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시간을 견뎌야만 했을 그 고통이 느껴져서 더 마음이 아파요
튀겨 먹는 것보다는 굽는 게 좋다고 해서 오븐에다가 채소를 구웠어요. 고기보다는 채소라면서요? 건강에는요. 생각보다 채소가 잘 안 익더군요. 특히 감자요. 싸구려 미니 오븐이라서인가요? 45분을 돌렸어요. 올리브 오일까지 발라서 정성껏, 아주 정성껏 45분요.
개그우먼 박지선이 어머니와 세상을 떠났다는 뉴스를 접하고는 재빨리 오븐으로 가요. 누군가가 죽었지만, 내 소중한 감자가 타면 안 되니까요. 감히 슬프다고 해도 되는 걸까요? 애도를 표한다고 해도 되는 걸까요? 내일이면 저는 또 해맑아질 테고, 아주 가끔, 이 사람은 없는 사람이구나. 까맣게 잊고 살다가, 새삼스러워하는 정도면 '슬픔'이란 단어를 써도 되는 걸까요?
그래도 지선 씨
저는 지선 씨의 죽음이 많이 아파요. 너무 많은 사람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세상에 살고 있어요. 유명인도 마찬가지죠. 매번 비슷하게 슬프거나, 충격을 받지는 않아요. 둔감해졌어요. 슬프지만, 그런 사람이 됐어요. 지선 씨는 최진실이나 김주혁의 죽음 이상으로 제게 큰 충격이에요. 나이만 어리지, 제가 많이 배워야 할 사람이었으니까요. 피부가 예민해서 분장을 아예 못 한다고 했을 때도 그러려니 했어요.
-분장으로 더 웃겨 드리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그 말은 참 멋지게 들리더군요. 더 예뻐지고 싶은 게 모든 인간의 당연한 욕망인 줄 알았어요.
-저는 제가 못 생겼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유니크하게 생겼다고 생각해요. 절대로 성형을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하지만 저는 저를 너무 사랑해요. 그래서 시술조차 할 생각이 없어요. 제가 저를 사랑하지 않으면, 누가 저를 사랑해 주겠어요?
정말일까? 당당하고, 건강한 표정에서 의심을 거둘 수밖에 없겠더군요. 우산까지 쓰고, 한강 고수부지에 했던 그 강연은 제게도 큰 가르침이었어요. 진정한 자존감은 타인에 의해서 얻어지는 게 아니구나. 누구나 인정하는 미남, 미녀에게는 없는 아우라가 있더군요. 닮고 싶었어요. 이렇게나 강하고, 건강한 사람이 되면 얼마나 자유로울까? 샘이 다 나더군요. 그런데 오늘 허망하게 이 세상을 떠났어요. 배신감도 느껴요. 제가 봤던 그 자신감과 여유는 뭐였나요? 다 연기였나요? 거짓이었나요? 백 번을 생각해도 그건 진심이었어요. 도저히 해결할 수 없었던 고통에 오래 힘들었던 거죠. 이제는 가벼워지셨나요? 호스피스 병동을 가득 채운 말기 환자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어요. 죽음의 결승선을 통과하는 건, 그 어떤 예측도 허락하지 않음을 새삼 배워요. 배울게요.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꼭꼭 숨기고 사는 사람이 하늘의 별처럼 많다는 걸요. 또 배울게요. 내게 다가올 고통을 함부로 긍정하면 안 된다는 걸요. 이겨내면 되지. 말로만 쉬운 긍정은, 해결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음을요.
생일도, 크리스마스도 못 기다리고 서둘러 가셨어요. 쫓아오는 내일이 두려워, 다급하게 탈출하고 싶으셨나요? 오늘 정말 많은 사람들이 힘이 빠졌을 거예요. 저처럼요. 지선 씨가 행복하면, 참 많은 사람에게 힘이 됐을 거예요. 그런 지선 씨가 세상에 없으니, 막막하고, 헛헛한 사람이 한둘이 아닐 거예요. 우린 그래도 같은 지구, 같은 나라에서 꽤 오랜 시간을 같이 살았어요. 큰 인연이라고 생각해요. 우리에게 주었던 건강한 웃음, 따뜻한 삶의 태도는 널리 널리 퍼질 거예요. 이젠 쉬세요. 많은 시간 힘드셨을 텐데, 이제야 안부를 묻네요. 하늘 나라에서 편히 쉬고 계시나요? 뒤늦은 인사가 죄송하기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