무섭더군요. 새치기에 대한 개념 자체가 없어요. 줄을 정말 안 서요. 기차나 버스에서 해바라기씨를 씹다가 바닥에 퉤퉤퉤 뱉어요. 남자들은 웃통을 가슴까지 말아 올리고, 배꼽 자랑을 그렇게들 해요. 침도 아무 곳에나 뱉고요. 십 년 전쯤이니까, 많이 개선됐을 거예요. 의외로 바가지나 사기꾼이 적던데요? 택시 기사한테 골탕 먹은 적이 한 번도 없었어요. 친구가 되면 한없이 퍼주더군요. 이것이 대륙의 스케일인가? 중국 부자 친구 잘만 사귀면, 집은 몰라도 차는 사주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요. 눠가 뭐래도 중국 최고. 여기서 좀 벽이 생기더군요. 세계관이 결국 중국 최고다예요. 일절 양보 없어요. 우리는 각자가 자기 의견이 너무 뚜렷해서 시끄럽다면, 중국은 그 거대한 나라가 일치단결 한 목소리예요. 가끔 정부에 삐딱한 시선도 있지만, 정말 소수죠. 결국 중국은 얼마간의 자유를 양보하고, 로봇처럼 수동적인 14억 인구로 그럭저럭 살 거예요. 혁명이요? 중국에서요? 그런 일 일어나는 거 저는 힘들다고 봐요. 대동 단결 중국 최고에 제가 끼어들 틈이나 있겠어요? 입단속이나 하면서 살아야죠. 그렇게 비위 맞추면서는 또 못 살죠.
6. 강력하게 나를 흔든 나라, 아르메니아
최근에 코카서스 3국을 다녀오고 아르메니아에 반했어요. 조지아가 세 나라(아제르바이잔, 조지아, 아르메니아) 중 인기는 가장 많아요. 아르메니아의 매력은 사람들이죠. 그렇게 친절할 수가 없어요. 아르메니아가 바다가 없어요. 주변국에 갇힌 나라죠. 최초의 기독교 국가이기도 한데, 터키인들이 아르메니아인 수백만 명을 학살했어요. 그런 아픔을 가진 고립된 나라여서일까요? 외국인이면 일단 환영이에요. 한국 사람은 거기에 10점 정도 더 추가. 한국인이라는 이유로 분에 넘치는 환대를 받았네요. 환대를 받았던 나라는 많아요. 아르메니아는 선을 넘지 않아요. 일단 달려들고 보는 나라도 많거든요. 예의와 품격이 있는 나라라고나 할까요. 백인의 나라지만 외롭다는 느낌이 한 번도 안 들더군요. 과일 천국이에요. 체리, 살구, 토마토가 세상에서 제일 탐스러운 나라죠. 가격은 또 얼마나 저렴한데요. 물론 1년, 2년 살아보면 단점이 보이겠지만 물가와 기후, 환경 등을 고려했을 때 숨은 진주가 아르메니아예요. 코로나가 잠잠해지면 아르메니아로 한 번 떠나 보시죠. 살고 싶다는 사람 많을 거예요.
7.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는 태국
태국이 좋아졌던 이유를 대라고 하면 참 어려워요. 인도 좋아하는 사람들은 제 마음을 이해하려나요? 뭐가 월등한 거지? 여행자로 방콕에 오면 눈 뒤집어지던가요? 저는 아니었어요. 5성급 호텔 라운지야 으리으리하지만 그거야 호텔이 좋은 거죠. 걷기 최악의 도시죠. 인도는 좁거나 아예 없고, 날씨는 덥고. 아, 시장이 어마어마해요. 어마어마하게 많아요. 어디를 가든 먹을 것들이 넘쳐나요. 그리고 쌀국수요. 밥보다 쌀국수가 주식이 됐어요. 십 년 이상 먹어도 안 질리면 인생 음식 아닌가요? 느리고, 배려 넘치는 사람들도 너무 좋아요. 저처럼 덜 떨어진 사람은 한국에 가면 긴장 바짝해야 해요. 빠릿빠릿이 기본적으로 잘 안 되는 사람이라서요. 아침부터 밤까지 불이 켜져 있는 나라죠. 활력은 활력대로 있으면서 윽박지름이 없어요. 덥기는 하지만 늘 쨍한 날씨고요. 물가도 여전히 저렴한 데다가 카페와 식당 천국이기도 해요. 아직까진 태국이 취향 저격 1등이네요. 또 모르죠. 미래의 취향은 미래의 제가 알고 있겠죠.
PS 매일 글을 씁니다. 청소를 하면서 노화를 느껴요. 머리카락, 피부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 일생은 결국 돌이 모래로 가는 과정과 비슷한 게 아닐까요? 먼지가 될 바엔, 글이라도 남겨야죠. 가루로 사라질 일 없는 저를 남겨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