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때의 영웅은, 희대의 사기꾼이 되었습니다
저 역시 한비야의 책을 읽고 남미 여행을 결심했어요. 여자 혼자 다녀도 안 죽는구나. 나도 안 죽겠지. 큰 용기가 됐던 게 사실이죠. 그녀는 용기의 화신이었어요. 선망하고, 존경했죠. 뻑가라는 유투버의 한비야 유언장이란 영상을 클릭했어요. 한비야가 죽을병이라도 걸린 건가? 깜짝 놀라서요. 실시간 검색어에 '한비야 유언장'이 올라와서, 이 유튜버가 클릭을 했대요. 새로 나올 책에 유언장을 남겼다는 거예요. 이런 저질 어그로를 끄니 욕을 먹는 거라면서, 한비야의 악행(?)에 대해서 구구절절 읊더군요. 그런 논란이야 제가 왜 모르겠어요? 테러리스트와 사랑을 나누고, 자전거를 훔치고, 국경선을 몰래 넘는 에피소드를 저는 다 믿었어요. 저에겐 비슷한 일도 안 일어났지만, 로또 복권 당첨되는 사람이 있듯이요. 약간의 과정 정도야 있겠지.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어요. 자기 얼굴 가리고, 누군가를 난도질하는 영상을 딱히 좋아하지 않아요. 충격은 댓글을 보면서였어요. 한비야 때문에 개죽음당하고, 납치당한 여자들이 얼마나 많은 줄 아느냐며 분개하는 댓글들만 보이더군요. 딱히 정보가 있어서, 그렇게 말하는 건 아니더군요. 그건 저도 궁금해요. 얼마나 많은 거죠? 한비야의 책을 읽고 간 사람들 중에, 인생 파탄난 사람이 그렇게나 많아요? 사실 한 사람도 있으면 안 되죠. 순진한 독자의 인생이 파탄 났다면 간과해서는 안될 문제죠. 그런데 오지를 한 사람 책만 보고 가는 사람도 있나요? 그건 아예 불가능하지 않나요? 여행 커뮤니티에 가입해서 실시간 정보부터 검색하잖아요. 가이드북도 없이 한비야 책 한 권만 달랑 들고 오지로 떠나요? 오지로 가는 항공권 구입까지 해내는 능력자가요?
저는 한비야를 옹호할 마음은 없어요. 허언증이 있는 사람이면 비난받아야죠. 책을 읽지도 않은 사람들까지 때려죽여 마땅한 사람이라고 목소리를 높이는 이 상황이 슬퍼서요. 한 살이라도 젊을 때 여행하라고 부추기는 어른들은 악마고, 젊을 때는 죽어라 노력해야 하는 시기임을 한 목소리로 공감하더군요. 틀린 말 하나 없죠. 젊을 때 성실하면, 늙어서 안락한 여생을 보낼 수 있죠. 세상엔 공짜 없어요. 즐긴 자는, 질긴 만큼의 책임을 져야죠. 그런데 자신의 옳음을 타인에게 강요하는 태도가, 전혀 신세대답지 않더군요. 나도 옳지만, 타인도 옳을 수 있다. 그런 여유가 전혀 없어요. 윽박지르고, 강요해요. 일치단결 청춘은 여유가 없어야 하며, 그 대가로 늙어서 여행하라. 이 십계명을 다들 닥치고 따르라는 투예요. 제가 댓글만 보고, 넘겨짚는 걸까요? 일주일도 안 된 영상에 조회수가 70만 명에 육박해요. 댓글을 한 번들 보세요.
https://www.youtube.com/watch?v=Qefl9ltjU3Y
숨이 콱 막히더라고요. 이 친구들이 가진 삶의 공포가 이 정도구나. 여행 자체가 죄가 됐어요. 배낭 메고 세상을 돌면 돌팔매를 각오해야겠더군요. 조금은 자유롭고, 충동적인 사람들은 눈치 좀 많이 봐야겠어요. 세상이 더 잘살게 된다고, 선진국이 됐다고, 관대해지는 게 아니더군요. 지금의 청춘들은 상대적 박탈감을 가장 많이 느끼는 세대이기도 하죠. 계속해서 발전하고, 나아지기만 했던 과거와 달리 이제는 경제적 퇴보를 받아들여야 하는 시대예요. 아파트로, 땅으로 떵떵거리며 사는 사람들이 이렇게나 많은데도요. 누렸던 게 있는데, 그걸 토해내는 입장이 된 거죠. 각각의 세대가 서로를 이해하기 더욱 어려워지고 있어요. 세상은 가파르게 변하고, 각각의 세대는 찢어져서 섬이 되고 있어요. 조금은 낙천적이고, 비현실적일 수도 있어야 하는 청춘이 이렇게 치열하게 메말라 가는 모습에 마음이 아프네요.
PS 매일 글을 씁니다. 세상에 대한 질문을 글로 옮겨 봅니다. 세상은 언제나 평화로운데, 제 마음만 어지러운 거였으면 좋겠습니다.